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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은 당장 내려 와야 한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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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2월05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2월05일 17시40분

작성자

  • 김동률
  • 서강대학교 교수. 매체경영. 전 KDI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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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년 3월 4일 도쿠카와 막부시절 일어난 실화다. 지금은 효고(兵庫) 현인 옛 아카호의 번주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47명에 달하는 그의 가신들이 2년 동안 절치부심한 끝에 주군의 원수를 갚은 뒤, 눈 내리는 날 주군의 무덤가에서 전원 할복한다. 한국의 춘향전에 곧잘 비견되는 일본의 대표적인 국민문학 <주신구라(忠臣藏)>의 실제 모델이다. <주신구라>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기는 광적이다. 지금까지 이 사건을 소재로 한 TV드라마, 가부키 등이 수천여 편이 제작, 상연되었다. 한마디로 <주신구라>라는 말만 들어가면 일본인들은 열광한다.

 

그러나 양국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유교사관 중에서 의리와 책임의 속성을 살펴보면 <춘향전>은 ‘문(文)을 통한 합법적인 과정’인데 반하여 <주신구라>는 ‘무(武)를 통한 폭력적인 과정’을 취함을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대개 행복한 결말을 추구하는데 반하여 일본의 경우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다. 하지만 “꽃은 벚꽃, 사람은 사무라이”라며 일본인들이 가장 명예롭게 생각하는 것이 주신구라다. 고이즈미 전 일본 총리는 취임직후 도쿄의 센가쿠지(泉岳寺)를 찾아 47인의 사무라이 이름을 하나하나 큰 소리로 부르며 분향했다. 사자의 심장(lion heart)을 가진 총리로 표현되던 그는 주군을 위해 할복 자진한 행위를 높이 평가하면서 주군의 무덤가에서 죽음을 택함으로써 오히려 전 일본인들의 가슴에 살아있게 됐다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뜬금없이 일본의 옛 이야기를 이 시점에서 끄집어 내는 것은 그들만의 독특한 전통을 흠모해 그런 것은 아니다. 나아가 오직 주군의 복수를 위해 생명을 내던진 사무라이들의 비정함을 감탄해 함도 더욱 아니다. 그네들의 의(義)라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대의명분도 있지만 사적인 복수행위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차 대전 직후 일본에 진주한 맥아더는「주신구라」가 지닌 지독한 복수정신에 충격을 받고 상연금지 조치까지 내렸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인간적인 의리마저도 비판하거나 평가절하하기에는 주신구라가 던지는 메시지가 여전히 강렬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아시아 유교 국가에서는 더욱 그렇다. 조직에 대한 충성과 조직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에 무게를 두는 유교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어쩌면 플라톤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어떠한 경우든, 유교 사상이 내재된 보통의 한국인들은 조직과 사람에 협조적이고 충성도가 높다

 

황교안 전 총리가 자유한국당 당대표 출마를 선언하고, 대한민국의 새로운 내일을 이야기하겠다고 한다. 황 전 총리는 페이스북에서 자신의 출마가 황교안 혼자만의 출마가 아닌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책임과 희생을 다한 국민과 함께하는 도전이라고 밝혔다. 병역면제에다 총리까지 지낸 그가 가난한 고물상집 아들 운운하며 보수세력과 함께 대한민국의 새로운 내일을 만들어 가겠다고 했다. 

 

나는 이 뉴스를 접하며 내 귀를 의심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보수 세력의 궤멸에 상당 부분 책임있는 그가 보수정당의 대표를 탐하겠다는 염치없는 뉴스에 절망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의 상식밖의 도전은 전체 보수세력의 분열로 이어지게 된다. 신뢰와 의리, 책임이라는 단어가 사금파리 조각처럼 부서지고 있음을 우리는 황교안의 출마에서 보게 된다. 보수세력의 몰락에 깊은 사죄와 반성으로 칩거해야 할 당사자가 개선장군처럼 정치하겠다고 나서는 지금의 세태가 계속되는 한 한국의 건강한 보수는 망할 수밖에 없다. 한국보수의 비극이고 씁쓸한 현주소를 우리는 황을 통해 보게 된다. 그가 지금이라도 책임을 통감하고 한손에 주신구라를 들고 어느 한적한 강가로 낚시라도 가면 얼마나 좋을까. 황교안은 당장 내려와야 한다.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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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2월05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2월05일 17시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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