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인문학의 위장된 '부활'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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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6년09월13일 20시06분
  • 최종수정 2016년09월15일 10시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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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과 가서 뭐 먹고 살게?’ 2014년 설날, 삼촌이 물었다. 친척집을 돌며 나는 그 질문을 오십 번 정도 더 들었다. 늘 국문과를 오고 싶던 나는 ‘속물들 같으니라고…’하며 궁시렁거렸지만 속이 썩 편친 않았다. 

 

 취업률을 살펴볼 필요도 없다.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 ‘인구론(인문계 90%가 논다)’이란 단어만 봐도 인문계의 씁쓸한 현실을 엿볼 수 있다. 불안한 인문학계의 입지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인문학 열풍이었다. 

 그러나 문사철을 대하는 세상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인문학이 도대체 무엇인가. 유령 같은 인문학은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인문학 붐은 우리를 훈계하는 기성의 목소리로 시작했다. ‘너는 젊으니 더 아파야 한다.’ 혹은 ‘몇 번은 흔들려야 곱게 늙는다.’ 식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청춘들은 이미 아파서 더 아플 곳이 없었고 천 번 씩이나 안 흔들려도 어른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공을 본 아류들은 파도처럼 출판계를 덮쳤고 책 내음 대신 돈 냄새가 나는 표지를 펴면 씽긋 눈웃음치며 이렇게 말했다.

 

‘불 켜지 마세요! 참고로 여긴 터널이지롱.’

‘고통도 슬픔도 질투도 나의 힘! 킵 잇! 킵 잇!’

 

 결론부터 말하자면, 열심히 키운 고통도 슬픔도 질투도 결국 힘이 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곪아서 증오와 불신이 됐고 ‘헬조선론’과 ‘수저론’이라는 괴물을 지탱하는 강한 뿌리가 됐다. 우리는 그 단어에 집착했다. 

 

 어린이도, 어른도, 언론도, 우리 집 바둑이도 그 단어를 마구 사용했다.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력과 패배주의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였고, 너도 아프고 나도 아파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해묵은 농담처럼 들렸다. 세상에 아프고 싶은 사람은 없다.

 우리는 삶의 무기력과 허무에 맞서 대항해야 했다. 마음에 빈 곳을 채우고 환부를 치료해줄 빨간약은 무엇인가. 인문학은 다시 대안처럼 고개를 들었다. 

 

 인문학의 확대가 일반 시민들의 평생교육 측면에 기여하는 바는 긍정적이다. 실제로 많은 문화원과 대학, 도서관은 자체적으로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인문학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시민들은 이를 환영했고, 다시 수업을 듣고 싶다는 의견이 다수를 이뤘다.

 

 그래서 처음에는 인문학이 인간과 자본을 멀리서 바라보며 대안을 제시하는 견자見者라고 생각했다. 웬걸, 인문학은 세상사를 비판하는 동시에 서서히 시장 속으로 편입되어 들어갔다. 자기 계발서發 인문학은 우선 강연과 방송으로 닻을 내렸다.

 

 자기 계발서의 경우에는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아프니까 청춘이다’식 스토리가 눈물 쏙 뺄 만큼의 욕을 먹은 뒤 수그러들었다. 근 몇 년의 출판계 동향을 살펴보자면 자기계발서의 비율이 대폭 줄고 인문학 서적의 비율이 증가했다. 웃긴 점은 인문학의 흐릿한 실체에 있다. 

 

 그것들의 보편적 논지는 ‘사회는 바꿀 수 없다. 너를 바꿔라. 고통을 참아라. 화도 참아라. 노력하면 이뤄진다’ 정도로 환원된다. 슬프게도 세상만사가 개인의 힘으로만 타개되진 않는다. 그들이 미리 내건 전제처럼 사회 구조는 부동으로 예외지 않은가.

 

 청년들에게 사회를 바꿀 것을 권고하지 않고 순종적으로 편입되길 권유하는 것이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만약 그것이 진심이라면 그들 시선에 이미 청년은 미래의 열쇠가 아닌 기성의 유산이다.

 

 인문학의 흐릿한 실체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이 자기계발서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그 이유는 너도 나도 ‘인문학’ 타이틀을 걸고 책을 찍어내기 때문이다. 서점에선 심심찮게 ‘~의 인문학’을 볼 수 있다.

 

 모든 곳에서 인문학적 교훈을 발견할 수는 있겠지만, 발견한 모든 것이 인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재벌이 말하는 위로는 인문학이 아니라 경영 원리고, 친-자본 스타강사의 생존법도 인문학이 아니다. 가령 필자가 바둑이에 대해서 책을 쓰는데 <바둑이의 인문학>을 필두로 출판하는 꼴이랄까.

 

 그렇다면 인문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문학, 철학, 역사학을 기본으로 인간을 탐구한다. 심리학, 논리학, 종교학 등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면 모두 좋으리라. 그만큼 범위도 넓고, 사실상 의미가 한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문학의 상품성은 지식과 지혜다.

 

 경험으로 체득한 체험과 지혜. 그것은 고갈하지 않는다. 작가와 기획자, PD들은 이 점을 노렸고 동시다발적으로 '교양 쇼'를 시작했다. 그것들의 엄숙한 분위기에서 작은 유머는 크게 증폭됐고 인기를 끌었다. 분명 상품성 있는 사업이었다.

 

 어려운 지식을 먹기 좋게 잘라 우리들 입에 쏙쏙 넣어주었다. 주는 대로 받아먹은 지식은 쉽게 잊혔고, 이것은 현재 강의식 인문학이 가지는 한계다. <인문학 + 쇼, 예능, 방송>의 형태는 깊이를 더하지 못하고 어떤 책의 제목처럼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에 머물 뿐이다.

 무비판적이고 지나치게 수용적이다. 이것은 인문학의 특성상 청자가 강연자에게 강한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것으로부터 기인한다. 지금까지의 인문학은 지나치게 일방적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먹기 좋게 작아지고 시시콜콜한 위로로 포장한 인문학의 미니멀리즘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인문학을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 대입하여 토론, 공론, 여론으로 확장시키는 거시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공론장의 확대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지자체는 강의식 세미나 인문학을 위해 강사 모집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함께 토론하고 대안을 도출하는 문화가 일상으로 스미게끔 방안을 고안해야 할 것이다.

 

 소위 ‘미시 인문학’의 어색한 단면은 '힐링'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사업가, 작가, 강사, 여행가, 스님 등의 우승한 사람과 이탈한 사람들이 청년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사실 그것이 큰 위로가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담을 말했고, 이탈한 사람은 너도 이탈하라고 했다. 그들 나름의 위로를 건네는 방식이었다.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한경쟁 시대를 피치 못해 사는 것에 대한 작은 공감이었을 텐데. 누군가에게는 힐링일 수도 있지만 다른 누구들은 큰 위화감을 느꼈다.

 

 화룡정점으로 기업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 채용’이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작가와 방송국은 신나게 인문학을 '찍어냈고', 청년들은 토익학원을 마치고 인문 강연을 들으러 갔다. 기업이 이 바닥에 황금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그것은 우울한 풍경이었다. 그 전의 인문학이 어설프게 '힐링' 구실이라도 했다면 지금의 인문학은 스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쫓기듯 인문학을 들었다. 

 

 문사철 베이스의 인문학이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대학가에 부는 프라임 사업도 문사철을 휩쓸었다. 일찌감치 경남대(철학과), 대전대(철학과), 배재대(국문과), 목원대(독문과, 불문과), 동아대(국문과·문창과), 중앙대(사회복지·아동복지·청소년·가족복지), 청주대(사회학과)가 폐지됐다.

 

 가엾은 복학생만 어리둥절하며 사라진 과실을 찾았으리라. 2012억을 투자한 프라임 사업은 앞으로 쓸모없는 문사철을 버리고 기업 입맛에 맞는 인재 양성 구조를 만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요구하는 것은 한 편의 코미디처럼 보인다. 우울한 풍경이다.

 

 슬픈 역사는 10억 엔에 팔렸고, 담론을 형성해가는 우리의 과정은 여전히 미성숙하다. 인문학이 간언諫言을 만들어 올바른 정책 유도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뿌리 깊은 불통不通을 끊기에 작금의 인문학은 사행성 이벤트처럼 보일 뿐이다.

 

 유령 같은 인문학 바람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돈이 되는 짬뽕 인문학은 흥하고 깊이를 더해주는 순수 학문은 왜 여전히 찬밥신세를 당하는가. 인문학이 다녀간 자리에 인문학의 본질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몇 년에 걸쳐 훈계에서 힐링으로, 스펙으로 변신한 인문학. 인문학을 내세우는 사업은 그 양이 많아질수록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천천히 그 허무맹랑함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이 사업은 돈이 될 때까지 계속 된다.

 

 그 때까지 우리는 기괴한 혼종을 마주할까. 자기계발도, 인문학도, 짬뽕도 언젠가 내리막길을 걸을 것이다. 그 전까지 무엇을 쓰는지는 당신들 맘. 단 한 가지 청년의 부탁. 주술 같은 잠언으로 우리에게 아픔을 강요하진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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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16년09월15일 10시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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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dgasdg님의 댓글

asdgasdg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보니 생각이 많아집니다. 글 정말 잘쓰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