김상국 교수의 생활과 경제이야기 <75> 왜 교권이 이렇게 무너졌을까?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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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교권이 무너졌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교수직으로 30여 년 생활을 한 사람으로서,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정말 기분이 좋지 않다. 화도 나고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어떤 불미스러운 일을 볼 때 두가지 태도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그런 불미스러운 결과를 보고 화를 내거나 분노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왜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사람이다. 이 두 가지 태도는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해결책을 생각하는 관점에서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전자(前者) 즉 화를 내고 통탄해하는 사람들은 매우 많다. 그러나 통탄하는 것으로는 『해결책』 은 나오지 않는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찬찬히 그 원인을 분석해 보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 원인도 첫 번째 원인이 있다면 그 첫 번째 원인을 생기게 만든 다음 두 번째 원인이 있고, 또 그 두 번째 원인을 생기게 한 그 이전의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원인을 그 다음 원인으로 계속 파고 들어가면 가장 마지막에 나타나는 원인은 매우 단순하거나 때로는 나타난 결과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는 요인이 진정한 원인일 때가 많다. 그래서 전략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이런 진정한 마지막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쉬운 일일 때도 있지만 쉽지 않을 때도 많다. ‘교권이 무너진 원인’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또한 진정한 원인이 밝혀지더라도 그 해결책에 대해서는 사회 전체의 동의를 받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일반 사회 문제나 건강 문제 등에서 이런 문제가 많은 듯하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해결하지 못해, 동일한 문제가 반복되어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교권 문제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교권이 무너진 이유는 ① 공교육에 대한 신뢰성 하락 ② 사회 일반적인 도덕감의 저하 ③ 경제력(富)에 지나친 비중을 두는 사회 분위기 ④ 사회 전반적인 개인 평균 지식량의 감소 ⑤ 대학입시 과목의 축소 ⑥ 특히 입시 난이도가 줄어든 것 ⑦ 교육자들의 질 하락 ⑧ 벌칙의 대상과 처벌 등에 대한 미리 공표된 기준이 없다는 것 ⑨ 언론 등에 발표되면 그 발표의 정당성을 따지지 않고, 곧바로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상위 의사 결정권자들의 태도 ⑩ 부모들이 자기 자식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그 원인을 남에게서만 찾는 자세 등이다. 다양하게 열거하였지만, 이것은 다시 몇 가지 근본 원인으로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내용은 고상하고, 듣기에 멋진 분석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교육 현장에서 작용되고 있는 현상을 조금은 적나라하게 지적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불편할 수도 있고, 나의 지적이 틀릴 수도 있다. 잘못된 지적을 하였다면 미리 사과드린다.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내가 지적하는 것 중에서 다행히 옳은 것도 있다면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해 주시면 매우 고맙겠다. 완벽한 지적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설령 지적한다고 해도 사람에 따라서는 판단 자체가 매우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1. 공교육에 대한 신뢰성의 하락
공교육에 대한 신뢰성 하락은 10가지 지적한 사항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여기서부터 많은 문제가 파생되기 때문이다. 과외 문제, 학교폭력 문제, 그리고 지금 가장 언론에 자주 나오는 교사와 학생 간의 문제도 여기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원인을 단계적으로 풀어 보자. 과거에는 학교 교육만 충실히 받으면 특별한 과외 공부 없이도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현실적으로 학교 공부만 하여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것은 사실이다. 괜한 다른 주장을 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고상하고 멋있는 주장을 하고 싶지 않다. 과외비에 허덕이는 부모님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실수(失手)하지 않기 위해 『공부가 아니라 무슨 실기 연습』 과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불쌍한 학생들, 그리고 이런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선생님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이 글을 쓰고 싶기 때문이다.
내 친구 중에는 고등학교 교사를 하는 친구들도 있다. 술자리에서 내가 핀잔을 주는 투로 “왜 공교육이 이러냐? 선생님들 잘못 아니야?”라고 물으면, 그 친구의 대답은 정말 하소연에 가깝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같은 교실에는 과외 공부로 이미 고3 과정까지 끝낸 아이와, 2학년 과정을 열심히 따라가는 아이, 그리고 인수분해도 못 하고, 공부하는 것에 관심도 없는 학생들이 『함께』 앉아 있다. 그러면서 나에게 “네가 선생님이라면 누구에게 초점을 맞춰 가르치겠느냐? 그리고 조금 야단을 치면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찾아와서 따지는 부모들이 있고,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좋게 그냥 지나가시지 나무랬느냐?고 말하는 교장 선생님이 있다. 너라면 어떻하겠느냐? 나도 잘 가르치고 싶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하소연하였다. 친구 말에 충분히 이해가 갔다.
앞에 앉아 있는 학생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고, 중간 학생들은 그래도 열심히 듣고 있지만, 뒤에 있는 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취미도 욕심도 없는 애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친구는 학교폭력도 함께 설명하였다. 과거 우리처럼 비슷한 능력의 학생들이 있을 때도 공부 못하는 것은 조금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도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었다. 그리고 친구 간에는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유대감(동창)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우선 뺑뺑이를 돌려 학교가 지정되고, 강남(江南)처럼 대부분이 어느 정도 잘 사는 지역이 아닌 곳은 부모의 부(富)가 균일하지 않은 곳이 많다. 그리고 같은 반(班)일지라도 학생들 간의 공부 차이가 너무 크다.
그러면 이 현실에 대해 가감 없이 생각해 보자.
앞에 있는 학생들이 뒤에서 떠들고 공부하지 않는 학생들이 친구로 보이겠는가? 아니면 공교육 제도하에서 어쩔 수 없이 같은 반에 있지만 정말 한심스러운 애들로 보이겠는가? 역으로 뒤에 앉아 있는 학생들도 앞에 있는 학생들이 친구로 보이겠는가? 아니면 정말 보기 싫은 녀석 또는 한 대라도 때려주고 싶은 녀석들로 보이겠는가?
약하게 보이는 친구에게 행하는 학대는 자연스럽게 생길 수밖에 없다. 문제의 발생 원인을 제거하지 않고, 감시와 처벌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절대 본질적인 문제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은 거죽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듯이 보이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것이 고2 담임 친구의 말이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잘 아는 중학교 선생님이 나에게 “학생들이 자기 미래 꿈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특강을 해주십시오.”라는 부탁을 받아 중3 학생들을 놓고 특강을 한 적이 있었다. 100여 명 정도였다고 기억된다,
지금부터의 얘기는 조금도 과장된 얘기가 아니다. 사실을 그대로 적는다. 그 자리는 외부 대학교수님이 오셔서 하는 특강을 듣기 위한 자리는 전혀 아니었다. 시끄러움의 정도는 일반 시장을 훨씬 뛰어넘었다. 마이크를 사용하였지만, 그 소리가 전달되지 않을 만큼 시끄러웠다. 앞에서 몇 줄 이상 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은 나의 강의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었다. 자기들 얘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앞 서너줄 학생들도 열심히 듣는 학생도 있었지만, 일부는 나의 얘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주장을 하고 싶어 나의 강의를 듣는 듯한 태도였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어느 학생이 손을 들어 질문을 했다. “교수님께서는 금수저, 은수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3포시대, 5포시대라는 말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물론 그런 말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하며, 그 이유와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러나 정작 내가 놀란 것은 강의하고 난 다음, 나에게 강의를 부탁한 선생님에게서 들은 얘기였다. “그 교수님 대단하시데요. 그렇게 학생들이 떠드는 데도 끝까지 강의하시데요.”라는 말이었다. 그 학생은 칭찬의 말로 하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말의 진실된 메시지를 듣고 마음속으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중3 학생이 대학교수를 평가하는 말로 들렸다. 그의 질문 태도는 나에게 너무 『웃자란』 아이라는 느낌이었다.
우리 주위에는 발달의 속도가 늦은 애들, 평균인 애들 그리고 조숙하게 웃자란 애들이 있다. 그러나 나의 40년 교육 경험으로 볼 때 늦은 애들이 가장 멀리 높이 날고, 웃자란 애들이 끝까지 높게 잘 나가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꼭 대기만성(大器晩成)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숙함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이 밖에 여러 이유에서도 조기교육은 그리 찬성하는 편이 아니다.
2. 그러면 왜 공교육의 신뢰성이 하락했을까?
사람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분석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연코, ① 대학입시제도와 ② 고등학교 입시제도의 폐기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입시제도가 폐기된 것은 상당히 옛날얘기다. 그 입시제도가 폐기된 데는 오비이락(烏飛梨落)의 느낌이 있지만 어느 분의 자제가 학교를 진학하는 것과 너무나 때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다른 글에서도 지적하였지만 ‘고등학교 입시제도’를 폐기하자고 주장한 사람들은 조선 말의 『을사오적(乙巳五賊)』 보다도 더 나쁜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① 공교육의 신뢰성 부족, ② 학교폭력 ③ 과외비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④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기회균등』의 문제 그리고 ⑤ 『부의 세습』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조금 의아해하겠지만 설명을 들으면 어렵지 않게 이해되리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세칭 1류, 2류 고등학교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시험을 치러 그 학교에 들어갔다. 그래서 그 학교 내(內)에서는 비교적 ① 균일한 성적의 학생들이 모였었고, ② 선생님들도 비교적 균일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르칠 수 있었으며, ③ 학생들 간에도 우정과 친교가 있었고 ④ 당연히 학생들 간에 교내폭력 등이 발생할 이유가 거의 없었다. ⑤ 선생님들도 비교적 균질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마음껏 가르칠 수 있었다. 또한 학생들도 ⑥ 내가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학교 과정을 따라갈 수 있었다. 즉 모든 학생이 대부분의 과목에서 ⑦ 과외를 해야 할 필요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과외의 필요성이 원천적으로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경제적 여유만 있다면 부모는 가능한 모든 과목에 서 일류 과외 선생님들에게서 배우게 하고 싶다. 강남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간 중요한 이유다. 모든 학생이 모든 과목에 대해 최상의 과외를 할 수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입시를 없앤 가장 큰 표면적인 이유는 ‘입시과외가 심하니 그 문제 해결을 위해 고등학교 입시를 없애자는 것이었다. 지금의 과외가 많은가? 아니면 당시 과외가 더 많았는가? 비교하는 것조차 창피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고등학교 입시제도를 없앤 간단한 사실로부터 그 후 엄청난 사회문제가 발생하였다.
첫째; 공교육의 파괴다.
여유 있는 부모가 많은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간에 학생들의 교육 정도에 현격한 차이가 발생하였다. 나는 과외를 통해 이미 모두 배웠다. 낮은 수준의 학교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딴생각할 수밖에 없다. 수업과목 책 뒤에는 오늘 내가 할 과외 과목 책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수능시험과 내신 등이 필요하다. 나는 학교에 아니 다닐 수 없다.
선생님들 입장에서는 성적이 너무 다른 학생들이 한 방에 모여있다. 어느 기준에 맞춰 가르쳐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러니 나는 교과 과정에 따라 정해진 사항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낼 수밖에 없다. 이해하고 안하고는 학생들의 문제다. 나의 문제가 아니다. 질문이 있을 때 대답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의무의 한계다.
학생과 부모 입장에서는 공교육에서 부족한 공부를 보충하기 위해 과외를 받지 않을 수 없다. 방과 후 연장수업도 낮 수업의 계속일 뿐이다.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연장수업으로 시간이 없으니 밤늦게 과외수업을 가거나, 새벽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다. 학생들은 잠잘 시간조차 없다. 피곤하다. 학교에서 졸기 쉽다. 이래저래 학생들은 피곤하다.
둘째. 학교폭력 문제다.
과거에는 다른 동창에 비해 내가 조금 공부가 부족할지 모른다. 그래도 큰 차이는 없다. 나도 공부하면 따라갈 수 있다. 그러니 나보다 공부 잘하는 애들을 봐도 원수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공부 잘하는 애와 공부 못하는 애들과의 차이는 넘사벽이다. 내가 지금부터 공부를 열심히 해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게다가 상당수의 경우 나보다 훨씬 더 잘 사는 집 애들이다. 왠수 같다. 나도 그렇고 싶지는 않지만, 친구로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다른 행동을 취하고 싶은 생각이 때로는 든다.
셋째; 여기에 불을 지른 것은‘대학입시를 쉽게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중요한 문제일수록 찬찬히 그리고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고, 행동 또한 빨라서는 안 된다. 대학입시를 쉽게 내야 한다는 주장은 일견 그럴싸하게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대학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입시를 치른다. 당연히 교수들은 시험감독을 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입시문제를 보게되고, 학생들의 대답도 보게된다. 그리고 신문 등에서도 기출 문제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시험문제를 보면 솔직히 어떻게 이처럼 쉬운 문제가 대학입시에 출제될 수 있는가? 라는 생각과 수험생들은 어떻게 저런 쉬운 문제에 틀린 답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입시가 쉬운 문제로 채워질 수밖에 없고, 입시 과목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부모들의 성화와 입시당국자들의 잘못된 생각, 그리고 그것을 부채질하는 언론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에 의한 1차 피해자는 학생들 본인이고 2차 피해자는 학부모들이며, 궁극적인 피해자는 기업과 국가의 미래다.
대학입시가 끝나면 입시문제에 대한 언론 평가가 반드시 나온다. 무슨 과목은 평년 수준이고, 무슨 과목은 조금 어려웠으며, 그래서 무슨 과목을 선택한 학생은 유리 또는 불리할 것이다. 라는 내용이다. 그럴듯하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첫째; 쉽고 어렵고가 대학입시 평가의 거의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할까? 아니면 그것보다는 출제된 문제의 질이 대학입시에서 나올만한 문제이고, 수준이었는가를 따지는 것이 올바른 대학입시에 대한 평가일까?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겠다. 어느 시험에서 “다음 기능 중에서 윈도우 기능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하면서 5개의 기능이 열거되어 있었다. 일견 쉬운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는 쉬운 문제일까? 아니면 정말로, 정말로 어려운 문제일까? 열거된 다섯 항목의 기능은 컴퓨터에 상당히 익숙한 나도 솔직히 알지 못하는 명칭과 기능이었다. 이런 문제는 쉬운 문제도 어려운 문제도 아니고 『잘못된』 문제다. 그리고 수학과 물리 문제도 월말고사 수준도 안 되는 정말 낮은 수준의 문제였다.
그러면 이것이 학생들에게 쉬운 문제이고 시험일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것이 일정 점수 이상이 되면 모두에게 자격증을 주는 시험이라면 그것은 쉬운 시험이다. 그러나 대학입시는 자격증을 주는 시험이 아니고, 일정 성적 이내에 들어가는 학생들에게만 입학이 허가되는 숫자가 정해진 시험이다. 자격증 시험과 입학허가 시험은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다.
맥아더의 웨스트포인트 성적은 평균 97점이었다고 한다. 그 성적이 너무나 우수한 성적이었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전설로 남아있고, 나처럼 미국 사람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도 인용할 정도의 높은 성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웬만한 대학입시 합격 점수는 95점 이상 98점, 99점 때로는 100점짜리도 있다. 이런 90점도 넘는 높은 점수를 요구하는 입시가 합격자와 불합격자를 올바르게 결정하는, 즉 분별력이 있는 시험일까? 우리나라 입시는 맥아더와 같이 대단히 우수한 학생들을 뽑는 시험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다.
왜 이리 우스꽝스러운 시험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을까? 더운 놀라운 것은 이런 터무니 없는 시험이 자행되고 있는데도 그것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그리도 작을까? 왜 우리는 이런 모습을 수십 년 동안 보면서도 “입시는 쉬어야 한다. 입시가 어려우면 과외가 성행한다.”라는 잠깐만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매년 반복하고 있는가? 이 고정된 사고, 도그마(Dogma)에서 언제쯤 깨어날까? 안타깝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이러한 97점, 98점이 얼마나 학생들을 괴롭히는가를 살펴보자. 대학입시 문제는 하나에 2점인 경우가 많다. 그러면 평균 98점을 맞기 위해서는 과목 당 한 문제만 틀려야 하고, 99점을 맞기 위해서는 두 과목에서 한 문제만 틀려야 한다. 그러면 이런 조심함을 요구하는 시험문제는 학생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체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학생이 『얼마나 조심스러운가?』를 검사하는 시험이 된다. 심하게 말하면 공장에서 상품을 제조하고 난 후,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불량품을 찾아내는 『품질 검수』를 하는 행위와 비슷하다.
게다가 시험문제 자체도 “이런 기능이 윈도우에 있는가, 없는가?”를 물어서는 안 되고, 컴퓨터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이 이 학생에게 있는가를 체크하는 문제여야 할 것이다. 대학입시는 그 학생의 잠재적 능력과 성적을 체크하는 것이지, 그 학생의 상품 품질 검수를 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대학입시는 우수한 학생을 초청하기 위해 공부를 잘할 수 있는 학생을 가려내는 행위이지 품질 검수나 품질검사를 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이런 쉬운 문제를 주장하면서 반드시 나오는 논리는 또다시 ① 『시험이 어려우면 과외가 늘고』 ② 학생들의 공부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시험과목』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바로 이런 주장 때문에 고등학교 입시가 사라지고, 공교육이 제 역할을 못 하게 됨으로써 “모든 학생이, 모든 과목에, 부모님의 재력 한계”에 따라 과외를 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입시 과목을 줄이는 것도 문제지만 역사 과목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 상식 밖이어서 말하는 것조차 부끄럽다. 역사를 모르면 도대체 뉴진스나 블랙핑크 노래나 듣고, 학생들 장래 꿈의 1, 2위가 가수와 연예인인 아이들을 양산하겠다는 뜻인가?
나는 여기서 오랜 관찰의 결과 하나를 말하고 싶다. 그리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말은 아니기 때문에 조금은 조심스럽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고 나이 들어 경험이 많아지면서 쌓여가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는 두가지 배경이 있는 듯하다. 하나는 모래 위에 물붓기와 다른 하나는 반석 위에 건물을 짓는 경우다. 모래냐 반석이냐는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나도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나의 생각을 말한다면 하나는 ① 그 사람이 얼마나 차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이고, 다른 하나는 ② 그 사람이 어렸을 때 얼마나 독서와 공부 훈련을 받았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다는 갓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어렸을 때의 공부는 절대 조기교육(早期敎育)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어렸을 때 얼마나 동화책을 많이 읽었고, 예쁜 꽃들을 보며 아름다운 것을 느낄 줄 알며 자랐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특히 독서하는 버릇을 부모님이 어렸을 때 키워 주었는가를 말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지식이 쌓일 수 있는 기초지식을 중고등학교 때 충분히 배웠는가? 의 문제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이 두가지가 갖춰졌다고 생각되는 아이는 비교적 쉽게 지식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입시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생활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대학입시 과목의 턱없는 감소에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특히 ① 읽기 쓰기 능력의 체크 ② 지리와 지질학, ③ 고문(古文) 시험과목이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학생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발전 가능성을 고려하였을 때 더욱 그렇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얼마 전 ④ 역사과목을 제외하자는 주장과 ⑤ 인문계의 경우에는 수학을 제외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만 어안이 벙벙하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그것도 교육부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그 사람은 공무원으로서 기본 자질이 있는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일본에서 국민들이 역사를 알면 까다로워진다. 그러니 역사를 교과목에서 빼내야 한다는 정말 일본다운 우민정책(愚民政策)을 본 적이 있다. 혹시 교육 당국자가 이것을 보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참고삼아 말하겠다. 300년의 역사밖에 없는 미국 역사책은 깨알 같은 글씨로 500페이지가 넘는다. 그러나 5천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역사책은 훨씬 큰 글자로 쓰여진 200페이지도 채 안 된다. 우리 깨어있어야 한다. 국가의 먼 장래를 위해 길게 생각하는 교육정책을 펼 때가 이제는 되고도, 되고도 충분히 되었다고 생각한다.
입시를 바로 앞둔 자식을 가진 학부모들 그리고 일부 언론들은 그런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책을 결정하는 당국자들은 그 주장이 옳고 그른가를 구분하고, 그렇게 결정되었을 때 국가의 먼 장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심사숙고하며 입시정책을 결정하여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학생의 부담은 절대로 입시과목을 줄이다고 하여, 그리고 쉽게 낸다고 하여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과외도 똑 마찬가지다. 과거의 과외 정도와 지금의 모든 학생의, 모든 과목에 대한, 부모님 재력이 한계가 되는 과외 열풍을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잠시 접어두고 우리가 다시 냉철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중학교 입시는 없앨지라도, ① 고등학교 입시는 반드시 부활해야 하며, ② 대학입시 과목도 어느 정도 늘려야 한다. ③ 입시문제의 난이도도 97점, 98점이 되어야 합격하는 것이 아니라 적정한 분별력을 갖출 수 있는 정도(7, 80점?)의 난이도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만이 과외도 줄고, 학생들의 공부 부담도 줄며, 부모님도 과외비 부담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고정관념과 다르다고 나의 의견을 쉽게 배척하지 말고, 차분히 다시한번 생각해 보기를 부탁한다.
3. 민주주의 기본 가정인 『기회의 균등』이 현 교육체제에서는 문제가 된다.
공교육의 파괴가 가져오는 정말 큰 폐해 중의 하나는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평등한 사회』라는 기본개념이 위협받는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내가 귀족이고 양반이면 나는 수월하게 밝은 미래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역(逆)으로 내가 평민 또는 상놈이면 나의 미래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회가 바로 계급사회이고, 민주주의 사회 또는 평등한 사회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개념의 혼돈이 있다. 『평등한 사회』에 대한 개념이다. 『평등한 사회』는 모든 사람에게 원하고자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는 사회이지, 노력의 결과에 대한 평등이 아니다. 즉 내가 공부를 하고 싶으면 누구나 공부를 할 수 있어야 하고, 내가 과거를 보고 싶으면 누구나 과거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사업을 잘했으면 그 잘한 사업의 결과는 나에게 돌아와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평등사회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결과를 강요하는 평준화는 『평등한 사회』가 아니다.
나의 부모가 높은 벼슬아치이기 때문에 나는 과거를 보지 않고도 높은 관직에 나갈 수 있으며(음서, 蔭敍), 내가 상놈이기 때문에 과거 자체를 볼 수 없다면 그것은 불평등한 사회다. 『평등한 사회』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불평등은 갑오경장을 거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새로운 신분제도가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부모의 재력에 의해 자식들에게 불평등한 기회가 제공되는 것이다. 이런 불평등은 한동안 우리나라에는 없었었다. 그러나 최근 갑자기 몇몇 제도가 생기면서 부모의 부에 따라 자식의 기회가 결정되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하나는 이글의 논제인 ① 고등학교 입시제도가 없어짐으로써 높은 과외비용에 따른 자식들의 교육 불평등과 ② 고등고시를 반드시 치르기 위해서는 법학대학원을 나와야 한다는 고시(변호사 시험) 제도의 변화, 그리고 ③ 일부 사립대학에서 조용히 시행하고 있는 기여입학제도다.
(1) 법학전문대학원
우선 이글은 공교육과 입시제도에 관한 것임으로 법학대학원과 기부금 입학제도는 간단히만 다루겠다.
로스쿨법은 “국민의 다양한 기대와 요청에 부응하는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 건전한 직업 윤리관과 복잡다기한 법적 분쟁을 전문적·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식 및 능력을 갖춘 법조인의 양성”에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나무랄 수 없이 좋은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법학대학원을 나오지 못하면 고시를 볼 수 없다는 것에 있다. 과거 지방의 또는 가난한 사람들도 고시라는 기회를 통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현실적으로 그것이 쉽지 않게 되었다.
교육부가 국회에 제출한 2022년 자료를 보면 법학전문대학원의 등록금은 평균 년 1,425만 2천원이다. 3년간의 교육비로만 거의 5천만원이 필요하다. 대학교 학비도 버거운 상태에서 3년간의 추가기간과 5천만원의 학비 그리고 숙식비를 추가로 부담할 수 있는 가정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즉 서민들의 법조계로의 진출은 매우 어렵다는 얘기다. 『기회의 창이 하나 더 닫히는 결과다.』
아마 그래서 어떤 고시 준비 희망생이 당시 홍준표 대선 주자에게 “대통령이 되면 과거처럼 희망하는 사람이 고시를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자살소동을 벌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2) 기여입학제도
기여입학제는 대학교에 어떤 형태의 기여를 해서 (성적에 상관없이) 입학하는 제도를 뜻한다. 보통은 학교에 돈을 “기여”하고 입학하는 형태를 말한다. 그러나 학생 본인이 학교에 큰 기부나 건물 등을 지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부모의 돈일 것이다. 기여입학한 학생과 일반 학생들과의 상대적 박탈감과 형평성의 논란 등으로 문제가 많은 제도이다. 일부 사립대학교에서 논술 등의 형식으로 소리소문없이 시행되고 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공식 발표가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미국의 기여입학제(Legacy Preferences/Admission)는 가족 중에 그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있을 경우 또는 특별히 학교에서 필요한 기부 행위를 하였을 때, SAT 1,600점 만점에서 160점 정도의 특혜를 주는 제도다. 그러나 기부했다고 해서 입학으로 꼭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학마다 운영 방식이 다르므로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근 “소수 인종 집단에 대한 가산점 수제도”가 미 대법원에서 기회균등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하여 불법으로 판결이 났다. 즉 흑인 학생들에게 백인 학생들에 비해 가산점을 주는 것이 불법으로 규정된 것이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예견하는 것처럼 다음 소송의 대상은 기여입학제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떻든 부모의 돈으로 자녀 학생의 입학이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취급받는 것은 형평성 등에서 많은 문제가 있다. 만약 그것이 시행된다면 일반 학생들에게는 『기회의 창이 하나 더 닫히는 결과』가 될 것이다.
(3) 과외비 부담에 의한 기회의 창, 부(富)의 세습화의 가능성
기여입학제도는 분명히 문제점이 많은 제도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장점도 있다. 그 숫자가 유의할 만큼 크지도 않을 것이고, 기여받은 돈을 의미 있는 곳에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외비 부담에 의한 기회의 창』이 닫히는 것은 전국 거의 모든 수험생들에게 적용되는 큰 문제다. 특히 지방 학생들과 과외의 혜택을 충분히 받을 수 없는 일반 학생들에게는 정말로 큰 문제다.
이것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있다. 소위 일류대학 신입생들의 ① 서울과 지방 출신의 비율 ② 서울에서도 지역별 고등학교 출신 비중 ③ 대도시와 중소 도시 간의 비중을 ④ 뺑뺑이 이전과 이후 그리고 ⑤ 시간이 지나면서 비중의 변화를 비교해 보면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즉 지역 간의 입시정보의 차이, 교육 수준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런 차이의 근본적인 발생 원인이 부모 부(富)의 차이에 기인한다는 것은 정말로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느 땐가 친구들과 모임이 있었다. 그때 나온 얘기다. “요즘 누가 가장 좋은 할아버지, 할머니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그 대답은 지극히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자애로운 할머니, 할아버지 또는 손자를 잘 돌보아 주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손주들의 과외비를 충분히 대주는 할아버지, 할머니였다.』 두말할 필요 없이“부모가 동원할 수 있는 돈의 크기가 자식들의 교육의 질을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나라나 좋은 교육을 받은 정도에 따라 그 사람 일생 수입이 결정된다. 즉 높은 교육, 좋은 교육은 더 많은 수입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공교육이 약화하고, 그 자리를 사교육이 담당함으로써 사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여유 있는 가정의 자녀들에게 더 많은 부가 세속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즉 『공교육이 약화함으로써 부의 세습화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정말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좋은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해서 느꼈던 약간의 열등감을 고등학교 입시를 없앰으로써 느끼는 위로감과는 아무리 작게 비교해도 그 손실이 너무 크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4. 학생들의 무질서함이 왜 이런 정도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그리고 체벌이 정말로 나쁜 것인가?
이 문제는 진실로 중요한 문제임으로 조금 심각하게 논의하고 싶다. 김홍도의 ‘서당’이라는 그림을 보면 어떤 아이가 훈장님으로부터 야단을 맞아 울먹거리고, 다른 학생들은 그것을 보고 낄낄거리며 조그맣게 웃는 그림이다. 그리고 유명 서양 영화인 “여인의 향기”를 보면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엄청나게 큰 매로 선생님이 학생의 엉덩이에 매질하는 장면이 있다.
<김홍도의 서당>
최근에 약간 변하였지만, 미국 학교에서 체벌은 1970년대 80년대까지는 일상적이었다. 76년에는 미 전역에서 1백52만1천여명이 체벌을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리고 “교사는 학부모 동의 없이 아이들을 처벌할 수 있다”는 77년 연방 대법원의 판결도 있다. 현재 미국 50개 주에서 28개 주는 학교에서의 매질을 법으로 금지했지만, 나머지 22개 주에서는 체벌을 허용하고 있다. 영국, 불란서도 허용하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이 있다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벌칙은 항상 존재해 왔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우리나라 체벌은 중국과 일본에 비하면 매우 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당이나 향교, 성균관 같은 교육기관은 물론이고, 기생 집단이나 궁중에서도 상궁이나 나인들이 무수리들의 규율을 잡는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더욱이 왕비와 후궁들 사이, 그리고 대비와 후궁들 사이에서도 체벌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998년 교육법 폐지 후 여러 법적 개정이 있은 후 2011년 3월부터는 간접체벌만을 허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간접체벌의 경우에도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는 않지만, 2020년대부터 이러한 간접체벌도 지양하는 분위기다.
직간접 체벌 대신 “그린 마일리지(상벌점) 제도”라는 것이 있다. 그린 마일리지 제도는 학생이 잘못을 저지르면 벌점을 부과하고, 그 기록을 학생의 생활기록부에 남기며, 벌점이 일정 수치 이상이 쌓이면 봉사활동, 징계, 학부모 면담 등을 하는 제도다.
그럼 이런 직간접 체벌을 없앤 결과는 어떠하였을까?
우리가 보는 매스컴에 나오는 바로 그대로다. 과거에는 교사들의 폭력으로 인한 학생들의 피해 문제가 주 내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학생들의 문제가 대부분이다. 교사에 대한 폭력 문제, 수업에 방해가 될 정도로 떠드는 행위, 수업 시간에 담배를 피는 행위, 옆 학생에게 폭력을 가하는 행위, 더욱 망연자실한 것은 최근에 어느 학부모가 수업 시간에 찾아와 선생님에게 폭언과 구타를 하는 행위였다.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나라가 왜 이리되었을까?
인터넷에 나온 몇 가지 사진을 소개해 보겠다. 하나는 수업하는 중에 교단에 올라와 누워 여교사의 사진을 찍는 학생이고, 교사를 때리는 학생 그리고 수업 시간에 옷을 벗고 장난하는 학생 사진이다. 물론 그런 학생은 전체 학생 수에 비하면 정말 극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그런 행동을 하는 학생의 숫자가 아니라, 그런 황당한 행동을 하는 학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런 학생을 선생님도 저지할 수 없는 교육 환경이라는 것이다.
(1) 교육 당국자의 책임; 너무 게으른 자기반성과 자정(自淨) 노력의 부족
나는 교육이 이런 지경에 까지 이른 것은 교육 당국자들이 1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우리나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왜 이런 풍토가 되었는가?
과거부터 일부 교육자들의 난장판에 가까운 행동은 끊임없이 지적되어 왔다. 매스컴에 발표된 내용을 일부 소개하겠다. 수업 중 술 먹고 나타나 학생들을 매질하는 행위, 지각하였다고 200여 대 매질하는 행위, 학생이 학생을 때리게 하는 교사, 기분 나쁘다고 학생 뺨을 때리는 교사, 상습적인 과잉 체벌, 여기에 따른 학생들의 고막이 터지고 타박상 등으로 입원하는 행위, 미리 예습해 오지 않았다고 80대씩 반 학생 전체를 매질하는 행위 등 이런 문제점들은 끊임없이 지적되어 왔었다.
그러나 상급 교육기관 들은 한결같이 ‘교육을 위해 필요한 행위’라고 일방적으로 말하거나, 그런 행위를 반복적으로 자행한 교사에게 적절한 처벌을 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즉 문제가 심각하고, 곪아 터지는데도 스스로 고치려는 자정(自淨)하려는 태도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진실로 올바른 교육을 하시는 선생님들에게는 정말로 죄송한 말씀이다. 절대로 그런 분들까지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기 바란다.
나도 세 명의 자식을 키운 사람이고, 나 또한 교육계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직접 겪기도 하였고, 매스컴에 나오는 일부 교사들의 행동은 참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런 옳지 못한 행동이 반복적으로 지적되고 있는데도, 문제점을 문제점으로 인식하지 않고, 필요한 대응을 미리 하지 않은 교육기관과 감독기관에 1차적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교육적 한계를 넘는 체벌과 기분에 따라 행하는 교사의 체벌은 어느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2) 부모들의 정도를 넘는 행위
그러나 2차적 책임은 부모에게도 있다. 일부 부모들의 도(度)를 넘는 행위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너무 빠른 경제성장으로 도덕 개념이 그것을 따라잡지 못하였고, 자식 숫자가 줄어서인지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올바른 사랑이라고 혼돈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너 같은 자식(선생님)은 내 자식을 교육시킬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선생님을 때렸다는 부모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우리 모두는 99.99% 필부필부(匹夫匹婦)다. 그저 그런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교사에게 수업시간에 나타나 폭력을 휘두르는 당신은 자식들에게 항상 잘 했는가? 공개적으로 야단 맞을 일이 없었는가? 당신 자식이 선생님으로부터 야단을 맞았다면 왜 그랬을까? 하고 선생님의 말도 듣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행동하였는가? 아니면 자식 말만을 듣고 일방적으로 흥분하여 행동하였는가?”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신의 그런 행동이 자식의 장래에 도움이 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가? 엄마가 잘못했을 때 엄마의 뺨을 자식들 앞에서 때리는 것이 과연 자식 교육에 좋은 일일까? 아니면 당신이 잘못했을 때 당신 부인이 자식들 앞에서 욕을 하며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 자식의 장래에 좋은 일일까?”
다시 말하지만 우리 모두는 99.99% 필부필부(匹夫匹婦)다. 선생님이라고 해서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이 설령 잘못하였더라도 “너희 선생님이 네가 모르는 어떤 다른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네가 반성해 보아라.”라고 가르치는 것이 당신 자식의 장래에 좋을까? 아니면 수업 중 교실에 나타나 난동을 부리는 것이 나았을까? 얼마 전 어느 변호사 부부가 자기 자식의 선생님을 법정에 고발하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이 기사는 나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변호사라면 그래도 우리나라 최고 엘리트 그룹이다. 이런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하였다는 것은 나에게 수십 년간 우리나라 교육의 숨겨진 맹점을 보는듯했기 때문이다.
『자식은 위를 보고 자란다』고 한다. 부모님의 말과 행동을 보고 자라고, 선생님을 보고 자라며, 교과서에 나오는 위인들을 보고 자란다. 필부필부(匹夫匹婦)인 내 아내와 남편을 그리고 필부필부(匹夫匹婦)인 선생님을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식의 장래를 위해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모가 자식에게 해주는 교육이다. 이것이 바로 부모가 자식에게 해주는 진정한 교육인 것이다. 선생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식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6. 그럼 어떠한 대책이 있겠는가?
교육에 관해서는 화끈한 대책도 없고, 무엇보다 빠른 성과를 내는 대책도 없다. 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육에 관한 대책은 시간이 걸리고, 지극히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교육에 대해 관심이 많은 나라는 더욱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떠드는 소리의 크기가 중요하지 않고, 주장의 진정성이 중요하다. 이것을 정말 강조하고 싶다.
(1) 벌칙이 적용되는 행위와 그에 상응하는 벌칙의 내용이 반드시 『사전』에 정의되고, 학생들 교사 모두에게 『주지』시켜야 한다.
“교육적 한계를 넘는 처벌과 교사의 기분에 따라 행하는 처벌은 어느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또한 어떠한 경우에도 “상식적 수준에서의 교육적 환경을 저해하는 학생들의 행동” 또한 정당화될 수 없다.
즉 처벌 대상과 처벌 행위는 자의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
가. 처벌 대상과 처벌 행위는 반드시 『사전에 정의되고 거기에 따라서 집행』되어야 한다.
나. 그리고 사전에 정의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는 공식적인 징계위원회의 등을 거쳐, 다른 유사 행위와 참고하여 필요한 처벌 행위를 공평하게 정해야 한다.
다. 그리고 자유분방한 학생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행위를 모두 미리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처벌 필요 행위가 발생하였을 때는 신속하게 대응해야 하고, 그 결과는 끊임없이 문자로 또는 세부규정으로 기록하고 업데이트해야 한다.
(2) 벌칙을 정할 때는 항상“신속한 교정 가능성”을 고려하여야 한다.
앞에서 나온 “그린 마일리지(상벌점) 제도”는 매우 좋은 제도지만 적절한 수정이 필요한 정책이다. 마일리지 제도는 학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벌점을 부과하고, 그것을 학생 생활기록부에 남기며, 벌점이 쌓이면 봉사활동이나 징계, 학부모 면담 등을 하는 제도다.
우선 학생의 잘못을 생활기록부에 남기는 것이 좋을까? 기록은 영원하고 내신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벌칙을 강화하여 잘못된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하책(下策)이다. 상책(上策)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못된 행위와 처벌 간에 ① 시간의 차이를 가능한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입학과 동시에 ② 처벌 행위와 규정을 정식 교육 시간을 정하여 “미리”알려주는 것이다. 교육기관은 원래 보수적 경향이 강한 분야다. 그러나 처벌 대상과 처벌 행위에 대해서만은 예방 차원에서 벌칙에 관한 규정을 미리 알려주어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교사가 부임했거나, 신입학생이 입학하였을 때 공식적인 시간을 통해(입학 오리엔테이션 시간 등) 반드시 교칙의 중요 내용과 벌칙의 대상과 벌칙의 종류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공지하여야 한다.
(3) 절차에 따른 행동을 하였을 때 담당 교사를 징계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처럼 정해진 절차에 따라 행위를 하였을 때 설령 부모로부터 항의가 있을지라도 담당 교사를 문책해서는 안 된다. 교장은 적절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음을 정중히 부모에게 알리고, 그것을 강조해야 한다. 항의의 큰 목소리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처벌 행위가 사전에 정의된 절차에 따라 올바르게 진행되어야 한다. 즉 내가 떳떳하게 행동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4) 일관성 있게 행동해야 한다.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① 일관성 있게 행동하는 것이고, 이에 따라 ② 교사도 학생도 어떤 행위를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예측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일관성 있는 처벌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누구나 나의 행동에 의한 미래의 결과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5) 언론 등에 의연해야 한다.
언론의 힘은 막강하다. 그리고 언론에 나오면 사회적 문제로 발전할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언론에 보도되었다고 하여 원칙을 깨트려서는 안 된다. 현재 공교육의 문제는 학교뿐만 아니라 학부모와 학생들의 문제가 크다는 것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이고, 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때로는 언론이 동감하기 어려운 주장을 할지라도 정중하지만 당당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기 위한 기본자세는 학부모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다. 내가 떳떳하게 행동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사가 잘못하였을 때는 교권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우기지 말고, 합리적인 처벌과 행동은 양자 모두에게 적절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7. 최근의 변화
“세상은 시계추처럼 움직인다.”는 말이 있다. 즉 한쪽으로 크게 치우치면, 다음에는 그 반대 방향으로 크게 움직인다는 뜻이다. 10여 년 전까지는 교사들이 어떤 행동을 해도 제재하는 세상이 아니었다. 거기에 비해 최근 10여년 간은 교권이 위기에 해당되는 시기였다.
그러나 최근 이런 행태들이 다시 중간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주장이 생기는 것 같다. 2022년 리서치 전문 기업인 ‘미디어 리얼리서치코리아’가 성인 2,39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6.5%가 ‘체벌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답하였고, 21.3%는 '허용하면 안 된다.', 12.5%는 '잘 모르겠다'라고 답했다.
수업 중 교사에게 욕설·수업 방해·무단이탈 등 문제 행동을 하는 학생에게 어떤 조처를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벌점 부여’가 32.2%로 가장 높았고, ‘퇴학 조치’ 25.0% , ‘체벌’ 24.6%, ‘말로 훈육’ 14.5%는 ‘어떤 조치도 소용없다.’가 3.7%로 뒤를 이었다.
그러나 우리 잘 생각해 보자. 어느 학생의 욕설과 수업 방해는 용인될 수 없는 행위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자기만의 이탈 행위가 아니고 공부하려는 다른 학생들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커다란 피해를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수업시간에 찾아와 교사를 폭행한 부모는 다른 부모들로부터 ‘진정으로’ 고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행위다. 공부를 하고 싶은 학생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만행』에 해당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서양이라면 아마 이런 부모와 학생은 고소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정학 이상의 처벌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쩌면 자유와 방종이 혼돈되어 있는 세상의 마지막 세대인지 모르겠다. 이런 혼돈으로는 세상은 유지될 수 없다. 지금 이런 세상이 유지되는 것은 지난 시절의 절제와 노력으로 누적된 국가의 부를 소비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실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세상이 길게 가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런 무질서한 세계는 지속될 수 없고, 질서를 원하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제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분명한 사실은 그런 무질서한 사람들이 지금 당장은 함부로 행동하는 것에 대한 처벌이 없는 듯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결코 그렇지 않다. 결국 법적인 처벌을 받게 되거나, 아니면 결국은 사회로부터 보이지 않는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은 무질서한 듯이 보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이익이 보이지 않는 실로 엮여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라도 부당한 사람들의 행동에 의해 자기 이익이 손상되는 것을 결코 오래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공교육의 확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보통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 또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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