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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동의 문화시평 <31> 국립현대미술관의 진정한 권위와 한 원로작가의 자존심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4년04월01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4년04월01일 13시08분

작성자

  • 김찬동
  • 전시기획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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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김구림은 한국 실험미술의 1세대로 한국 전위예술의 아이콘이다. 기성 아카데미즘을 거부하며 대학을 자퇴한 후 평생을 실험적인 작업에 매진해 온 작가이다. 그의 작품에는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최초의 대지예술 <현상에서 흔적으로>, 미술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 음악, 패션 등 여러 분야의 실험적인 작가들과 함께 무체 사상을 기반으로 <제4 집단>을 결성하고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 등 거리 퍼포먼스를 벌이는 등 70년대 초반 이후 지속적으로 실험예술의 최전선을 달렸던 작가이다. 유수한 비엔날레들에 초대받았고 한국은 물론 영국의 테이트모던 등 해외 유수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국제적으로는 ‘한국의 멀티미디어 아트의 아버지’로 평가받으면서 다양한 해외미술관의 초대 전시에 참여해 왔다. 현재도 그가 참여한 《한국의 실험미술 1960-70년 전》이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거쳐 LA의 해머미술관에서 순회전이 열리고 있고, 지난 2월 말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린 바 있다. 

 

  그런데, 이 원로 작가가 이번 국현 회고전과 관련한 전시 도록 발간 문제로 미술관 측과 마찰을 빚으면서 급기야는 기자 간담회를 통해 조국을 떠나겠다는 충격적인 결심을 밝혔다. "이 나라에는 작가가 설 자리가 어느 곳에도 없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저는 곧 이 나라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라고 결연한 심경을 토로했다. 참으로 갑갑하고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다. 국가로부터 은관 문화훈장까지 받은 원로작가의 발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국현이 매년 원로작가를 초대하여 그의 작품세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기획전인 이번 전시는 준비 단계부터 미술관 측과 작가 사이에 불편한 관계가 감지되었다. 당초 개최키로 했던 시기보다 몇 년 연기되어 열렸음에도 전시를 코 앞에 두고 담당 큐레이터가 바뀌면서 전시 준비가 세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험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몇몇 작품은 미술관측으로부터 전시가 불허되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실험적인 작가의 회고전이 실험성을 상실한 채 엉성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아쉬운 전시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미술계의 중론이다.

 

노 작가의 불편한 심경의 직접적인 원인은 전시 도록 제작 과정에서 촉발되었다. 수록된 작품 도판들의 인쇄 상태가 원래 작품과 색이 현저히 달라 원작을 훼손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여러 차례 이에 대한 수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사실 도록은 작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미술관으로서도 전시의 성과를 기록하는 매우 중요한 결과물이다. 이것은 국내외 미술관이나 연구자들에게 작가의 작품세계는 물론 미술관의 역량을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작가들에게는 더욱 더 중요하고 예민한 사항이다. 작품의 도판이 원작과 다르게 수록된다면, 작품의 소장이나 전시, 연구 등 후속 관리에도 복잡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저작물의 동일성에 위해를 가하는 일이며 작가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큐레이터들에게 도록 제작은 마지막까지 매우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하는, 어쩌면 전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의 하나일 수 있다.

 

  기실 작가의 요청 사항을 수용하는 일은 미술관으로서는 그리 복잡하거나 큰 문제는 아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을 수정하고 재제작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술관 측은 작가가 최종 교정을 보고 승인한 사항이라 하고 작가는 협의한 적이 없다 하며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미술관 측은 작가에게 귀책 사유가 있어 재제작이 곤란하다는 입장인 것 같은데, 이는 초대 작가에 대한 예우도 아니며, 매우 무책임한 태도로 보인다. 미술관의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도록 발행자는 미술관장이며 최종 책임은 미술관 측에 있게 된다. 작가는 미술관의 전문성을 믿고 승인한 것이 아닐까? 미술관은 전문성을 생명으로 한다. 특히 국현은 우리나라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여있는 조직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의 작품을 소상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면, 미술관 측이 최대한 작품에 근접한 도판 상태를 확인하고 작가의 승인을 얻어야 했을 것이다. 설령 작가가 승인했다 하더라도 큐레이터가 보기에 내용에 차이가 있다면 작가에게 의견을 개진하여 바로잡았어야 한다. 도록 역시 미술관의 역량과 수준을 드러내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사안을 처리하는 과정도 너무 사무적이며 기계적으로 문제를 다루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전시 내용이라는 본질적 차원에서 유연하게 처리했어야 했다.

 

  오늘날 미술관은 고객을 위해 존재하는 서비스 조직으로 고객인 작가나 관객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 이번 사태는 단순히 도판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시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누적된 복합적인 작가의 불만으로 문제가 제기된 것이 아닐까? 문제 해결을 위해 관장을 만나고자 해도 만나주질 않고, 상급 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에 사안의 해결책을 호소해도 아무런 답변도 없는 모양이다. 사실 이 문제는 이렇게까지 확대될 문제가 아니다. 관장의 직권으로 폐기 처분하고 재제작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이다. 미술관이 작가와의 사소한 문제로 갈등을 드러낸다면 미술관의 권위나 문화적 위상에 손상을 입는 것은 자명하다. 

  작가는 자존심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자신의 작업에 대한 자부심이 그들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창작을 지속하게 한다. 평생을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 온 원로작가는 이번 문제로 크게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국제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작가에 대해서 이러한 정도라면 젊은 작가나 지명도가 약한 작가들에게는 어떠했을까? 미술관은 미술 제도의 정점이다. 특히 국립미술관의 경우는 한국미술을 대표하며 그 정체성을 대내외에 드러내도록 우수한 작품과 전시콘텐츠를 생산하고 작가를 직간접적으로 지원 육성하는 곳이기도 하다. 작가들이 의욕적으로 창작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창의적이며 포용적인 플랫폼을 제공하는 곳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새로운 미술 담론을 생산하기 위해 개방성을 가져야 하는 곳이다.

 

  K-아트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미술관마다 우리 작가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일에 적극 매진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미 국제적 지명도를 얻고 있는 작가들에 대해서는 더욱더 세심하게 그들의 예술세계를 치밀하게 프로모션해야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이번 원로작가 김구림 전에서 야기된 문제는 정책적 노력에 역행하는 처사가 아닐까? 어쩌면 미술관에 고착된 관료화된 조직문화의 일단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국가 기관으로서 국현의 조직문화에 내재한 관료주의적 태도의 발로라면 이는 원천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예전과 달리 자신들의 소임에 최선을 다하며 무한책임을 지는 태도를 기대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차별화된 전시와 그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기본적으로 작가와 작품을 존중하는 일은 미술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이기 때문이다.

 

  원로 작가가 이번 일로 인해 그가 평생 치열하게 구축해 온 한국실험 미술의 발자취를 접고 고국을 떠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것은 미술계 모두의 바람이다. 이유야 어쨌든 미술관은 한국미술계를 위한 자신들의 사명을 다시 생각하고 격조 있게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길 바란다. 갑자기 미술관 소장품의 위작 시비로 절필하고 고국을 떠났다가 쓸쓸히 작고한 천경자 화백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현은 작가들과 동행하는 진정한 격려자일 때 신뢰할 수 있는 권위와 자존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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