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한 특칭화를 조장하는 언론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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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되는 특성을 지닌 개개인은 하나의 집단으로 묶이곤 한다. 하나의 집단이 자주 거론될 때 그들은 무언가의 가치 매김을 당한다. 이러한 특칭화는 그 집단을 둘러싼 사회적, 문화적 선입견을 강화시킨다. 가령 대학생, 주부, 외국인, 청소년 등의 단어는 집단의 성격을 정의하는 동시에 그들에 대한 가치를 함축한다. 언론에 등장하는 ‘외국인 노동자 사기단 검거’라는 헤드라인은 단순히 ‘외국인’을 가리키는 기능을 하지 않는다. 타국에 와서 ‘우리나라 사람’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는 타지의 이방인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깔려 있다. 사기는 외국인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행해져서는 않는 행위다.
그 외에도 ‘대학생 성폭행’, ‘70대 노인 묻지마 폭행’, ‘주부 사기단 검거’와 같은 제목은 대학생, 노인, 주부를 특칭화하는 태도를 반영한다. 요즘 이런 특칭화 중 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특칭화는 ‘주부’였다. 한진해운 청문회에서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질타에 “가정주부로 집에만 있다 나와 전문성이 부족했다”는 최은영 전 회장의 말과 ‘트리오’의 광고에서 50년 동안 싱크대를 떠나지 않고 설거지를 해 온 주부를 예찬하는 모습이다. 이 두 ‘주부’라는 말의 쓰임새는 단순히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는’이라는 의미를 넘어 또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한국 사회가 만들어내고 언론이 강화시키는 ‘주부’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여성이란 단어에 곧바로 주부를 떠올리진 않는다. 하지만 ‘주부’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상을 내오는 엄마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주부라는 특정 집단에 대해 외부적으로 형성돼 내재적으로 습득된 편견 때문이다.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 가는 안주인’이라는 정의의 주부라는 개념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가족을 형성하고 정착을 시작한 시점부터 형성되었을 지도 모른다. 사냥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옆 동네의 부족과의 싸움으로부터 아이들과 여성을 지켰을 ‘바깥주인’인 남성이 있었다면 아이와 집안일을 관리했을 ‘안주인’인 여성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계유지의 수단이 약탈과 채집과 같은 물리적인 힘에 의존하지 않고 능력과 자본에 의해 결정되는 21세기에서 조차 가정과 여성을 획일한 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처사다.
문제는 주부의 종사자로 여성이 연결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만들어지는 ‘주부’에 대한 특정 이미지, 즉 특칭화다. 4050세 무직의 여성을 한 데 묶어 흔히 ‘주부’라고 일컫는 언론을 시작으로 그 외의 미디어에서 비춰지는 주부는 소위 엄마를 빙자한 아줌마다. 이들은 주관이 뚜렷한 주체적인 인물상보다는 가족을 우선수위에 두며 수다와 쇼핑을 일삼는 모습으로 그려지곤 한다. 우리는 ‘아줌마’의 정치적 견해나 사회적 가치관을 궁금해 하지 않는다. 거실에 앉아 드라마를 보는 저들에게 물어 뭐 하나라는 마음이 무심코 깔려있다. 이런 모습은 주부는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주체적인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며 오히려 사회와 동떨어져 현시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질 위험성을 제공한다.
이렇게 주부와 여성을 떼어 내어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주부(主婦)’ 단어 자체에서 그 설명을 찾을 수 있다. ‘婦(며느리 부)’로 지칭되는 사람은 바로 여성이다. 아내, 혹은 며느리를 뜻하는 한자어로 가정을 만드는 사람을 ‘여자’로 지칭함으로써 ‘집안 일’과 여성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킨다. 주부라는 단어에서 여성을 발견하는 것은 집안일을 도맡아 해 오던 엄마의 모습을 보며 자란 환경 때문이 아니라, 언어에 ‘특정한 성질(여자)’을 부여함으로써 자연스럽고 교묘하게 여성을 집 안으로 밀어 넣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어의 경우, PC(Politically Correct)언어를 바탕으로 ‘housewife(직역 주부)’를 ‘homemaker(가정을 만드는 사람)’로 부르자는 운동이 일었다. 그리고 후자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장려해 남녀노소 누구나 집을 관리하는 것을 할 수 있으며 가정을 만든다고 칭하며 그 노고를 높이 사고 있어 주부가 갖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 역시 모든 예문이 ‘She is a homemaker.’로 만들어지는 것을 미루어 보건데, 실질적인 변화는 크게 없었다.
언어가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 것인지, 혹은 사회가 언어가 만들어낸 범위를 따라가는 것인지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혹은 무엇이 먼저인지를 따질 필요는 없다. 다만, 언론이 특칭화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특칭화가 사회 전반에 걸처 자리 매김하고 있다는 것은 최은영 전 회장의 “주부” 논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진해운 청문회에서 전문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국회의원들의 질타에 “가정주부로 집에만 있다 나와 전문성이 부족했다”는 최은영 전 회장의 말은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그러면서 언론들은 앞 다투어 선량한 ‘주부’를 폄하하는 발언이며 많은 주부들이 최 회장의 말에 화가 났다는 보도를 연신 냈다.
이러한 비판은 위에 언급된 ‘주부’라는 단어의 특징을 고려했을 때, 일면 타당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언론들의 태도가 눈에 거슬린다. 한국 사회에서 가정주부 폄하와 모독은 계속해서 있어왔고 언론은 이를 은근슬쩍 명확하게 하는데 일조했다. 같은 여성이 주부를 비하하자 너도나도 그 책임을 회피하려하며 ‘개인’인 최 회장을 비난했다.
여기서 모순인 것은 과거 최은영 전 회장에 대한 언론 보도는 ‘주부’인 회장이었다는 것이다. 최은영 전 회장과 현정은 회장이 비슷한 시기에 각각의 해운업이 어렵게 된 올 4월에 언론은 앞 다투어 “회장님 된 사모님…‘닮은꼴 퇴장’”, “최은영 회장은 그 전까지 가정 주부였다. 아무런 경영수업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라고 운운하며 이들이 가정주부로 있다가 나와 전문성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내놓았다.
심지어 채널A는 “명문가 출신으로 경영 참여 전까지 가정주부였다가 '금녀의 영역'인 해운업에 뛰어들어”라는 보도를 내 놓기도 했다. 즉 최 전 회장이 “가정주부” 운운하게 만든 것도, 그녀를 주부로 정의 내려버린 것도 모두 언론이라는 것이다.
‘트리오’ 광고에서 주부에 대한 이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며 이를 또 한 번 고착화시킨다. 50년간 부엌을 지키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이는 광고가 ‘어머니의 사랑’으로 포장되고, 그러한 여성이 칭송받는 사회가 바로 한국 사회다. 최 전 회장이 책임 회피를 위해 자신이 비전문가임을 강조하며 ‘가정주부’를 팔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부당한 특칭화는 개인의 사례를 하나의 집단의 사례처럼 이야기함으로써 잘못된 사회적 인식을 재생산함과 동시에 사건이 실질적으로 다뤄져야 하는 진실을 흐린다. 어떠한 집단이 고질적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성질을 악용해 사태의 본질을 흐리는 언론의 플레이는 사회적 갈등을 더욱 심화시킨다. 풀리지 않은 사회적 갈등은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사용되는 미끼에 불과하다. 즉,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야기’로 풀어나감으로써 사건의 심각성을 약화시킨다. 거대한 체계 안에서 희생되는 개인이나 집단에 중점을 맞춰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목적이다. 구의역의 비극적인 사건에서도 기사와 칼럼은 앞 다투어 ‘19세 청년’을 표제어로 택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야 하는 사회적 국가적 의무의 핵심을 오도할 위험성이 있다.
언론은 언어를 다루는 매체인 만큼 어떤 단어를 어떤 상황에 사용하는지에 대해 신중하고도 섬세해야 한다. 주부와 같이 모성애를 가장해 여성을 폄훼하는 단어는 그 사용에 주의해야 한다. 사건을 중립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보도하는 것, 부당한 특칭화보다 본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지금 언론에게 필요한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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