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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국의 문화전망대 <10> 한말 ‘애국계몽운동’의 맥을 이어 대한민국의 기틀 다진 인촌 … 추모 70주기 맞아 재평가 필요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5년02월26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5년02월24일 20시39분

작성자

  • 윤정국
  • K문화경영연구소 대표,공연예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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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씨에도 많은 인사가 모인 인촌 70주기 추모식 

지난 2월 18일은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1891~1955) 선생이 서거한 지 70주기를 맞는 날이었다. 언론, 교육, 경제,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목을 기리기 위해 이날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경기도 남양주시 그의 묘소에는 각계 인사 200여 명이 모여 추모식을 가졌다. 최맹호 동우회장의 인촌 약력 보고에 이어 이진강 인촌기념회 이사장과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가 추모사를 낭독해 오늘날 대한민국 번영의 기초를 다진 고인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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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감시의 눈길 피해 은밀하게 벌인 독립운동 

일제강점기 우리 지도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해외로 나가 무장투쟁을 하거나 미국 상해 등지에서 외교 운동을 펴기도 했다. 그중에서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은 국내에서 일제의 압제를 겪으면서 감시를 피해 은밀하게 벌이는 독립운동이었을 것이다. 인촌은 국내에서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지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언론과 교육, 경제를 통해 자주적 역량을 길러야 한다’는 사상을 실천했던 선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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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학교, 보성전문 등 ‘교육 입국’ 사업 우선 손대 … 중앙학교는 3·1운동 발상지  

인촌이 일본 와세다대 유학 이후 귀국해서 우선 한 일은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해 ‘교육 입국’에 나선 것이었다. 이때 그는 25세의 젊은 청년이었다. 인촌은 민족이념이 투철하고 덕망이 높은 인사들을 교사로 초빙해 학교의 건학이념을 세웠다. 송진우(宋鎭禹)·현상윤(玄相允)·최두선(崔斗善) 등 유능하고 덕망 높은 인사들을 영입했고, 교장에 유근(柳瑾), 학감에 안재홍(安在鴻)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은 평교사로 영어와 경제를 강의하기도 했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인촌이 교주(校主)였던 중앙학교는 민족 항일운동의 발상지가 되었다.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윤이 3·1운동 48인에 포함되어 투옥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인촌은 1929년 말 해외 순방 여행길에 올라 1년 8개월 동안 영국과 유럽 등 서구 여러 나라의 선진 교육과 문물을 두루 시찰한 후 귀국해 1932년 자금난에 빠져 있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다. 오늘날 고려대의 첫걸음이었다. 인촌은 오늘의 대학 총장 격인 교장을 맡아 유능한 교수들이 상아탑 안에서 학문에 매진해 국가의 동량으로 성장할 인재를 양성하도록 성의껏 뒷받침했다. 

 

동아일보 창간, 경성방직 육성, 물산장려운동 추진 등…

다음으로 인촌이 매진한 부문은 언론사업이었다. 1920년에 창간한 동아일보는 일제의 탄압을 견디면서 삭제, 압수, 정간, 언론인 투옥 등의 가시밭길을 헤쳐왔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우승했던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지운 사건은 가장 상징적인 항일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일제는 마침내 1940년 동아일보에 폐간 조치를 취해 민족언론 말살을 기도했다. 인촌은 기업가로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1917년에 경성직유주식회사(京城織紐株式會社)를 인수해 2년 후 경성방직주식회사로 명칭을 바꾸면서 민족기업 육성에 기여했다. 1923년 우리가 만든 국산 제품을 애용하자는 ‘물산장려운동’도 인촌의 참여로 캠페인이 추진되었다. 1931~1934년 동아일보를 통해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해 문맹을 퇴치하고 농촌을 계몽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사업을 폈다. 

 

인촌의 독립운동은 한말 대한자강회 신민회 등의 ‘애국계몽운동’ 맥 이어

인촌은 이같이 일제강점기에 해외 무장투쟁과는 다른 방법으로 국내에서 민족역량을 기르는 사업에 헌신하면서 항일의 길을 걸었다. 교육·언론·문화운동의 장기적 사업을 추진해 독립을 쟁취하고 그 후의 국가건설에 대비하는 방안을 택한 것이다. 이 같은 인촌의 노선은 한말 대한제국기에 나타났던 대한자강회 신민회 등의 ‘애국계몽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애국계몽운동은 을사늑약(1905) 이후 무장투쟁 대신 교육 산업 언론 등을 통한 국권 회복과 민족의 실력양성을 목표로 한 운동이었다. 민족의 자강(自強)과 근대화를 통한 독립역량 강화라는 점에서 인촌은 이 애국계몽운동의 맥을 이었다. 엄혹한 시기에 어려움을 무릎 쓰고 독립국가 건설에 대비한 인촌의 교육·언론·문화 사업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와 보성전문, 중앙중학은 민족진영 인사들의 활동무대이자 은신처였다. 동아일보와 보성전문(고려대)을 거쳐 간 많은 인물이 광복 후 정치 경제 언론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중추적 역할을 했고, 그 후 민주화와 산업화의 일꾼이 되기도 했다. 

 

인촌의 빛나는 정신적 유산 ‘공선사후’ … 오늘날 정치인에게 경종 울려 

인촌이 남긴 이 같은 업적 못지않게 그가 평소 강조한 '공선사후(公先私後· 공적인 일을 먼저 하고 사적인 일은 나중에 한다)'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울림을 던지는 정신적 유산이다. 한말부터 일제강점기, 해방 후, 제1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 자체가 개인의 일신영달(一身榮達)보다는 ‘공선사후’로 일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4남 김상흠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체포돼 함흥형무소에 갇혔을 때 면회 한번 가보지 않았고, 광복 후 농지개혁을 단행할 때 자신과 가족이 소유하고 있던 수많은 농지를 대의를 위해 내놓은 일은 그중 한 부분일 것이다. 이 가르침은 오늘날 나라는 뒷전이고 개인의 이익과 정파의 이해관계를 우선하는 우리 정치인들에게 큰 경종을 울린다. 

 

작은 흠으로 큰 업적 묻을 수 없어 … 균형 잡힌 평가 필요 

인촌은 감시와 탄압이 심해진 식민지 말기 학교와 기업 경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총독부 당국과 타협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작은 흠을 끄집어내 부풀리고 비방하는 풍조는 안타까운 일이다. 작은 흠으로 그의 큰 업적 모두를 부정하는 일은 어리석다. 중국 현대사에서 등소평은 모택동 사후 그에 대해 ‘공 7, 과 3’으로 평가했다. 모의 공로를 70%, 과오를 30%로 평가하면서 혁명의 영웅으로서 그의 위상은 지키되 과오는 명확히 인정했다. 우리도 이를 참고해 인촌에 대해 균형 잡힌 평가를 내려야 한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전후, 그리고 제1공화국을 거치는 역사의 전환기에서도 미래를 내다보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틀을 꾸준히 닦아온 인촌을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일이 필요한 시기다. 이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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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25년02월24일 20시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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