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국 교수의 생활과 경제 이야기 <110> 내가 만나 손을 꼭 잡고 싶은 세명의 여자분들(박세리, 고소현, 이미자)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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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애틋하게 사랑하는 사람이야 당연하고, 멀리 떨어진 부모, 자식들도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나는 그런 감정과는 다르게, 나를 기쁘게 하고 감동을 준 사람들 세 명을 말하고 싶다. 여러분 대부분이 잘 아는 분들이다.
골프의 여왕 박세리와 이제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닌 바이올린의 신동 고소현, 그리고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씨다.
1. 내가 박세리 선수를 만나고 싶은 이유
나는 골프를 치지 않는다. 아니 약간은 쳤다. 그러나 워낙 천성이 게으른지라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안사람 말에 의하면 ‘숨쉬기 운동’ 이외에는 하는 운동이 없다고 한다. 그래도 건강은 괜찮은 편이다. 고혈압, 당뇨 등은 아직 나와는 거리가 멀다.
내가 박세리 선수를 좋아하고 만나고 싶은 이유는 그 어렵고 힘들었던 IMF 때문이다. IMF 당시 우리 국민 모두는 너무 힘들었다. 대기업도 힘들었고,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정말 온 정신이 아뜩했던 시절이다. 경제학을 공부한 나로서는 또 다른 죄책감까지 느꼈던 시절이다. 나라 경제가 엉망이 되니 왠지 죄스러운 느낌이 정말 많이 들었다. 1997년 1월 2일 산업은행 연찬회 자리에서 “금년 말 주가지수가 400~500대로 내려가고, 대출이 많은 기업들은 정말 힘든 시기가 될 것입니다.”라고 예언 아닌 예언을 하였지만, 그것은 나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매일매일 매스컴에서 어려운 기업들의 도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죄의식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들었었던 것은 솔직히 ‘이 난국을 어떻게, 언제쯤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옳은 방법이든 아니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나름대로 갖고 있었지만, IMF 시절에는 솔직히 어떤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틀린 지적은 아니었지만, IMF 당국의 권고는 그대로 따라 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그 처럼 어렵게 빌린 500억 달러를 우리나라에 투자한 미국기업들의 채무를 상환하는데 들어갈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우리나라는 빌려준 돈이 갚아야 할 돈보다 많은 순(純)채권국이기 때문에 경제위기로 갈 염려가 없다.”는 일부 경제관료들의 터무니 없는 말은 “저 사람들이 정말로 경제관료인가?” 싶은 생각마저 들게 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가이드 라인과 기업들의 노력 그리고 자랑스러운 우리 국민들의 ‘금 모으기 운동’과 같은 『합심』된 노력으로, 전 세계에 유래 없는 3년 반 만에 IMF 관리를 벗어 날 수 있었다. 당시 모은 금은 227톤으로 18억 달러 어치였고, 참가한 국민 수는 무려 351만명이었다고 한다(국가기록원). 당시 모인 금은 한국은행 보유 금보다 두배 가까이 되는 양이었다. 그리고 우리 나라는 IMF 졸업 후, IMF 전보다 오히려 두 단계나 높은 3대 신용평가기관의 평가를 받게 되었다.
나는 여러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개국의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은 건국의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은 구국의 대통령’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요즘 세태는 꼭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다. 정말로 만약에 정말로 우리가 IMF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지 못했다면, 우리나라가 지금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아마 ‘괌’ 비슷한 반(半) 신탁통치의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를 IMF 위기에 빠트린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고, 오히려 IMF에서 나라를 구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비판이 지금까지도 많은 것을 보면,‘조선시대의 당파싸움’이 아직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은 오히려 역적으로 몰려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고,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에는 공신목록(功臣目錄)에도 들지 못했었다. 합당하게 비판받지 못한 역사는 다시 반복되는가 보다.
하여튼 이 암담한 시기에 박세리 선수의 『발 벗고 물속에서 친 멋진 샷』은 나에게 “아! 그래, 우리나라도 되겠구나!” 라는 탄성이 저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아마 이 사진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샷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후 이 장면은 ‘상록수’ 배경음악과 함께 우리나라 뉴스 주요 장면에 반드시 나오는 사진이 되었다. 그리고 아마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남을 사진이 될 것이다.
만약 내가 박세리 선수를 만난다면,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그리고 내 이마에 그녀의 손을 부치면서 한참 동안을 있고 싶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마음속으로 말하면서….
<그림1> 아! 바로 이샷.
2. 내가 고소현 바이올리니스트를 만나고 싶은 이유
(1) 우리 민족의 역량은 도대체 어디까지가 한계인가?
박세리 선수 다음으로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바로 고소현 바이올리니스트다. 나는 성이 김씨다. 나의 어머니 성씨는 박씨다. 분명히 나는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순종(純種)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민족 역량의 한계를 잘 모르겠다. 도대체 이 민족 역량의 끝은 어디라는 말인가?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천재들이 많다. 잘난 사람들이 정말로 많다. 조선말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 조국으로 돌아가는 영국 기자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한다. “내가 본 민족 중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은 조선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뛰어난 민족인지를 모르고 있다. 언젠가 이들이 깨어나면 동양의 빛이 되리라.” 극히 최근에도 ‘더 타임스’ 기자가 귀국하면서도 아주 동일한 말을 하였다. “이 세상에서 미국, 일본, 중국을 가장 우습게 보는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들은 꼭 이들을 말할 때 미국놈, 일본놈, 중국놈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배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나는 그들의 능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대단한 민족이다.”
전 세계 IQ 제1의 나라, 세계 수학 경시대회에서 항상 1등 하는 나라, 가장 열심히 일하는 나라, 가장 열심히 노는 나라, 언제부터 자동차를 만들었다고 불과 40년 만에 세계 3, 4위 자동차 제조국가가 된 나라, 반도체라고는 옆에도 못 가본 나라가 반도체 제조 1, 2위를 다투는 나라, 엊그제까지만 해도 소총도 못 만들었던 나라가, 자주포, 탱크는 물론 초음속 전투기까지 만들어 세계 방산 수출 4, 5위가 된 나라…. 도대체 이 나라, 이 민족의 한계는 어디까지란 말인가?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유학 시절이었다. MBA 과정에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 고참 과장이 유학을 왔다. 80년대였으니 일본이 미국을 누르고 한참 기고만장했던 시절이다. 그 과장의 태도 또한 그랬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왔다고 하니, 정말 무시하는 표정이 가득했다. 나도 약간은 기가 죽었었다. 그러나 같이 몇 번 일을 해보니, 금방 “이 정도야? 아니 이 정도 능력이 미쓰비시에서 유능한 고참 과장의 실력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금방 들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이란’에서 유학 온 친구와 프로젝트를 하였었다. 그런데 어느 땐가, 그 친구가 갑자기 “나 이래도 테헤란대학 교수다.”라고 하였다. 아니 내가 묻기라도 했었나? 테헤란대학이라면 우리나라 서울대학에 해당된다. 거기 교수가 이 정도 실력이란 말인가? 나의 솔직한 당시 생각이었다.
앞 절에서 박세리 선수 얘기를 하였지만, 한때 미국 LPGA 10대 선수 중 4명이 우리나라 선수였다고 한다.
참으로 우리 민족은 알 수 없는 민족이다. 그 끝이 어디란 말인가!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2) 음악계에서 우리 민족의 역량
아! 여기서는 정말 할 말이 없다. 많아도 많아도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의 역량을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정명화, 경화, 명훈의 정트리오, 피겨의 여왕 김연아,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 한수진, 김수연, 신지아, 주미강, 김 봄소리, 어린 신동 김연아 그리고 오는 내가 말하고 싶은 고소현 등등등 등등... 등등 두 단어로는 정말 부족하다. 그리고 한결같이 예쁘기도 하다. 남성 연주자 그리고 다른 음악 분야까지 말하면 너무 많아 여기서 그치기로 하겠다.
내가 오늘 특별히 고소현 바이올리니스트를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2006년 생이니 2024년 지금 18세의 소녀티를 갓 벗어난 나이다. 그러나 얼굴은 아직도 소녀티가 가득하다. 하지만 고소현의 연주를 들으면 “영, 어른이다. 정말 어른이다.” 나의 『지극히 주관적』 관점에서 그녀 연주를 평가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2> 유치원 6세 때 고소현 양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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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2021년(15세) 고소현 양 모습 |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말을 강조한 이유는 별것 아니다. 내가 아마추어이기 때문이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틀릴 가능성이 커서, “잘못 말해도 용서해 주세요.”라는 뜻에서 미리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도 왕년에 바이올린을 조금 배웠었고, 클래식 음악을 50년 이상 들었으니 완전 맹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 핀커스 주커만은 고소현에 대해 "불가사의 같은 일"이라며 "이런 재능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소현이는 고전적인 영혼을 지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극찬하면서, "대한민국은 이런 재능을 가진 아이가 있다는 걸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분도 그녀를 극찬했으니 문외한인 내가 그녀가 명(名) 연주자라고 얘기해도 누가 탓할 것 같지는 않다.
내가 고소현 양을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와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녀는 연주 시에 거의 무표정하다.
그러나 감정이 없는 무표정이 아니라, 자기의 연주 소리를 듣고 분석하며 연주하는 그런 무표정이다. 그러니까 수술하는 의사들의 무표정과 비슷한 느낌이다. 아주 신중한 무표정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가끔은 자기 왼손 핑거링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짓는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고소현 양이 ‘내 왼 손가락들이 정말 잘 움직여 주고 있구나!’ 또는 “오, 이 부분은 내가 연주를 참 잘하는데!”라는 감탄의 미소가 아닐까? 라는 상상을 보았다. 혹시 만날 기회가 있으면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그녀는 거의 발 움직임이 없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어느 면에서는 살짝 중요하다. 어렸을 때 그녀의 연주를 보면 양발을 90도로 벌리고, 연주 중 내내 그 자세를 유지한다. 그만큼 땅을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는 인상이다. 자기감정의 이입보다는 그만큼 정확하고, 확실한 소리를 좋아한다고 나는 느껴졌다. “땅아. 움직이지 말아라. 나는 명확하고 정확한 음을 내고 싶어. 그러니 네가 움직이면 안 되잖아.” 그런 느낌이다.
두 번째는 그녀의 활 움직임이다.
어찌 활을 그렇게 크게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거의 성인 남자 바이올리니스트의 활 사용이다. 그래서 매우 힘찬 소리가 난다. 그러면서도 화려하고 또 매우 섬세하다. 그러나 정경화씨 과르네리에서 나오는 그런 힘찬 소리는 아니다. 그녀의 바이올린은 1700년도에 만든 ‘마테오 고프릴러’의 바이올린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두 악기의 차이를 구분할만 하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는 것만 느낄 뿐이다.
셋째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지만, 그녀의 음정은 매우 정확하다.
이 말은 음악을 자주 듣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의외일지 모르겠다. 왜냐면 세계적 연주자들의 음정이 틀릴리가 없기 때문이다. 맞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고소현의 음정은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잘못 판단 가능성이 있는 입장에서 느낄 때 모든 순간, 순간에 정확하다. 바이올린 E선의 가장 높은 음에서도 정확하고, 같은 지판(指板) 위치에서 살짝만 선을 눌러 한 옥타브 높은 음을 낼 때도 정확하며, 아주 높은 음에서 낮은 음으로 연속에서 주루루룩 내려오는 순간에도 정확하다. 그리고 매우 빠른 음정에서 두 손을 한꺼번에 눌러 화음을 낼 때도, 그리고 아주 빠른 연주에서 각각 음정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확하다.
이것은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기 때문에 잘못된 느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느껴진다. 아마 헤르츠로 분석하면 몇천 분과 1의 차이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아마 고소현 양도 그렇게 느끼면서, 그 때에 무표정한 표정이 살며시 미소 짓는 표정으로 바뀌는 것인지 모르겠다. 정확한 빠른 음이야 하이펫츠가 대가(大家)지만, 나는 고소현의 감정 섞인 빠른 정확도가 더 마음에 든다.
다음 연주를 들어보기 바란다.
https://youtu.be/QPJUTtxCyKU?si=UqBYjX9Ej1qSzaxj
그녀의 연주를 들으면 나는 송창식이 떠오른다.
만약 내가 고소현 양을 만날 기회가 있다면, 두 손을 가만히 잡고, 손가락을 살펴보며, 지그시 고소현의 얼굴을 쳐다보고 싶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꼭 대가가 되세요. 그리고 새로운 바이올린 소리를 만들어 보세요.”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고소현 양은 마음도 참 예쁘다. 장래의 꿈을 묻는 기자 질문에, “당연히 연주를 잘하는 연주자가 돼야지만, 동시에 겸손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마음이 따뜻해야 청중과 소통을 더 잘할 수 있다고 믿거든요.”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내가 만나본 외국 사람들 중에서 학문적으로나, 투자자로서 또는 고급 공무원으로서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매우 친절하였고, 지혜로웠으며,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필안트로피스트)들이었다. 역시 『마음이 가난해야 대가(大家)가 되는가 보다.』 나는 고소현 양이 지금의 따뜻한 마음이 끝까지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더욱 큰 대가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3. 내가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 선생을 만나고 싶은 이유
이미자씨는 내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녀만큼 우리 주위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국민적 감정을 함께한 가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페티 김’ 정도가 떠오른다. 하지만 두 분 모두 대가지만 결이 좀 다르다. 우리 민족의 애달픈 심정을 정서적으로 잘 펴낸 이는 역시 이미자 선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때는 일본 가요를 흉내 냈다고 비난 받았고, ‘동백 아가씨’가 금지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한다. 그때야 일본이 우리보다 더 가요가 발달했었기 때문이다. 문화는 높은데서 낮은데로 흐르는 것이 순리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나라 K-Pop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아이돌, 걸구룹, BTS, 세븐틴, TXT 등 많고도 많다. 2023년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은 가수 ‘톱10’에 K팝 그룹이 네 팀이나 포함되었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일본의 유명 보컬그룹이 우리말로 ‘아리랑’을 불러 국제 콩쿠르에서 1등을 했다고도 한다.
우리의 높은 문화의 수준이 이제는 역(逆)으로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고, 또 세계로 흘러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한한 우리 민족 역량의 발현(發現, 發顯)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자씨의 노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독보적 존재로 남으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5천년 우리 역사의 한(恨)을 너무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많은 글에서 우리 민족의 특징을 ‘빨리빨리’, ‘조급증’ 등으로 표현한다. 그 말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극히 최근에 생긴 버릇이다. 우리 민족 오천년 역사의 본질은 “한(恨)”이고, 우리 민족의 특성은 ‘은근과 끈기’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한 가수가 바로 이미자씨다.
‘동백 아가씨’의 한 많은 사연과 ‘섬마을 선생님’의 19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친 총각 선생님이 서울로 떠나는 것을 ‘애달파, 애달파’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오랜 감정이다. 흑산도 아가씨, 황포돛대, 기러기 아빠 등등
이미자 선생의 목소리는 매우 곱지만, 어찌 들으면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다. 우리나라 악기 중에 ‘태평소(太平簫)’라는 악기가 있다.
<그림 4> 우리 민속 악기 중 가장 높고, 크며 애잔한 소리를 내는 악기, 태평소
‘쇄납’, ‘날라리’, ‘호적’이라고도 불린다. 여러 이름이 있다는 것은 곧 그만큼 자주 사용되는 중요한 악기라는 뜻이다. 마치 명태가 쓰임새에 따라 명태, 북어, 생태, 동태, 백태, 황태, 코다리, 노가리, 무태어 등으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미자씨의 목소리는 마치 ‘곱게 정화시킨’ 태평소 소리와 같다. 고우면서도, 애잔하고, 끊일 듯 끊일 듯하면서도 계속 연장되는 것이 꼭 우리 민족의 감성과 너무 일치한다. 그런 면에서 이미자 선생의 목소리는 정말 귀한 목소리다.
나는 좀처럼 연주회장에 가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뭐, 방송으로 듣지.” 하며 무심히 지나가는 편이다. 그러나 내가 직접 찾아간 두 번의 연주회장은 조용필 씨와 이미자씨 콘서트다. 그리고 이미자씨 경우에는 두툼한 ‘이미자 전곡집 CD’도 샀다. 나로서는 정말 예외 중의 예외인 행동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다시는 이미자씨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우연히 이미자씨 딸인 정재은 양이 ‘동백 아가씨’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 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듣기에 충분했다. “아, 이미자씨의 목소리가 사라지지는 않겠구나.” 나만의 쓸데없는 생각인지 모르겠다.
내가 이미자씨를 만나면 그녀의 두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마음속으로 말하고 싶다. “수고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많은 고초를 겪으셨지만 그래서 우리가 그만큼 우리 정서에 맞는 이(李) 선생님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내어서는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하고 싶다. “목소리가 변하시기 전에 『동요(童謠)』를 한번 녹음해 주시면 어떨까요. 꼭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아마 그런 음반이 나온다면 두고두고 상당수 사람들에게 애장품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고운 목소리로, 그 고운 동요를 길이길이 들을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정말 오랜만에 한량(閑良)스러운 글을 써 보았다. 쓰고 나니 기분이 상당히 상쾌하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든다. 우리 민족의 한계는 어디일까? 얼마쯤이 우리 민족의 한계일까? 나는 짐작할 수 없을 것 같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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