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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續)여의도에는 왜? 정신병원이 없을까 <15> 장기표, 당신은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살았습니까 ②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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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4년10월01일 17시30분
  • 최종수정 2024년10월01일 17시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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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우리를 이끄는 지도자와 그 집단에 대해 야박해서 눈물이 날 정도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그들이 힘들어 울어야 국민이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건… 정책이나 전문가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사회지도층이 국민보다 힘들지 않고 편하게 살기 때문이다.> (졸저 ‘여의도에는 왜? 정신병원이 없을까’ 중)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점이 독립운동가, 국가 유공자, 6·25전쟁 참전 용사 등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 본인은 물론이고 자손들에 대한 예우가 참 많이 박하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광복 후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정부 요직과 사회 주요 자리에 친일 인사들이 곳곳에 들어갔고, 이런 인사들이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물며 후손들에 대한 예우야 말해 무엇 할까.

 

그런 면에서 나는 민주화운동을 한 분들에게 당연히 적절한, 아니 더 많은 명예와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이런 글을, 대상을 가리지 않고 쓸 수 있는 것도 엄혹했던 독재정권 시절에 자신의 안위를 도외시하고 ‘민주주의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 덕일 테니 말이다. 혹자는 그들을 ‘운동권 빨갱이’라고 불렀고, 또 실제 그런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것이 전체를 매도하거나 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2000년 김대중 정부 시절 제정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 후 20년이 지난 시점에 민주당 우원식 윤미향 의원 등에 의해 발의된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안’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표면적으로는 ‘이 법을 통해 민주주의의 숭고한 가치를 널리 알려 민주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려는 것’이라고 했지만, 왠지 이 법 뒤에 숨어 각종 혜택을 더 누리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의 대부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을 인터뷰 한 건 이 때문이었다. 다음은 당시 대화 중 일부다. 

 

나= “2000년 김대중 정부 때 제정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으로 상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는데, 선생님은 신청 자체를 안 하셨다고요?”

 

장기표 원장= “김문수 전 경기지사도 당시 민주화운동 보상을 거절하면서 ‘민주화운동을 한 덕에 국회의원 3번에 도지사까지 했는데 뭘 더 보상을 타 먹느냐’고 했는데…,그 사람 말이 맞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화운동 한 덕분에 내가 얼마나 많은 득을 봤습니까?”

 

나= “선생님은 덕을 본 게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장기표 원장= “아니에요. 내가 그 경력이 아니라면 이 사무실(신문명정책연구원)을 어떻게 유지하겠습니까. 말 난 김에…,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를 바라지 않은 대한민국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독재에 저항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 같은 사람도 그때 대학생이 아니고 농사를 짓거나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책임졌다면 아무리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잘못해도 데모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우리는 대학(그는 서울대 법대 출신이다)이라는 해방공간 안에 있었고, 또 함께할 친구들도 있었으니까 할 수 있었던 거죠. 우리는 정치의식이 높았고, 안 한 사람들은 낮아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민주화운동만이 국가 발전에 기여한 게 아니지요. 모든 분야에서, 모든 국민이 함께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보상을 스스로 요구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아…, 이런 말을 들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리고, 아직도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지려고 작은 공적을 부풀리는 것은 물론이고, 없는 공도 있는 것처럼 만들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이 즐비한 세상이다. 그런데 민주화운동 때문에 10년 가까이 감방에서 보내고, 또 10여 년을 수배 생활을 한 그가, 자신은 대학이라는 보호막 안에 있어서 할 수 있었던 것뿐이라고 할 줄이야. 더욱이 지금의 국가 발전은 민주화운동만으로 이룬 게 아니라 모든 국민이 모든 분야에서 함께 한 결과라고 공을 돌리다니….

 

1960년대 서울대 법대 출신이 자기 인생만 생각했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지 우리는 안다. 남보다 높아지고, 더 많이 가지려고 아등바등했다면 아마도 국회의원이나 장차관은 쉽게 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김영삼 김대중 정부는 물론이고 이명박 정부 때도 지역구, 비례대표 국회의원 공천과 장관직 제의를 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당시 한나라당 김문수 공천심사 위원장이 비례대표 최상위 순번을 제안했으나 이 또한 거절했다.

 

칠십 평생 살아온 그의 재산은 당시 4억1964만9000원이었다. (2020년 4월 총선 신고액) 기가 막혀 “생활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지금 25평 아파트에 사는데, 이 집을 주택연금에 가입해 월 95만 원을 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순간, 더 뭘 물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여기에 기초연금, 월남전 참전으로 정부와 서울시에서 나오는 돈 등이 그의 총수입이다. 다른 인터뷰에서 그는 모두 포함하면 약 월 250만 원 정도 된다고 말했다) <③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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