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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바캉스, 우리들의 바캉스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4년08월08일 12시30분
  • 최종수정 2024년08월08일 10시32분

작성자

  • 김동률
  • 서강대학교 교수. 매체경영. 전 KDI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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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는 너무 가난했다. 70년대는 너무 바빴다. 그래도 70년대 중반쯤 되자 여름철 휴가라는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낯선 바캉스란 말이 그렇게 근사할 수 없었다. 영어인 베케이션, 홀리데이도 아니고 왜 하필 불어인 바캉스였을까. 역사상 최초의 유급휴가가 프랑스에서 시작되면서 바캉스란 단어가 전 세계로 퍼졌고, 한국에도 영어보다 먼저 자리 잡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프랑스가 바캉스의 나라가 된 것도 100년이 채 안 된다. 1936년 노동자 총파업 끝에 나온 ‘마티뇽 협정’ 중 하나로 시작됐다. 이때 주 5일, 40시간 근무, 연간 2주의 유급휴가가 의무화됐다. 이후 기간이 계속 늘어났다. 68혁명을 통해 샤를 드 골 정부가 물러난 1969년 4주가 됐고, 1985년 미테랑 대통령 때 5주가 되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바캉스의 어원은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다. ‘비우다. 자유로워지다’란 뜻이다. 어원 그대로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도시와 일상을 텅 비우고 떠나는 게 프랑스인들의 바캉스다. 해마다 7월, 8월이 되면 파리 시민들은 모두 바캉스를 떠나고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 파리를 점령한다. 

개발도상국 한국의 바캉스는 전혀 달랐다. 바캉스라는 폼 나는 이름은 들여왔지만 한 달을 통으로 논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새벽별 보며 출근해서 밤하늘 별 보며 퇴근하던 이 땅의 가장들에겐 주말 낀 사나흘 휴가도 감지덕지였다. 아이들도 바빴다. 방학의 시작은 곧 보충수업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이른바 7말 8초,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의 1주일 남짓이 전 국민 공통의 바캉스 시즌이 되었다. 연중 제일 뜨거울 때 민족 대이동이 시작됐다.  

베이비붐 세대, 그 많은 이들이 숙제하듯 바캉스를 떠났다. 기차표와 고속버스 티켓 구하기부터가 전쟁이었다. 서울에서 해운대까지 고속버스는 열두시간이 걸렸다. 푹푹 찌는 기차 안에는 앉아서 가는 사람보다 서서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현지 바가지가 무서워 돗자리부터 버너와 코펠, 생쌀에 수박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피난 가듯 떠나는 피서였다. 천안 역 인근에 오면 호두과자 상인이 낮은 목소리로 “천안의 명물”을 되뇌며 지나다닌다. 대전 역에선 가락국수 호객꾼이 올라탄다. “가락국수 있습니다. 가락국수. 시간 충분합니다.” 등 뒤에 기차를 세워두고 급한 마음에 정신없이 넘기던 뜨끈한 멸치국물 맛을 잊을 수 없다. 슬슬 움직이는 차량에 허겁지겁 올라탄다. 열차 칸 연결 통로에 매달려 철로에서 나는 아릿한 쇠 냄새를 맡으며 후끈한 바람에 땀을 식힌다. 

해마다 한국관광공사가 한국 관광 트렌드를 발표하는데 올해의 키워드는 ‘R.O.U.T.E’라고 한다. R은 쉼이 있는 여행(Relax and empty your mind), O는 원 포인트 여행(One point travel), U는 나만의 명소 여행(Undiscovered Place), T는 스마트 기술 기반 여행(Travel Tech), E는 모두에게 열린 여행(Easy access for everyone)이다. 온전히 쉬는 것에 집중하는 여행, 개인적인 관심사를 추구하는 여행, 대중적이지 않은 관광지를 탐험하는 여행, 소셜 미디어와 AI 기술을 활용하는 여행, 반려동물 동반이나 나홀로 여행 등 정형화된 여행에서 벗어난 ‘개성 추구’가 다섯 개 키워드를 관통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베이비붐 세대 우리들의 7-80년대 바캉스는 이런 것들과는 정반대였다. 비우기는커녕 꽉꽉 채우는 바캉스였다. 쉬기는커녕 온통 분주했다. 영동 고속도로를 타면 오죽헌 보고 강릉 경포대에서 1박하고 또 속초로 올라가 설악산 권금성, 비선대, 흔들바위까지 봐야 뿌듯했다. 나만의 명소는커녕 해운대로 경포대로 우르르 몰려다녔다. 에어컨도 없이 내비게이션도 없이, 창문 열고 부채질하며 너덜너덜 지도책 하나 들고, 길을 잃으면 옆 차에 물어물어 다니던 여행길. 여름이 끝나면 하얗게 허물이 일어난 등과 목덜미가 치열했던 여름을 기억하는 훈장이었다.  

베이비붐 세대를 두고 전후세대라고도 한다.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베이비부머들은 전쟁으로 무너진 국가의 재건을 책임진 세대였다. 성공에의 갈망, 뜨거운 교육열은 생존을 위한 방어기제였다. 그 고단함이 그 시절 우리들의 바캉스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앞으로 서너 해가 더 지나면 베이비붐 세대 대부분이 은퇴하게 될 것이다. 빛바랜 사진 속 그때 그 분주했던 바캉스가 자꾸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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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4년08월08일 12시30분
  • 최종수정 2024년08월08일 10시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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