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를 잃은 기상청, 이제는 고쳐야한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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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청의 ‘말(言)’은 언제부터 가벼워졌나
최근 ‘말(言)’에 대해 생각이 많아진 데는 뜬금없게도 지긋지긋했던 폭염과 무관하지 않다. 올여름의 폭염은 1907년 서울에서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최고였으며 가장 장기간 폭염 경보가 발생한 1994년보다 5일 적은 24일 연속 폭염 경보가 울렸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숨 막히는 더위에 “폭염이 이번 주말에 꺾일 전망이다”라는 기상청의 ‘말’은 국민에게 그 어느 때보다 의미가 컸다.
기상청의 말 1. 오보
기상청은 말을 계속 바꾸고, 틀리고를 반복하며 국민의 ‘짜증’을 제대로 건드렸다. 7월엔 올해 장맛비가 평년 수준으로 내릴 것이라고 예보했지만, 올해 장마 기간 동안 내린 장맛비는 전국 평균 332.1mm로 평년(356.1mm)보다 24mm 적었다.
비 한 방울 안 내리는데 애꿎은 우산을 들고 다니는 하루가 반복됐다. 8월엔 10일 연속(16일~26일)으로 폭염 오보를 냈다. 오죽하면 “차라리 우리 할머니한테 물어보는 게 낫겠다!”라는 유머는 현실이 됐다. 물론 기상청이 억울하듯 해명했던 ‘이례적인 기상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난 2월 기상청은 국내 장비 중 가장 몸값이 비싼 550억 원의 ‘슈퍼컴퓨터’를 들여왔다. 한 달 전기료만 2억 5,000만 원이다. 장비 문제라 한들 이를 써먹는 사람은 결국 사람이다.
오보의 궁극적 원인은 기상 장비가 내놓는 분석 자료를 해석하고 자신의 경험과 직관을 보태 날씨를 예보할 예보관이 없다는 것. 이에 대해 언론과 전문가들의 날 선 분석과 비판이 이어지면서 사면초가 신세가 된 기상청은 지난달 29일 급하게 ‘장마철 강수량 예보 및 중기 예보 정확도 향상을 위한 대책’을 발표했다.
<향후 10년 이내 ▲강수의 예보정확도 92%를 95% 향상 ▲장마철 강수 유무 예보정확도 85% 수준에서 90%로 향상 ▲100여 명의 우수 예보관 인력풀 확보>
기상청의 말 2, 대책
대책 중 ‘100여 명 예보관 육성’은 기상청이 기상 이변뿐만 아니라 예보관 자체에 구멍이 뚫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정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기상청의 대안에는 울림이 없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는 위기감도 예보에 대한 책임도 느껴지지 않는다.
예보관들을 어떤 방식으로 키워서 결론적으로 어떻게 오보를 줄일 것인지 구체적인 방법이 없다. 100명의 전문 예보관만 확보되면 기상 예보 정확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 기상청이 손봐야 할 곳은 따로 있다. 현재 기상청에서 근무하는 예보관은 전문성을 기르는데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예보관은 ‘순환 보직’이어서 2~3년 마다 타부서로 옮겨야 한다.
잦은 보직 변경으로 좀 배우려고 하면 떠나버린다. 지방 기상 대장을 지낸 한 관계자는 “관측 기계의 다양한 수치와 현상을 분석해 실제 기상의 움직임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0~20년의 경험이 필수다”라고 현 시스템을 지적했다. (매일경제 2016.09.02 일자)
남아있고 싶은 사람이 없는 것도 문제다. 예보관의 생활은 밤낮이 자주 바뀌어 그때마다 야근수당을 받긴 하지만 승진과 무관하고 경제적으로 충족되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다른 행정직으로 옮겨 승진을 노리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예보관들은 예보한 뒤에 따르는 책임에 대한 압박감이 크다. 그래서 늘 결과에 전전긍긍하며 이전과 비슷하게만 하자는 무사안일 분위기다. 이런 환경은 점점 더 예측에서 벗어나는 기상 변화에 과감한 대비가 불가능하다. 개인 능력을 발전시키는데도 도움이 안 된다. 예보관에게는 직관과 경험이 필요하고 이것이 곧 그들이 갖춰야 할 전문성이다.
이런 복잡한 내부적인 문제가 드러났는데도 기상청의 눈 가리고 아웅 할만한 프로그램만 모아 놨다. ‘예보관 자격제 실시’, ‘예보 토론 활성화’ 등이 그렇다. ‘근무체계 개선’ 항목이 있긴 하지만 미비하다. 이런 식으로는 10년 안에 제대로 된 전문 예보관 100명은 고사하고 50명도 키울 수 없다.
기상청은 현행 기상법 17조 ‘기상청 외에는 예보 및 특보를 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기상 예보권을 독점하고 있다. 지금까지 예보와 관련해 어떤 기관과 소통하거나 경쟁을 해본 적이 없다. 더 많은 논의와 시간이 필요한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깊은 고민의 흔적보다는 더위에 예민해진 국민의 ‘화’를 잠재울 바람이 불기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상청에 듣고 싶은 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대로 고쳤습니다’
기상청의 말은 올여름 신뢰를 잃었다. 사소한 말도 삼사일언(三思一言)이라 했다. 예보도 전문성을 확보한 예보관을 통해 나와야 하며 문제의 대응책도 절대 면피성이어선 안 된다. 기상청에서 나오는 말은 직원들의 직업적 사명과 국민의 신뢰로 지지가 돼야 한다. 그리고 ‘사명’과 ‘신뢰’와 같은 추상적인 것들은 오랜 시간 숙성 돼야 그 진가가 빛을 발하는 법이다.
언젠가 2호선 지하철 스크린 도어 고장으로 직원이 붙여놓은 문구가 생각난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대로 고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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