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김상국 교수의 생활과 경제 이야기 <91> 어린아이 또는 젊은 자식을 가진 어머니께 드리는 글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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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4년03월27일 11시00분
  • 최종수정 2024년03월27일 10시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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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90화> 글에서 나는 중 1학년들에게 한 강의를 소개하였다. 그런데 사실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강의가 있다. 그것은 자식을 둔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었다. 그러나 나의 전공이 경제학이고, 또한 기업 강의를 주로 하였기 때문인지,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 달라는 부탁은 아직 받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내가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하고 싶었던 강의를 말해 볼까, 한다.

 

내가 어머니 대상 교육을 하고 싶은 것은 명백한 이유가 있어서다. 그것은 어머니의 중요성이, 아니 엄마의 중요성이 너무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어머니가 중요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을 리 없지만, 현대에는 어머니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1. 어머니의 중요성이 현대에서는 왜 더욱 커질까?

 

그 이유는 분명하다. 

 

첫째; 옛날 농본주의 사회에서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함께 집에 계셨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보고 배울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현대 산업사회에서 아버지는 일찍 출근하여 밤늦게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을 기회 자체가 별로 없다. 

 

둘째; 같은 이유이기는 하지만 자식이 특히 어린 자식이 부모와 있을 수 있는 대부분의 시간은 어머니와 함께다. 그러니 자녀 교육에 절대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일 수밖에 없다.

 

셋째; 이것은 인류 진화와 관계있는 일이지만, 내가 관찰하기에 여자는 천성적으로 남자보다 훨씬 더 지혜롭기 쉬운 체질인 듯하다. 

 

틀린 얘기일지 모르지만, 남자와 여자는 진화론적인 목적이 서로 다르다. 남자의 첫 번째 목적은 먹을 것을 구해 오는 것이다. 사냥을 하든 논밭을 일구든 1차 생산 담당자는 남자다. 그러니 남자는 생각이 단순해야만 한다. 사냥할 때는 쫓는 동물 잡는 것만 생각해야 한다. 잡은 동물을 가지고 무슨 요리를 할까? 둘째 놈이 아픈데 그놈이 지금은 조금 차도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무조건 지금 쫓고 있는 동물을 잡아야 한다. 더욱이 맨날 사냥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앞에 나타난 저 동물을 잡지 않으면 내 가족은 굶을 수밖에 없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그래서 남자는 본질적으로 목적지향적이고, 그 목적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것‘만’생각하는 단순지향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 비해 여자는 훨씬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우선 남편이라는 사람이 그리 믿을만하지 못하다. 필요할 때마다 사냥을 잘해와야 한다. 어쩌다 그럴 때도 있지만, 경험으로 볼 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나는 이런 들쑥날쑥한 남편의 사냥감을 자식들에게 지속적으로 먹이기 위해 계획을 세워야 한다. 남편이 사냥 못 할 때를 대비하여 어떻게 보관할까? 또 자식들에게 어떻게 나누어 줄까? 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을 보살펴야 한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새끼들은 끊임없이 칭얼거린다. 아픈 놈도 있다. 더 손이 많이 가는 자식도 있다. 더욱이 남편이라는 자는 사냥만 다녀오면 피곤하다고 퍼질러 잔다. 이런 복잡다난한 일들은  "끊임없이" 챙겨야 하는 것이 여자들의 몫이다. 그리고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은 끊임없이 생긴다. 그래서 여자들은 바쁘다. 항상 바쁘다. 잔 생각도 많이 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어린 자식들과 덩치 큰 남편이라는 또 다른 자식도 챙겨야 한다. 

 

이것이 300만 년 우리 인류 진화의 역사다. 그런 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여자와 남자 사이에는 상당한 DNA 차이가 생겼다. 

 

남자는 직설적이고, 목적 지향적이고, 사고가 단순해졌다. 복잡하지 않다. 그리고 복잡해서도 안 된다. 

 

여기에 비해 여자는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1년 사시사철 식량 공급이 균일하지 않다. 그러나 여자는 그것을 균등하도록 배분해야 한다. 사냥 이외의 온갖 자질구레한 집안일들도 챙겨야 한다.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생각하여야만 한다. 작은 새끼(자식)들도 끊임없이 돌봐야 하지만, 커다란 자식(남편)도 돌봐야 한다. 그러니 여자(어머니)들은 항상 돌봐야 할 일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니 어머니들은 작은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항상 바쁘다. 잔소리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고착되었다. 어떤 때는 저 왠수 같은 남편이 정말 이해되지도 않고, 화성 남편과 금성 여편(여성)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2. 그러나 현대에는 어머니의 역할이 변하게 되었다.

 

나는 페미니스트 적 성향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내가 여성판을 무조건 들어주는 사람이라고는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인류 발전 역사는 자연스럽게 여성들이 1차 생산 이후의 2차 분배에 더 신경을 쓰도록 진화하였다. 그러나 이런 진화는 여자들에게 큰 것보다는 작은 것에 집착하도록 만들었다. 즉 여성들에게는 내 가족에 관한 것이 최우선이 되고, 작은 욕심이 더 많게 되었다. 그래서 큰일과 중요한 미래 방향의 결정보다는, 눈앞의 일이 더 중요하고, 일을 실행하는 도중에 발생하는 작은 문제점들의 해결에 훨씬 더 민감하도록 발전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남자들의 특징에 중요한 특성 하나를 더해야만 할 이유가 생겼다. 즉 남자들은 단순하고, 목적지향적이고, 여자들이 보기에는 정말 덩치 큰 아이로 보일 때도 있지만, 중대사를 판단해야 하는 경우 그리고 큰 방향을 결정하는 일에 서는 남자들이 훨씬 더 지혜롭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성들에게도 하나의 특징을 더 해야겠다. 여성들은 잘될 경우도 생각하여야 하지만, 잘못될 경우도 대비해야만 한다.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성들은 교육을 받지 않아도, 생활에 관한 작은 일에 대해서는 남자보다 훨씬 더 지혜로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비해 남자는 여자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아야 지혜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이런 주장은 내 생각일 뿐이므로 얼마든지 틀릴 수 있다. 그러니 시비 걸지 말기 바란다. 동의하면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해 주시고, 아니면 그냥 넘어가 주시면 고맙겠다. 

 

3. 이런 사회적 변화가 어머니 역할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까?

 

자, 그러면 내가 왜 자식을 둔 어머니 말씀을 한다면서, 이렇게 긴 서두를 말해야 했을까? 거기에는 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우선 세상이 변하였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남편의 역할에는 큰 차이가 없다. 즉 남편은 과거나 지금이나 1차 생산 담당자다. 직장을 다니는 많은 여성분도 있지만 여기서는 일반적인 흐름을 말하는 것이니, 너무 세부적으로 따지지 말기 바란다. 그러나 여성들의 부담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 과거 남편들이 사냥해서 먹이를 구해 오는 부정기적인 먹이 공급에 비해, 지금은 훨씬 더 안정적으로 수입이 들어오게 되었다. 큰일이 없는 한 월급은 정기적으로 들어온다. 그러므로 부정기적 억이 공급(수입)에서 오는 것을 평준화시켜야 하는 여성들의 첫 번째 중요한 임무 부담이 크게 줄어들었다.

 

둘째; 사냥의 크기 즉 월급의 크기(양)도 가족을 부양하기에 어느 정도 충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욕심껏 충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도 잘 안다. 그러므로 과거에 비해 부족한 자원(사냥감, 월급)으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먹이를 분배해야 하는 여성들의 두 번째 임무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셋째; 노동력을 줄여주는 많은 생활도구들이 생겨났다. 과거라면 10시간 걸릴 일도 기계의 도움으로 1시간이면 되거나, 아예 하지도 않고 기계에 맡기거나, 타인에게 맡길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과거에 비해 시간이 넘쳐난다.’ 게다가 키워야 할 자식들도 한둘밖에 없다. 즉 인류 발전사적 관점에서 볼 때 여성들이 신경을 써야 할 대상 자체가 급격하게 줄어 버렸다.

 

먹잇감(소득)은 과거 어느 때보다 풍부하고, 시간도 넘쳐나니, 여성들은 이제 다른데 신경을 쓰게 되었다. 바로 여가선용(멋지게 말하면 레저활동), 자기 생활의 추구, 화려한 치장, 성형 등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는 샤넬, YSL, 특히 루이 부이통 등은 과거에는 유럽 왕실과 극히 소수의 특권층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상품들이었다. 그러나 과거와 비교하면 지금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상품이 되었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상품이 된 것이다.

 

내가 보기에 20세기 초반부터 21세기 중반까지 사는 인류는 특히 여성들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축복받은 세대라고 생각한다. 내가 여기서 21세기 중반까지라고 표현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4. 지혜와 지식이 분화되는 세상의 도래

 

세상이 변하여 여성들이 훨씬 더 자유롭게 되었다. 하지만 과거처럼 생존에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 줄다 보니, 안타깝게도 여성 고유의 지혜(Wisdom)를 쌓을 수 있는 기회 또한 줄어드는 것 같다. 교육의 기회가 많아지면서 지식(Knowledge)을 쌓을 수 있는 기회는 더 많아졌지만, 자연스럽게 지혜를 쌓을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드는 것 같다. 

 

지혜(Wisdom)와 지식(Knowledge)은 같은 존재가 아니다. 두 개는 상호 연관은 있지만 서로 다른 상이한 존재다. 

 

지식은 사물 자체에 대한 지식이다. 자동차와 TV는 무엇이고 어떤 원리로 작용되며, 우리나라 역사와 세계사를 공부하고, 지구와 달에 관해 아는 것은 지식이다. 그러나 지혜는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인간의 품성에 관한 것, 삶의 의미에 관한 것,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 진리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 등은 지혜(Wisdom)에 해당된다. 

 

지식은 지혜를 쌓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지혜는 ① 삶에 대한 깊은 관찰 ② 독서 ③ 자기만의 골똘한 생각 ④ 경험과 지식 등이 쌓여서 생기는 것들이다. 

 

과거에는 삶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에 인생사나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힘든 인간과의 관계를 겪으면서 또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지혜로워질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어려움이 별로 없다. 물론 현대 여성들도 어려움이야 많겠지만, 과거 먹는 것 자체부터 고민해야 할 세대들과 비교하면, 지금의 고민은 고민 자체가 사치일지 모른다.

 

그래서 이제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과거 어느 때보다 교육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지식을 가르쳐 주는 학교나 기관은 많이 생겼지만, 지혜를 북돋아 주는 사회 분위기는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옛날에는 나무라는 어른들도 많았다. 따라야 할 규칙도 많았다. 최소한 천자문과 명심보감 정도는 외워야 했고, 논어와 맹자도 읽어야 했다. 신분에 따라서는 시경, 서경, 사기, 주역도 공부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책들의 내용은 대부분 “수신, 치기, 치국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현대 교육은 수신(修身)에 관한 교육보다는 수학, 과학과 같은 실용적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과거 가장 중요했던 수신과 치국에 관한 교육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우리 현대 교육의 맹점이 바로 이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양의 교육은 절대로 실용적인 것 만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튼스쿨이나 컬리지(College)의 경우, 협동심을 기르는 체육이 가장 중요한 과목이고, 끊임없이 남에 대한 양보, 약자에 대한 배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Men and Women for Others, Men and Women for Better World)들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에 반해 우리나라 교육은 이런 인적자본(Human capitals)에 대한 교육 없이, 그저 기술적이고 기능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교육이 되어 버렸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인적자본을 강조하는 교육을 아예 제거해 버렸다.

 

그 결과가 바로 우리가 매스컴에 나오는 불미스러운 사건 기사들이 발생하게 된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5. 현대 환경에서 어머니들의 새로운 역할 

 

과거와 현대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자원이 풍부해지고, 교육적 측면에서는 자식과의 시간을 이제는 어머니가 『독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과거 어느 때보다 이제는 어머니들이 더 현명해져야만, 즉 지혜로워야만 경쟁력 있는 자식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생각하는 어머니의 중요한 역할 변화는 다음과 같다.

 

(교육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서는 나의 지식이 닿지 않기 때문에, 평소 관심이 있었던 어머니들 교육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다.)

 

첫째; 전통적인 엄부자모(嚴父慈母)가 엄모자부(嚴母慈父)가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이미 설명하였다. 우선 아버지는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 특히 어린 자식과 같이 있을 시간이 별로 없다. 이런 아버지가 엄한 아버지(嚴父) 역할을 한다면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기피의 대상이 되기 쉽다. 이제는 자식들과 항상 같이 있는 어머니가 엄한 역할을 하고, 어쩌다 계시는 아버지는 자애로운 역할을 담당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런 역할을 현명하게 잘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어머니 사이에 긴밀한 사전 대화가 많아야 한다. 그리고 각자 역할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합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둘째; 어머니 스스로가 지혜로와야 한다.

 

엄격한 어머니는 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지혜롭게 엄격한 어머니가 되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면 그것은 지금까지 인류 발전 과정에서 생긴 DNA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냥하고, 단순 목적 지향적인 아버지는 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부드럽게 돌보고, 다독거리는 것이 엄마의 DNA 적 역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아빠는 거의 대부분 나가 있고, 어머니는 옆에 있다. 그리고 엄모자부(嚴母慈父)는 DNA에 반(反)하는 행위다. 쉽지 않다. 그래서 어머니가 DNA가 가르치는 전통적인 어머니 역할만을 하면, 그 자식은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 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자식, 심한 경우에는 결혼해서도 엄마의 지시를 원하고 따르는 마마보이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 주위에 가끔 보이는 이런 젊은이들은 DNA가 가르치는 엄마의 역할만을 충실히 따른 어머니 밑에서 자란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셋째; 풍요로운 삶이 여성들이 지혜로워 질 수 있는 기회를 더욱 줄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경제성장에 성공한 나라다. 후진국에서 중진국을 거쳐 GDP 세계 10위인 선진국이 된 나라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 성장한 유일한 국가다. 이런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인당 돈은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하게 되었다. 풍부해진 돈의 제1 사용처는 당연히 자식이다. 그런데 그 자식의 숫자도 많아야 한둘이다. 그러다 보니 자식 하나에 쓸 돈이 상당히 많아졌다. 부모 욕심만큼 쓸 돈은 아니지만,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증가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다 보니 과용의 사례, 잘못된 부모교육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6.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잘못된 조언들 

 

(1) “얘야, 회사 다니기 싫으면 다니지 말아라. 우리가 벌어 놓은 것 쓰면서 살아라.”

 

한심한 부모의 첫 번째 조언이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유산상속 ①금액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상속된 재산 ②유지의 문제다.

 

우리나라 부모들 재산의 대부분은 부동산이다. 벌써 나타나기 시작하였지만, 미래 부동산 가격이 지금처럼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선 인구가 줄고 있다. 게다가 국가 경제가 세계 10위로 커지면서 과거와 같은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대할 수 없다. 가구당 출산율은 0.78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낮고, 경제성장률도 과거 3~5% 성장에서 이제는 2% 턱걸이도 힘들다. 아마 1%의 상위구간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만큼 심하지는 않아도 미래 부동산 가격은 노른자위 땅을 제외하고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 지금 가격보다 현저하게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문제는 세금 문제다. 부동산을 매각하면 6~38%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 더욱이 자식에게 증여하면 다시 10~40% 증여세를 내야 한다. 하락한 부동산 가격에서 두 번의 세금을 내고 나면 자식에게 넘겨줄 재산은 현 시가의 1/3에서 많아야 절반일 가능성이 높다. 부모들이 감각적으로 기대하는 금액보다 훨씬 더 적은 금액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2) 재산의 상속과 상속된 재산을 자식들이『유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내가 보기에 세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속된 재산을 자식들이 증식 또는 유지시킬 수 있느냐의 문제다. 회사 생활도 견뎌내지 못한 자식들이 얼마나 경쟁력 있는 사람들일까? 더욱이 부모가 물려줄 재산을 가지고 자식들이 운영할 만한 사업도 그리 많지 않다. 제조업을 한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경쟁력이 낮은 자식들이 생각하는 사업은 기껏해야 서비스 산업, 카페, 애완동물상점, 음식점 등이 아닐까? 우리나라 가게 중 가장 수명이 짧은 가게가 카페다. 평균수명이 3~4개월이다. 이런 실패를 두세 번 겪고 나면 부모가 남겨 준 재산이 과연 얼마나 남아날까? 

 

“얘야, 회사 다니기 싫으면 다니지 말아라. 우리가 벌어 놓은 것 쓰면서 살아라.”는 조언이 얼마나 무책임한 조언인가를 너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주위에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탕진하는 수많은 사례가 바로 이런 경우다. ‘탕아의 귀환’은 성경책에만 있는 과거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이 훨씬 더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창성보다는 수성이 어렵고, 부자가 삼대 못 간다는 속담이 그래서 생기는 것이다.

 

(3) “왜 결혼하고, 힘들게 자식을 낳니?”

 

부모가 말하는 특히 어머니가 지식들에게 조언해서 안 될 조언 중 하나는 “결혼하지 말아라.”, “원하지 않으면 자식 가지지 않아도 좋다는 조언이다.” 일견 훌륭한 조언처럼 들릴지 모른다. 자식이 아직 젊을 때, 그리고 직장을 가지고 있을 때 이런 조언은 그럴듯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생을 긴 여정으로 볼 때, 그런 조언은 적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내가 관찰한 예를 하나 들겠다. 그 부부는 매우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급여만으로 볼 때 상위 10% 이내에 드는 높은 연봉을 받고 있었다. 두 사람의 급여를 합하면 더욱 많은 액수였다. 인생을 다양하게 즐기며 사는 행복한 분들이었다. 회식 등의 자리에서 자식 키우는 어려움이 화제가 되면 빙긋이 웃음(비소에 가까운)을 지었었다. 그러나 나이가 50이 넘어가자, 그분의 표정에는 쓸쓸함이 가득해지고, 빠른 속도로 늙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는 동료들의 회식 자리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분은 부인이라도 있었다. 결혼하지도 않고, 자식도 없이 홀로 사는 삶이 어떤 모습일까? 개나 고양이를 키우며 살아야 할까? 

 

우리 옛 속담에 “해도 후회하고, 안해도 후회한다면, 하고 후회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하였다. 내 친구들을 보면 사진첩에, 카톡방에 손주들 사진을 자랑스럽게 여기저기 올리는 얄미운(?) 친구들이 많다. 그렇게 손주들이 예쁘다고 한다. 손주들 돌보기가 너무 힘들다는 하소연은 어찌보면 『승자들의 여유』인지도 모른다.

 

(4) “힘들면 이혼해. 왜 힘들게 사니?”

 

무책임한 조언의 또 다른 예이다. 싫으면 이혼하면 된다. 요즈음은 이혼하여도 크게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어떤 이들은 ‘돌씽’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조차 있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좋은 말이 얼마나 지속될까? 젊고, 내가 벌 수 있을 때는 아마 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또한 남자 경우와 여자의 경우는 더욱 달라진다. 남자는 재혼하기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여자는 그렇지 않다. 사회적 눈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여자 본인 스스로가 무서워서다. 새로운 배우자가 전 배우자보다 더 나으라는 보장이 있을까? 수동적인 DNA 인자를 가지고 태어난 여성은 남자보다 훨씬 더 두려운 마음, 걱정되는 마음이 클 수밖에 없다. 이것은 주장의 문제가 아니라, 본능의 문제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새로운 배우자 만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즉 외로운 삶이 될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 간에 그리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뜻이다. 물론 이혼을 할 만한 사유가 있다. 내 생각에는 ‘도박’을 즐기는 사람, ‘지나치게 낭비벽’이 있는 사람, ‘지나치게 나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 정도라고 본다. 어느 정도의 흠집은 나도 있고, 너도 있고, 누구나 다 있다. “힘들면 이혼해. 왜 힘들게 사니?”라고 말하는 그 부모조차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수백 번 이혼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참고 견뎠기 때문에 지금의 삶이 존재하는 것이다. 

 

자식들의 인생에 중요한 일들을 너무 쉽게 조언하는 것은 부모로서의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 수도 있다. 내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내가 사랑하는 눈앞의 자식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속 썩을 일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속 썩을 일도 없고, 좋아할 일도 없는 삶은 외롭고 쓸쓸할 것이 너무 뻔하다.“힘들면 이혼해. 왜 힘들게 사니? 자식도 꼭 낳을 필요는 없어.”라는 부모의 철없는 조언이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길고 긴 쓸쓸함과 외로움으로 남겨질지 모른다. 


(5) “자식이 원하는데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마 이 문제가 자식 사랑으로 가득 찬 우리나라 부모들이 가장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부모는 정말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넘겨준 부모들의 문제는 자주 언론에 나왔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말하지 않고, 다른 것을 얘기하려고 한다. 

 

『자식이 원한다고 해서 그 내용의 합리성을 따지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자식을 위한 길인가?』의 문제다.

 

두 가지 것을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결혼한 자식을 재정적으로 지속적으로 도와주는 경우다. 어렵게 산 집의 월부금을 ‘일부’ 도와준다거나, 자식이 아플 때 병원비를 보조하거나, 손자손녀의 교육비 ‘일부’를 보조해 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집도 없이 월세로 사는 자식이 고급차, 외제차를 사는데 도움을 준다거나, 또는 자기 자식 키우기 힘들다고 자식을 낳지 않고, 그 대신 자식 키우는 것과 비슷한 돈이 든다는 애완견을 키우는 자식들을 도와주는 것, 사치품이나 고급 외제 핸드백을 상용으로 사는 자식들의 생활비를 대주는 것 등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 도움을 받는 자식들이 부모를 무엇으로 생각할까? 돈 창고? 아무 때나 달려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하수분 같은 존재? 그리고 그들은 마음속으로 ‘내가 마음대로 부모님 돈을 쓸 수 있을 때가 언제일까?’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너무 지나친 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모님들이 또는 내가 자식을 키우기가 더 쉬웠을까? 아니면 지금이 더 쉬울까? 그때가 지금보다 더 수입이 많았을까? 턱도 없는 얘기다. DNA가 가르치는 데로 무조건 자식을 돌봐 주는 것이 자식에게 잘해주는 것이라고 혼동하는 전형적인 사례가 바로 “자식이 원하는데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는 생각이라고 본다.


7. 그러면 해답이 무엇일까?

 

그것은 나도 잘 모른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질문에 속 시원하게 대답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원칙은 분명히 있다.

 

(1) 자식을 가능한‘독립적’일 수 있게 키우는 것이다. 

 

자식을 잘 살게 해주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의무다. 그러나 자력(自力)으로 잘 살 수 있게 키우는 것이 부모의 의무다.

 

우리는 너무 자주 “자식에게는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이 조언이 정답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 말의 뜻은 자력(自力)으로 살아갈 수 있게 가르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을까? 그렇게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렇지 않은 부모들이 곧잘 “결혼하지 말아라. 이혼해도 좋다. 자식 낳아 뭐하니? 애물단지다.”라는 등의 조언을 하는 경우다.

 

(2)“자식은 보고 배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가끔 TV 드라마를 보거나, 주위 사람들의 말에서 “시부모에게 효도할 필요 없다.”, “예의는 차려서 뭐하니? 예의가 밥 먹여 주니?”라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상당히 놀란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부모는 고생하는 자식(과연 고생인지는 모르겠지만)을 생각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자식은 “보고 자란다. 보고 배운다.”는 말이 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자란 자식은 내가 늙었을 때 나를 어떻게 대할까? 또한 나의 며느리가 또는 나의 사위가 그렇게 행동했을 때 나는 서운해 하지 않을까? “입장 바꿔 생각해 봐.”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생각해 보면 쉽게 답이 나올 것이다. 

 

‘내가 너를 열심히 키웠으니 너는 나에게만은 효도해야 한다.’ 그게 그렇게 될까? “자식은 보고 배운다.” 말이 뜻하는 바는, 말로 가르쳐서 되는 경우도 있지만, 부모가 행동하는 것을 보고 배우는 것이 더 많다는 뜻이다. 

 

귀찮으면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고 부모로부터 배운 자식이 그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것은 거의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내가 그렇게 가르쳤으면, 나의 며느리가 나의 사위가 그렇게 해도 나는 서운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게 가르친 부모가 막상 자기가 대상이 되었을 때 과연 그렇게 생각하고 참아낼지는 잘 모르겠다.

 

더욱이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속담이 있다. 집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밖에서는, 회사에서는 예의 바르게 행동할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당연히 진급에서도 누락될 가능성이 높다. 40, 50이 채 안 되어서 회사에서 잘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앞에서 언급한 카페나 음식점 운영밖에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건방진 자세로 자란 자식이 과연 손님들에게도 귀하게 친절하게 대할지는 모르겠다.

 

(3) 자식은 보수적으로 키워야 한다. 예의 바르게 키워야 한다.

 

누가 나에게 만약 “자식을 예의 바르게 키워야 합니까?” 또는 “예의가 밥 먹여 줍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곧바로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간단하게 설명할 것이다. “여러분이 사장입니다. 그런데 일 잘하고 예의 바른 사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옆에는 일도 잘 못하고 예의도 없는 직원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누구를 진급시키시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답입니다. 모든 직원들은 자기 부모에게 매우 소중한 자식들입니다. 그러나 소중한 자식들이 모여 있을 때는 그 누구도 특별히 소중하지 않습니다. 다만 일 잘하고, 예의 바르고, 협조적인 사람이 중요할 뿐입니다. 사회는 여러분의 가정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대통령과 국무장관, 후작 부인 그리고 아일랜드 대사를 길러낸 케네디가의 어머니 “로즈 케네디(Rose Kennedy)”의 자식 교육 철학을 소개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나는 자식들을 아주 보수적으로 키웠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가 자식을 보수적으로 키우면 그들은 얼마든지 필요에 따라 진보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자식을 진보적으로 키우면 그 자식들은 필요할 때 보수적인 태도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자식을 매우 어려운 처지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보수적’이라는 표현은 ‘전통적’인 교육 방법을 말한다.

 

다시 한번 전기한 지적을 반복하겠다.


“자식을 잘 살게 해주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의무다. 그러나 자력(自力)으로 잘 살 수 있게 키우는 것이 부모의 의무다.”de4c2228322b04cb49934789f8f66799_171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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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4년03월27일 11시00분
  • 최종수정 2024년03월27일 10시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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