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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기의 시대정신(zeitgeist) <1> 과학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를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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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8월16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3년08월16일 12시32분

작성자

  • 김동기
  •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전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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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라울 뒤피(Raoul Dufy)가 핫하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과 여의도 더현대서울 두 곳에서 동시에 대형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그는 ‘기쁨의 화가’로 불린다. 밝고 따뜻한 색 덩어리들이 주인공이다. 색의 경계와 상관없이 날아갈 듯 가벼운 선으로 그려진 드로잉은 조연쯤 된다. 화가는 1, 2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시절을 살았지만 그림은 화사한 색채의 선율에 따라 춤을 춘다. 유독 아픔이 많은 2023년 여름 대한민국을 다독이는 눈부신 위로다.

 

뒤피의 대표작은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위해 제작된 ‘전기요정(La Fée Electricité)’이다. 서울에는 약 6m 크기로 축소된 석판화가 왔지만, 원화는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에 있다. 가로 60m, 세로 10m, 보는 이들을 압도할 만큼 거대하고 웅장한 벽화다. 와트, 에디슨, 벨, 퀴리 부인 등 110명의 인물과 함께 위대한 전기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신들과 성인들, 왕과 귀족들이 차지하던 인물화에 과학자가 등장한 것이다. 어둠이 물러난 자리, 찬란한 빛의 세상을 향한 화가의 예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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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과학을 의심했다. 지동설을 주장하다 종교 재판을 받은 갈릴레오 갈릴레이 외에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의심의 희생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끝내 우리의 삶을 이롭게 했고 우리는 과학을 믿고 사랑하게 되었다. 우리들 중 감각이 한 뼘 더 예민한 예술가들은 그 사랑을 작품으로 열렬히 표현했다.

 

신화와 종교만으로 충분했던 예술사에 인간과 과학이 등장한 건 14세기 르네상스부터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 자체로 과학자이자 기술자였다. 고대 로마의 인체 비례론을 연구하던 그가 남긴 ‘비트루비우스적 인간(The Vitruvian Man)’은 중세의 두터운 암막을 걷고 무대 위에 굳건히 선 인간을 위한 위풍당당한 서곡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로 넘어오면 렘브란트의 유화 ‘튈프 박사의 해부학 수업(The Anatomy Lesson of Dr. Nicolaes Tulp)’이 보인다. 17세기는 과학의 시대였다. 요하네스 케플러, 아이작 뉴턴과 함께 수학과 천문학, 물리학 등에서 놀라운 발견들이 이어졌다. 의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시대를 주시하던 화가에게 스며들어 플랑드르 바로크 회화의 걸작을 만들었다.

 

과학의 발전을 부지런히 뒤따르던 예술가들은 언젠가부터 과학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ChatGPT 이후 산업 전반에 걸쳐 가장 뜨거운 화두로 떠오른 생성형, 대화형 인공지능은 사실 영화계에선 흘러간 아이템이다. ‘블레이드 러너’의 릭 데커드는 1993년, ‘스타워즈’의 R2D2는 1977년에 이미 우리 곁에 왔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HAL9000은 무려 1968년생이다.

 

이제 과학이 동전만한 떡밥을 던지면 그걸 문 예술가들이 거대한 꿈의 세계를 낳는 단계에 와있다. 블랙홀과 웜홀, 멀티버스와 양자역학마저 식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2023년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노래’는 가수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이다. 블랙홀의 경계면을 일컫는 물리학 용어가 카페와 거리에 넘실거렸다.

 

한동안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군 초전도체(superconductor)도 2009년 영화 아바타 1편에서 먼저 만났다. 상온 초전도체 관련 주식이 들썩인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나는 우리은하 너머 판도라 행성에 둥둥 떠다니는 바위산들을 상상하며 실없이 설레곤 했다.

 

예술가들을 통해 바라본 과학 이야기가 이쯤에서 끝났으면 참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화학의 발전은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가스실을 만들었고, 물리학의 발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이란 녀석을 만들어냈다는 걸.

 

광복절에 맞춰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왔다. 영화는 3시간의 상영시간 동안 귀를 때리는 폭발음과 신경을 긁는 쇳소리로 가득했지만 트리니티 실험의 핵구름이 피어오르는 약 2분여만큼은 숨 막힐 듯 고요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숨소리만 들렸다. 후폭풍은 뒤늦게 찾아왔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오펜하이머의 내면은 굉음과 함께 분열하며 폭발했고 그 연쇄반응(chain reaction)은 휴일 아침 팝콘을 씹으며 극장에 앉은 몇백 명의 심장을 두드렸다.

 

1945년 8월 두 차례의 원자폭탄 투하는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전쟁을 끝냈고 우리의 해방을 앞당겼다. 섬광화상과 열폭풍과 피폭으로 초기 4개월 동안에만 약 15만명에서 24만명에 이르는 평범한 일본 주민들이 사망했다는 사실은 외면하고픈 진실이다.

 

오펜하이머가 내뱉은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이 귓가에 계속 울린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이제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과학을 향한 예술가들의 시선은 사실 우리 모두의 시선이다. 예술가들은 늘 시대의 정신을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조금 더 간절한 목소리로 우리 대신 소리쳤으니까. 우리는 과학을 숭배했고 의지했고 때론 의심했지만 자주 믿었고 수시로 배신당했다. 필립 K. 딕(Philip K. Dick)의 소설 제목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를 살짝 비틀어 묻고 싶다. 우리 인간은 어떤 과학의 꿈을 꾸는가.

 

부디 과학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만 했으면 좋겠다. 라울 뒤피의 ‘전기요정’처럼 기쁨과 환희로 우리 시대의 과학과 함께 살아갔으면 좋겠다. 사실 모든 과학은 그렇게 태어났다. 자꾸만 경로를 이탈하는 건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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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기는 누구?

 필자(김동기)는 1991년 KBS 공채 18기 프로듀서(PD)로 입사하여 '조영남쇼', '체험 삶의 현장', 'TV는 사랑을 싣고' 등을 연출하였고, KBS 사내기업 대표로 '특별기획 10부작 대한민국 록 페스티벌', '예술 기획 다큐멘터리' 등 다수 프로그램을 기획, 연출한 방송인 출신으로 지금은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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