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과 <쓰는 일> 의 사명과 너비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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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내성으로 평범해지는 순간은 이미 평범해져 발견되지 않는다. 또 그것이 쌓이면 거대한 폭력이나 폭력의 집합이 되기보단 정반대로 일상적인 것이 되어 순응하는 편이 도리어 쉽다. 그것을 발견하는 일은 드문 일이며 혹 발견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선택지에 놓일 것이다.
부동의 외면 앞에서 발견한 것을 소리치거나, 소리치지 말거나. 그러나 앞서 전제하듯 그것은 부동이며 소리친들 들리지 않으며 들려도 듣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똑같이 ‘폭력적인’ 사람으로 순응해버리거나, 혹은 ‘폭력적으로’ 지각을 유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다를 바 없는 폭력이기에 결국 폭력은 발산되지 못하고 스스로 수렴되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의 모든 약자는 자력구제를 일삼으며, 가해자의 폭력은 평범하고 당연한 것이 되어 늘 우리 곁을 맴도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언론의 역할은 어느새 평범해진 폭력의 실체를 폭로하는 것이다. 그들의 사업은 소문처럼 만연한 폭력의 상을 포착하고 그것을 표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언론은 그런 점에서 불의에 대한 저항으로 소리치는 자가 될지언정 암묵하는 방관자 혹은 권력의 앞잡이가 될 수는 없다.
특히 권력자인 강자의 폭력이 국민인 약자로 향할 때, 언론은 약자의 편에서 피식자가 알 수 없었던 강자의 기제를 전달하여야 한다. 가령 그간 강자의 기득을 보장하고 폭력을 정당화했던 낡은 구조를 충실히 밝혀야 한다. 혹자들은 언론의 이러한 행위를 두고 선동 혹은 날조라 매도하지만, 언론의 목소리가 진실이라면 그 따위의 모함은 들려도, 듣지 않을 자격이 충분하다.
덧붙여 약자의 반발을 선동이라며 역선동하는 일은 한 세기 전 3·1운동을 앞둔 국민에게 이완용이 했던 연설의 요지이기도 하다. 언론이 합당한 진실을 전제로 강자가 아닌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는 오직 언론만의 특권은 아니다. 폭력에 대한 감시는 모든 쓰는 행위에 내재한 고유한 특성이다. 그것이 어떤 텍스트로 발현되든, 가령 뉴스와 같은 실제의 것이 될 수도 있고 예술의 픽션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여하 막론하여 그것이 전달하는 메시지의 요추는 동일하다.
픽션의 존재론은 결국 현실의 것을 굴절시키거나 우회시켜 더 인간다운 삶의 방향을 피력하는 방식이다. 비록 그것이 아무리 현실성 없는 헛소리일지언정, 그것은 결국 현실의 지반에서 창조된 가설과 소결론들이다. 그러므로 픽션의 우울한 풍경이 현실에서 재현되는 것은 한편으론 우리가 역사를 잊은 채 픽션이 제시하는 소결론을 방치하여 도래한 결론을 뜻하기도 하다.
인간의 삶이 항상 정확한 인과관계의 개연성만으로 개진되지는 않는다. 도리어 우연과 즉흥적이며 우발적인 것들을 쉼 없이 견뎌내는 것이 우리의 삶과 차라리 더 밀접하다.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의 이성과 자유에 대한 강한 믿음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탄생하며 그 훨씬 오래전부터 역사를 진정으로 개진하는 동력은 초현실적인 것, 바로 픽션이다.
우리가 법, 돈, 신과 같은 가상의 실제를 집단적으로 믿는 것은 현실을 더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함이다. 그것을 믿는 일은 집단의 암묵적 동의를 동력으로 삼은 사회적 정의이지 자연적 정의는 아니다. 그 둘을 혼돈하고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허물어진 사람을 우리는 흔히 광신도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그런 자의 분신이 국가의 의제를 결정할 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이비 픽션이 정치가 되고 국정과 뒤섞여 제정일치가 될 때, 또 그것이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일일 때,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파국의 길을 걷을 수밖에 없다. 더불어 그것이 자본과 결탁하여 강자간의 유착을 형성한 경우라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현 시점 대한민국이 말하던 소위 ‘어른들의 시스템’은 실체 없는 픽션, 다시 말해 종교적 제의祭儀를 받던 사이비 집단과 그를 따르는 기생 집단이 펼친 가면극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현실이 가상적인 것의 지배를 받았고, 그녀에게 일말의 희망을 보며 믿던 자들마저 그동안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에 허무와 분노를 느꼈다. 그녀는 우상이었다. 신권을 휘두르는 자의 분신으로서 그녀의 그나마를 연명하던 사랑마저 모두 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인본적’ 정치 술수를 재개하는 것을 보자니 화가 나기 보단 마음이 저릿하다.
목각인형 피노키오도, 석고로 된 피그말리온의 조각상도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제페토와 피그말리온의 진심어린 사랑이 있기에 가능했다. 사랑받지 못한 인형의 사람 되기 프로젝트는 두고 볼 일이지만, 그 결과가 어떨지는 누구들 빼고 다 아는 우화의 결과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는 애초 역사교과서 갈아치우듯 얼렁뚱땅 찍어내는 사업이 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조짐을 엿보는 일이 쉽지 않다. 언론의 집요함이 연일 특종으로 더 큰 부조리와 부패를 끊임없이 건저올리고 있지만 우리가 느끼는 것은 분노보단 허무함이 지배적이다. 그야말로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말로 이길 자신이 없을뿐더러 역사를 입맛대로 바꾸는 사람들과 역사적 사명감으로 싸워야 하니 의문의 허무함과 낭패감이 밀려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언론과 대중이 끊임없이 목소리를 피력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분노보다 허무함을 강하게 느끼는 것은 그동안의 목소리가 강자에 의해 짓밟히는 역사를 반복했기 때문에, 그들의 구조적 폭력이 가십이나 소문이 되어 사라지는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고리를 끊어야 할 세대다. 그간의 역사가 끊임없이 강자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며 위무하는 것으로 동력을 삼았다면, 앞으로도 역시 새로운 형태로 등장할 잠재적 면죄부를 암묵하며 폭력의 역사를 반복할 것이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쏠’ 수는 없겠지만, 펜이나 촛불로 그것을 대신할 순 있다. 서문을 연 폭력의 재현이 아닌, 호소와 규탄의 방식으로. 폭력이 소리 소문 없이 일상으로 복귀하는 일을 막는 것은 언론과 모든 쓰는 일의 사명이다.
<언론>의 사명과 악어의 눈물
이를 위해 언론은 우상을 신격화하여 찬양하지 말아야 한다. 국가의 그것은 쇼비니즘이나 파시즘적이며, 종교에선 광신狂信이나 사이비의 형태로 맹신을 표현한다. 더불어 그 둘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오직 다르다는 이유로 살육한 둘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야기며 ‘우남찬가’, ‘박비어천가’, ‘독재자의 동상 건립 추진’ 혹은 ‘그 딸의 형광등 100개를 켠 아우라’ 따위가 그 예가 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바보 같은 뉴스나 속보를 퍼나르며 자족한 모 언론이 반증한 것은 결국 언론의 타락과 부패였다.
즉 기자의 프로페셔널리즘을 욕하기에 앞서 근본적으로 행정과 언론의, 또 사이비의 정치·자본적 결탁이란 구조적 폭력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악행을 정당화하는 구조, 소위 ‘어른들의 시스템’이 폭력과 더불어 ‘평범한 악’으로 도사리는 이유는 그 곳에 있다.
그렇다면 부패한 언론이 오랫동안 민주주의 언론의 당위를 깨부수고, 다시 그 진창으로 탕자처럼 돌아와 한 줌의 의미를 발견했다고 자축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 일인가.
우상과 시스템에 대한 맹신은 결국 눈 먼 장님과 다를 바 없으며 앞장서 우상을 찬동하는 언론이 있다면 그것은 아류 정치집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무거나 빠르게 찬양되는 시대를 살며 우리는 그 무엇도 찬양하지 말아야 하며 언론은 이에 앞장서 우상을 허물어야 한다.
다음으로 언론은 소문처럼 무성하기만 한 폭력의 실체를 상像으로 정박시켜야 한다. 그것을 비하하지도 말고 미화하지도 않아 실체를 응시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지난 폭력을 기억하게끔 하는 지반 위에 선다.
같은 맥락에서 현재 SNS로 하여금 언론적 기능의 너비가 확장되고 사회 각 분야 모든 종류의 폭력을 막론하고 사회적 아카이빙이 조성되는 것은 마침내 상식이 통용되고 있다는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기쁨임에 틀림없다.
언론의 더 나은 미래를 향하는 발걸음은 이러한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폭력을 고발하는 장을 독립적으로 형성하여 약자의 눈물을 대변하는 것. 강자가 아닌 약자에게 자학적인 반성을 강요하지 않도록. 폭력에 대한 응징이 사라지고 처절하기 짝이 없는 자력구제가 재현되지 않는 방향으로. 변화의 동력은 그 곳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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