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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전쟁 부른 쌀 산업, 지속가능한 미래의 선택은? <6> 우리 쌀의 정치경제 77년사 (1945-2023) (下)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5월30일 12시00분
  • 최종수정 2023년05월30일 11시48분

작성자

  • 최양부
  • 전 대통령 농림해양수석비서관

메타정보

  • 1

본문

<UR 협상과 쌀 산업 경쟁력 강화시대 28년 (1990-2018)>

 

UR 농업협상과 ‘쌀 관세화 유예’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의 전신인 GATT(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가 마지막으로 추진한 제7차 다자간 무역 협상인 우루과이라운드(Uruguay Round, UR)는 1986년 9월 15~20일 간 남미 우루과이의 휴양지 푼타 델 에스테에 모인 74개국 대표들이 ‘각료선언문’을 채택하면서 1993년 12월 15일 UR 무역 협상을 타결지을 때까지 7년여간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UR 협상은 1947년 10월 GATT 체제 출범 이후 40여 년간 GATT 체제 밖에서 예외취급을 받아 온 농림수산물무역을 GATT 체제 내로 편입 (Bring Agriculture into the GATT!)하는 것을 목표로 야심 찬 출발을 했다. UR 협상은 7년여 간의 난항 끝에 1993년 12월 15일 세계 최초의 ‘세계농업규범’을 채택하고, 1994년 4월 모로코 마라케쉬에서 WTO 창설을 선언하면서 GATT 시대를 마감하고 1995년부터 새로운 WTO 시대를 열었다.1)

  

  UR 농업협상은 1987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협상을 위한 ‘기본 틀(farmework)’ 마련을 위해 미국, EC, 케언즈(호주, 등 14개국), 일본, 한국 등의 제안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졌으나 합의에 이르기까지는 5년여 간의 협상이 필요했다. GATT는 1990년 12월 3~7일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각료회의를 개최하고 협상을 마무리 짓는다는 일정을 발표했다.

 

  1990년 6월 27일 농업협상위원회 드쥬 (Aart de Zeeuw) 의장은 자신의 직권으로 UR 농업협정문 초안(Chairman’s Draft Text)을 작성 GATT 사무국에 제출했고 사무국은 이를 7월 9일부터 미국 휴스턴에서 열리는 G7 선진국 정상회의에 제출하면서 회원국에도 공개했다. 정상회의는 논란 끝에 드쥬 의장 초안을 ‘협상의 기초’가 아니라 ‘협상을 촉진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데 합의했다. 의장 초안의 핵심사항을 간추리면 다음 <그림>과 같다.2) 1048c9404a0bfcf47b85b0bbfe079777_1685411

 1990년 7월 초 국내언론들은 일제히 ‘드쥬 의장 초안’을 대서특필했다. 그리고 UR 농업협상이 드쥬 의장 초안대로 타결되면 우리나라는 ‘쌀을 포함한 모든 농산물의 예외 없는 시장개방(’관세화‘)과 쌀 수매 등 정부가 지원하는 가격지지 보조금을 감축해야 한다’라고 보도했다. 이 소식을 처음 접한 농민들은 우루과이라운드라는 말이 ‘우르르 쾅쾅,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는 소리’ 같았다고 했다. 농민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이때 ‘UR(농업)협상≡쌀 시장개방’이란 등식이 만들어졌다. 농민들의 UR 농업협상 반대 시위가 정국을 강타하면서 ‘UR 사태’가 발생했다. 

 

  브뤼셀 각료회의를 앞두고 정부는 10월 29일 이행계획서(C/L, O/L)를 GATT에 제출하면서 개도국 우대원칙과 비교역적 관심 사항을 반영 쌀을 비롯한 15개 품목을 관세화 예외품목으로 지정했다. 나는 10월 중순 브뤼셀 각료회의를 위한 사전준비를 위하여  농림부 장관 자문관 (UR협상 담당)으로 위촉되어 제네바로 파견되었다.3)

 

  1990년 11월 제네바에 있는 GATT 본부를 항의 방문한 한국농민단체 대표단 가운데 이경해 한국농민후계자중앙연합회 회장이 GATT 현관에서 갑자기 UR 농업협상 반대를 외치며 할복자살을 시도했다. GATT 경비요원들의 도움으로 신속한 처리가 이루어져 생명에 지장은 없었으나 이 회장 사건은 한국 농민의 절박한 마음을 세계에 알렸다. 

 

  UR 농업협상과 쌀 시장개방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함성 속에 1990년 12월 3~7일간 일정으로 브뤼셀 각료회의가 열렸다. 농업협상 대표로 조경식 농림부 장관이 참석했다. 4) 

 교착 상태에 빠진 협상의 돌파구 마련을 위해 UR 농업협상위원회 Helstrom 의장이 ‘중재안(Non-Paper)’을 마련 각국 대표에게 수용/거부 의사를 물었다. 조경식 장관은 의장 중재안이 수출국 위주로 작성되어 균형을 잃고 있다고 지적하고 강한 어조로 수용 불가 입장을 밝혔다. (“We cannot accept this non-paper as a basis for the successful conclusion of the Urguay Round of Agricultural Negotiation.”) 조 장관의 용기있는 발언은 미국 측으로부터 UR 협상을 결렬로 이끌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한국 농업은 개도국 수준에 있다는 사실과 <쌀 관세화>의 어려움을 세계에 알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후 GATT는 1991년 UR 농업협상 체제를 재정비하고 던켈 GATT 사무총장 주재로 드쥬 의장 초안을 전면 재검토 ‘던켈 초안’을 새로 작성했다. 1992년부터는 UR 협상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미국-EC 등 개별 국가 간 현안 해결을 위한 협상이 전개되었다. 

  국내의 UR 농업협상 반대, 쌀시장개방 반대를 외치는 농민들의 시위는 더욱 거세졌다. 1991년 11월 11일 농협은 UR 농업협상 ‘쌀 수입개방반대 백만인 서명운동 전진 대회’를 개최하고 서명운동에 착수했다. 12월 22일까지 42일간 총 13,078,935명의 국민이 서명을 했다. 서명자 만 명씩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총 1,308권의 서명 철을 만들어 GATT에 제출 한국의 쌀 시장 개방의 어려움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이는 ‘최단시일 최다서명’으로 인정받아 1992년 6월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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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1∼12월 농협이 펼친 ‘쌀 수입개방 반대 범국민 서명운동’의 명부가 서울 중구 농협중앙회 농업박물관 한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1만명 서명부를 책 한권으로 엮어 모두 1308권에 달한다. 이희철 기자 photolee@nongmin.com,  [사료로 보는 농협 60년] ‘신토불이’ 이끌고 ‘쌀 개방반대 서명운동’ 펼치고 (nongmin.com), 농민신문, 2021.6.25.>​photolee@nongmin.com, [사료로 보는 농협 60] ‘신토불이이끌고 쌀 개방반대 서명운동펼치고 (nongmin.com), 농민신문, 2021.6.25.>

 

  1993년 7월 1일 새로 취임한 서덜랜드 GATT 사무총장은 1993년 12월 15일까지 협상 시한을 제시하고 협상 타결을 위한 각국 대표들의 정치적 결단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미국-EC가 협상을 재개하고 일본과 한국의 쌀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이 본격화되었다.5)  

 마침내 미국과 일본은 물밑교섭을 통해 1993년 10월 쌀 관세화 협상을 타결지었다. 쌀의 관세화를 6년간 유예하는 대신 최소시장접근물량(Minimum Market Access, MMA)인 의무수입물량을 유예기간 동안 4~8%로 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로써 UR 협상의 마지막 남은 협상 과제는 한국의 쌀 관세화 문제가 되었다. 

 

  1992년 12월 대통령선거 당시 김영삼, 김대중 후보 등은 앞다투어 쌀시장개방 반대를 외쳤다. 김영삼 후보는 “대통령직을 걸고서라도 쌀 시장개방만은 막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모든 농산물의 예외 없는 관세화에 의한 시장개방은 UR 협상 자체를 거부하기 전에는 피할 수 없는 UR 농업협상의 대원칙이었다. 

  1993년 12월 1~15일간으로 정해진 UR 마지막 협상을 위한 정부의 입장을 정하기 위해 농림부 장관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들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관세화 원칙에 따른 시장개방을 수용하는 대신 개도국 지위를 확보하여 쌀 관세화 시기를 10년간 유예하고 최소수입의무량을 3~5% 수준에서 타결짓겠다는 쌀 시장개방 협상 전략을 보고하고 재가받았다. 이는 일본 협상타결안보다 약간 개선된 안이었다. 그동안 주장해온 ‘관세화 예외’ 목표가 ‘관세화 유예’로 바뀌었다. 

 

  그러나 황인성 국무총리로부터 새로운 협상 을6) 보고 받은 김영삼 대통령은 앞서 재가한 훈령을 취소하고 정부 대표단에게 새로운 협상 전략을 지시했다. 정부대표단이 미국대표단과 협상하는 가운데 12월 7일 김영삼 대통령은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하고 ‘재임 중 쌀 한 톨도 수입하지 않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5년간 쌀 수입을 0%로 하는 완전 유예(Moratorium)’를 요청하였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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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미국 측은 0%는 UR의 기본원칙을 훼손하는 것이므로 처음 5년간을 1~2% 로 하는 파격적인 안을 제시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전화 협상 결과 최종적으로 우리나라는 농업 개도국으로서 쌀 관세화 원칙을 수용하는 대신 실시 시기는 10년간 유예하고 동기간 중 의무수입량을 처음 5년간은 1~2%, 나머지 5년간은 2~4%로 하는 안에 12월 13일 미국 측과 최종합의했다. 이에 앞서 12월 9일 김영삼 대통령은 쌀 시장개방을 막겠다는 자신의 공약을 지키기 못한 것에 대해 ‘고립을 택할 것인가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의 고뇌에 찬 대국민 사과 담화를 발표했다. 8) 이날 김 대통령의 사과 담화는 TV로 전 세계로 생중계되었다. 9) 

  그리고 12월 14일 한국의 쌀 시장개방 최종안이 GATT 회원국에 배포되었고 GATT 회원국들은 이를 승인했다. 서덜랜드 사무총장 등 각국의 협상 대표들은 한국이 ‘최적의 협상(Big Deal)’을 했다고 축하했다. 

  1993년 12월 GATT UR 농업협상에서 한국이 추진한 쌀시장개방 협상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합의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합의된 것이 없다 (Nothing is agreed until everything is agreed)”는 ‘협상의 황금률’에 따른 ‘협상의 정석(定石)’을 보여준, 그리고 국익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과 협상 실무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이루어낸 교과서와 같은, 협상으로  길이길이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94년 12월 16일 국회는 ‘세계무역기구협정 비준 동의안’을 승인하고 ‘세계무역기구 협정의 이행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WTO가 허용하는 농림수산업 생산자를 지원하기 위한 각종 ‘직접 지불제 (예를 들면 ① 생산통제를 목적으로 하는 직접지불, ② 영새농을 위한 보조, ③토양 등 환경보전을 위한 유기농에 대한 보조, ④ 농림수산 재해 지원, ⑤ 생산과 연계되지 않은 소득 지원 등)’ 도입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김영삼 정부와 UR 이후 쌀 산업 경쟁력강화 대책 추진 

1048c9404a0bfcf47b85b0bbfe079777_1685412  1993년 12월 15일 UR 농업협상 타결로 우리 농림수산업은 글로벌 개방시대의 무한경쟁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 농림수산업에는 전화위복의 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농림수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는 초미의 과제가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쌀은 관세화 예외기간 10년 동안 획기적인 경쟁력 강화기반을 구축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비록 유예기간을 갖게 되었지만 쌀 시장개방을 지키겠다는 국민과 농민과의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 진실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어려움에 처한 농어민을 구하고 농어업과 농산어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김 대통령은 그의 그러한 각오와 결의를 담아 1994년 신년 ‘경세제농(經世濟農)’이란 휘호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는 UR 협상으로 흐트러진 국가 분위기를 일신하고 UR 이후 변화와 개혁의 신농정 추진을 위해 다음과 같은 파격적인 조치들을 취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 농수산수석비서관’을 설치하고(1993.12)10) ‘농어촌특별세(농특세)’를 신설하였으며(1994.3), 대통령 자문기관으로 ‘농어촌발전위원회(1994.2.1.~7.31)’ 설치하여 농어민단체를 비롯한 국내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UR 이후 김영삼 정부가 추진해 나갈 ‘변화와 개혁의 신농정’의 정책목표와 과제들을 정리한 ‘농어촌발전대책 및 농정개혁추진방안(6.14 대책)’을 수립 발표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쌀산업경쟁력제고대책(1994.6)’과 ‘쌀산업발전종합대책(1996.6)’의 수립 추진 등 우리 쌀 산업의 국제경쟁력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6.14 대책의 핵심적인 정책과제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11) 

 

제1차 농정개혁 추진회의

‘농어촌발전대책 및 농정개혁추진방안’

1994.6.14.


○ 농어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10대 핵심시책

-농어업의 중추 역할을 담당할 15만 호의 전문적인 가족 단위의 농어가 육성-중·소농의 특색을 살린 영농(환경농업)을 발전시키고 농어촌지역에 다양한 2·3차산업을    유치하여 고용 기회를 확대-농업경영의 현대화를 위하여 농업회사법인 제도 도입-농지 제도를 과감히 개혁하여 경영혁신을 뒷받침-생산·유통·가공·판매의 계열화로 기존의 농수산업을 농어민이 주도하는 1·2·3산업의 복합    산업으로 탈바꿈-기계화·자동화 영농체제 구축을 위한 생산기반 완비와 지원제도 개선-기술집약적, 환경농업을 육성하기 위한 기술개발과 지원체계의 혁신-품질 위주의 농어업 경영촉진으로 경쟁 우위 확보 및 수출전략 품목으로 육성-경쟁력 있는 환경 보전형 축산업을 적극 육성-기르는 어업과 경제성 있는 산림자원조성

 

○ 제도개혁

-진흥지역 내의 농지소유상한 폐지 등의 농지 제도개혁-쌀값 계절진폭 허용으로 쌀의 민간유통기능 활성화 및 농가 실질소득 증대-물류센터 및 유통 자회사의 설치·운영 등 농수산유통개혁-중앙회의 경제사업과 신용사업을 분리하여 독립사업부제로 운영하는 등의 협동조합개편

 

○ 농어촌 생활 여건 개선과 후생 복지 증진

-농어촌에 2·3차 산업진흥-농어촌 생활 여건의 획기적 개선-농어촌 교육·의료개선 및 국민연금 실시

 

○ 투융자 지원 확대

-42조 원의 농어촌 투융자계획을 1998년까지 3년 앞당겨 조기 투자-국민성금적 성격의 ‘농어촌특별세’ 재원 15조 원은 2004년까지 경쟁력 제고와 농어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분야에 집중 투자​

 

 ‘6.14 대책’은 UR 이후 글로벌 개방시대의 무한경쟁을 헤쳐나가기 위해 ① 농림수산업의 경쟁력을 강화를 위한 구조개혁, ② 농림수산식품의 품질향상과 안정적 공급을 위한 유통개혁, 그리고 ③ 농림수산인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생활환경 및 후생 복지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하고 이상의 정책과제들을 추친하는 데 필요한 ④ 투융자 재원의 확보 및 지원강화, 그리고 ⑤ 농정추진방식을 민주화와 지방화 시대에 맞게 상향식 자율방식으로 전환하고 중앙과 지방정부의 농정추진조직과 기구 개편 및 각종 법률 제개정을 통한 제도 정비 등 5대 과제를 기본 축으로 하는 ‘변화와 개혁의 신농정’체제를 확립했다. 

 

김영삼 정부가 ‘6.14대책’의 기본 틀을 바탕으로 별도로 수립 추진한 ‘양정개혁(1993.8)’과 ‘쌀 산업 경쟁력 제고 대책’, 그리고 ‘쌀 산업발전 종합대책’의 핵심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쌀 산업발전을 위한 대책들은 관세화 유예기간 10년간( 1995-2004) 쌀 산업의 경쟁력기반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수립되었다. 김영삼 정부가 수립한 쌀 전업농육성을 근간으로 하는 경쟁력 강화정책은 지난 30년간 쌀 산업 발전정책의 기본 틀이 되었다.12)

 

 ① 쌀에 대한 인식의 전환: ‘쌀 농사’에서 경쟁하는 ‘쌀 산업’으로, ‘정치 재’에서 ‘경제 재’로 

  UR 농업협정을 통해 쌀은 국가적인, 정치적인 보호 대상 (‘정치재’)에서 국제경쟁을 해야 하는 하나의 시장상품(‘경제재’)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UR 협상은 쌀은 전통적인 농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지역 간, 국가 간에 경쟁하는 상품을 생산하는 치열하게 경쟁하는 산업으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전기가 되었다. 쌀은 과거의 1차산업으로서 농사/농업의 한계에서 벗어나 수확후 건조, 가공, 포장, 처리 (2차산업)와 저장, 유통, 판매, 무역 (3차산업) 등 1,2,3차산업이 계열화된 복합산업으로 인식하게 되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② 쌀 전업농가 및 법인 경영체 육성지원 강화 

   글로벌 경쟁시대의 1차적 경쟁 주체는 쌀 산업에 종사하는 쌀 생산농가이다. 이들이 경쟁력을 갖추고 시장경쟁에 나설 수 있도록 일정한 경영 규모와 선진화된 기술, 경영 능력을 가지고 쌀 생산에 종사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는 품목별/산업별 전문화된 전업농 육성사업으로 2004년까지 쌀 전업농(5~20ha, 경영주 55세이하) 6만 호 육성 목표를 세우고 이들의 농지규모 확대와 농작업기계화를 위한 구입 자금 등을 우선적으로 지원했다. 1997년까지 김영삼 정부는 63,378호 쌀 전업농가를 선정 집중적으로 지원했다. 쌀농업 기계화 촉진을 위하여 농기계 반값공급정책을 추진 농가부담을 경감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우리나라 농기계 산업의 발전을 촉진하는 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또한 농가 간의 협동 경영체(영농조합법인) 또는 기업 경영체(농업회사법인)와 같은 법인경영체 육성을 위해 1996년 농지법을 개정 이들의 농지 소유 (주식회사 제외)를 허용하고 ‘농기업경영자금’을 신설 이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다. 

  김영삼 정부의 이와같은 선별적이고 선택적인 지원을 통한 쌀 전업농과 법인경영체 육성에 대해 당시 야당은 ‘엘리트 농정’이라고 비판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우리 쌀 산업을 이끌고있는 중심주체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중소농가에 대해서는 자연농법, 오리농법, 혹은 유기농법 등의 환경친화적이고 생태적 농법을 도입 품질 차별화를 추진 현재와 같은 유기농 쌀 생산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③ 농업진흥지역내 논(74만ha) 항구적인 안전영농기반 구축 

  김영삼 정부는 1994년 12월 새로 제정된 농지법에 따라 농업진흥지역을 재정비 지정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농림지역을 보전농지인 농업진흥지역과 보전임지, 준농림지역은 농업진흥지역 밖의 농지와 준보전임지, 및 개간촉진지구로 구분하고 준농림지역에서의 농지전용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농업진흥지역은 농업진흥구역, 농업보호구역으로, 농업진흥지역 밖의 지역은 농업유지구역과 다목적 구역으로 구분하여 농지 보전과 이용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전면적으로 개편하였다. 

 

  쌀 산업의 경쟁력 강화의 기반은 논의 집단화와 규모화, 전천후 영농을 위한 수리 안전화를 위한 용⸱배수로 정비, 그리고 농기계 등의 원활한 출입을 위한 농작업로 정비 등 논 기반 정비와 항구적인 안전 영농을 위한 용수 대책의 확립이다. 이를 위해 김영삼 정부는 쌀 농업 생산기반 투자를 획기적으로 증대시키고 기반 정비를 완비했다. 

 

  쌀 농업의 대규모 기계화 기반 조성을 위해 평야부의 집단화된 논을 중심으로 필지 규모를 3,000평(1ha)이상으로 대형화하고 용배수로와 농작업로를 종합적으로 정비하는 대구획 경지재경리 사업(20만ha)을 전액 국고 부담으로 추진 쌀 농업생산기반을 획기적으로 혁신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농업진흥지역내의 논 74만ha의 경지정리를 완비하였다. 또한 항구적인 가뭄대책으로 ‘농업용수10개년계획(1995-2004)’을 수립 농업진흥지역의 수리시설을 완비했다.

 

④ ‘미곡종합처리장 (RPC)’ 건설 지원 

  쌀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수확후 산물 벼를 매입 건조, 저장, 가공, 포장, 유통, 판매에 이르는 계열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농협 등을 중심을 이러한 수확후 처리와 유통 판매를 담당할 ‘미곡종합처리장(Rice Processing Complex, RPC)’을 2004까지 400개소 설치를 추진했다. RPC는 미곡 유통, 저장, 판매의 핵심거점이 되었다. 

 

⑤ 미곡시장 개혁: 정부통제체제에서 민간자율경쟁체제로 전환 

  UR 이전까지 미곡시장은 정부의 시장개입으로 미곡 시장에서의 쌀 가격은 정부의 수매와 방출가격의 영향을 받아 자유로운 시장가격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었다. UR 이후 민간 생산 및 유통인들 간의 자유로운 시장거래에 의한 쌀의 생산과 유통 판매가 이루어지고 지역간 품질 경쟁 등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쌀시장 가격 통제를 중단하고 쌀 가격이 수확기와 단경기에 따라 자유롭게 변동하는 ‘쌀가격 계절 진폭제’허용이 중요했다. 그러나 물가 안정을 책임지고 있는 경제기획원은 쌀시장개입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1994년 6월경 마침내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으로 경제기획원 쌀시장개입 중단지시가 이루어지면서13) 계절 진폭제가 허용되고 쌀시장의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80kg 가마니로 거래되어온 관행을 깨고 다양한 소분 포장거래가 자유화되고 지역산지의 브랜드화가 허용되면서 지역 간 품질경쟁 등 쌀 시장경쟁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쌀 시장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정부의 수매 및 방출가격도 시장가격에 수렴하도록 하기 위해 정부 수매가격을 3년간 (94, 95, 97년산) 동결하고 소폭 인상(93, 96년산)  했음에도 시장가격 상승과 계절진폭의 확대로 농가의 쌀 판매수입은 오히려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야당은 정부의 쌀 수매가 동결조치를 ‘살농(殺農)정책’ 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으나14) 이는 시장경제의 작동원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정치적 선동일 뿐이었다. 

  미곡 수매는 농협이 자체 자금으로 정부수매가로 수매하고 수매가와 시가와의 차액은 정부가 농협에 보전하는 ‘차액지급 수매제도’로 전환하고, 농협을 통하여 예시된 가격으로 농가와 농협이 출하약정을 체결하고 약정농가에 40%의 선도금을 지급하는 ‘출하약정수매제도’를 도입하였다. 또한 정부미 방출시 정부의 정곡 정가 직접방출을 ‘조곡시가방출’로 전환하였다. 15) 이를 위해 1994년 1월 ‘양곡관리법’을 전면 개정하였다. 

 

⑥ 규모화 촉진 직접지불제도 도입 

   1997년부터 시행에 들어간 ‘규모화 촉진 직접지불제도’는 UR 농업협정이 허용하는 농가에 대한 소득지원정책으로 65세 이상으로 3년이상 벼를 경작한 농가를 대상으로 자신이 소유한 농지를 농어촌공사 또는 쌀 전업농가나 법인경영체 등에 판매 또는 5년이상 장기임대할 경우 ha당 일정금을 지불하는 제도로 쌀 전업농가의 농지규모확대를 촉진하는 농지 유동화 사업이다. 1997년부터 2004년까지 1995년도 기준 65세이상 고령농가 30만호가 소유하고 있는 농지 17만 ha의 80%수준인 13,7만ha를 유동화시킨다는 목표를 수립 추진했다. 


⑦ 대북 인도적 쌀 지원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이후 북한이 겪고 있는 식량난 해소를 위해 순수한 동포애 차원에서 대북 쌀 지원 의사를 밝혔다. 1995년 6월 13일부터 남북 대표 간 협의가 시작되어 1차로 15만 톤을 지원하되 1단계로 1만톤, 2단계 4만톤, 3단계 10만톤으로 나누어 보내기로 합의했다. 1965년 6월 25일 1만 톤을 보낸 후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10월 9일까지 15만 톤을 북한 측에 보냈다. 1996년 이후부터는 직접 지원보다는 국제식량구호단체를 통한 간접지원을 하고 있다. 

 

2005년의 양정개혁: 쌀소득 직불제와 공공비축제 도입   

 

  1993년 12월 15일 UR 농업협상 타결 당시 우리는 쌀 관세화 실시 시기를 2004년까지 10년간 유예를 받았다. 2004년이 되는 해 우리는 관셰화 유예를 계속할지 아니면 중단하고 관세화할지에 대해 WTO의 이해 당사국들과 협의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농민단체들의 다수 의견은 관세화 실시 시기를 2014년까지 10년 추가 연장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WTO 협정에 따라 쌀 생산농가 지원을 위한 정부보조금 총액의 감소로 추곡수매제의 실익에 대한 논난이 일어나면서 이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제기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2004년 쌀 관세화를 10년 추가로 연장하는 재협상을 마쳤으나 쌀 의무수입량을 증가시켜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새로운 대안으로 추곡수매제와 국회동의제를 폐지하고 WTO가 허용하는 새로운 ‘공공비축제’와 쌀 소득보전 직불제 도입이 거론되었다. 

 

   2005년 3월 “정부관리양곡의 수급계획과 정부매입양곡의 매입량 및 매입가격 결정에 대한 국회동의제를 폐지하여 정부의 가격지지에 의한 국내 쌀시장의 왜곡을 방지하고 시장기능을 회복시킴으로써 국내쌀의 수급이 안정되고 경쟁력이 향상되도록하고, 비상시를 대비한 국민식량의 안정적 확보를 위하여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상 보조금 감축의무가 면제되는 미곡의 공공비축제를 도입하고, 공공비축미곡의 매입·판매가격은 세계무역기구(WTO)협정에 따른 국내보조 감축약속 면제기준을 충족할 수 있도록 매입·판매지역에서의 시장가격으로 하는 것”을 골자로 ‘양곡관리법’을 개정 7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16)  추곡수매제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출범한 초대 이승만 정부때 도입되었으며 국회동의제는 1950년에 도입되었다가 1972년 폐지된 것을 1988년 노태우 정부의 여소야대 정국에서 부활되었던 것으로 50여년만에 폐지되었다. 

 

  또한 노무현 정부는 2005년 3월 쌀 관세화 유예기간 10년 추가연장 재협상으로 예상되는 “쌀수입증가로 인하여 쌀가격의 하락이 예상됨에 따라 농가의 소득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농업인등에게 쌀가격의 하락과 관계없이 일정금액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고정직접지불금제도와 쌀가격이 목표가격에 미달하는 경우에 지급하는 변동직접지불금제도를 마련하여 시행하는 한편, 농업인단체의 대표, 소비자단체의 대표 등이 참여하는 농가소득안정심의위원회를 설치하여 농업인 등의 소득안정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도록 하는 등”을 골자로 하는 ‘쌀소득 등의 보전에 관한 법률’을 전면개정 역시 7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17) 

 

 이상의 공공비축제와 쌀 소득보전 직불제는 문재인 정부에 의해 전면 개편이 있기까지 18) 우리나라 양곡관리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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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당시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부원장직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UR 협상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1990년 7월 24~26일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UR 농업협상위원회 정부대표단 자문관 자격으로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10월경 농림부 장관 자문관(UR협상)으로 위촉되어 12월 3~7일간으로 예정된 브뤼셀 각료회의 준비 등을 위하여 제네바로 파견되었다. 각료회의 기간 중에는 조경식 농림부 장관을 보좌했다. 그후 1991~92년간 UR 농업협상의 크고 작은 회의에 정부대표단 대변인 등의 자격으로 참여하였으며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장관 자문관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12.1~15일간 UR 마무리 협상을 위하여 다시 정부대표단 자문관으로 제네바에 파견되어 김영삼 대통령의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쌀 시장개방에 관한 전화 협상을 지원하는 특별 임무를 수행했다.  

2) ① 모든 농림수산물의 관세는 현행수준으로 양허, ② 모든 비관세조치는 품목별 국내외 가격차를 ‘관세상당치’로 환산 ‘관세화(Tariffication)’하여 양허하고 저율할당관세(Tariff Rate Quota, TRQ)를 제공, ③) 합의기간 중 관세와 관세상당치는 감축하고 TRQ는 증량, ④ 농림수산물의 생산과 무역에 영향을 주는 국내보조금은 감축

   -감축대상 보조금: 농산물가격지지, 농가소득보조, 수출보조 등, -허용대상 보조금: 특정품목과 연계     되지 않은 환경보전, 재해구조, 식량안보 등을 목적으로 하는 비축, 낙후 지역개발지원 등, ⑤ 개도국     우대조치(이행기간, 감축율 등 우대), ⑥ 비교역적 관심사항 (Non-Trade Concerns, NTCs) 특별 고     려 등, 최용규, 실록 농업통상: 우루과이라운드, APEC, WTO에 관한 실무기록, HNCOM(주), 202

3) 나는 당시 제네바에서 파견근무 중이었다. GATT 본부를 항의 방문한 한국농민단체대표단을 안내하고 있었다. 대표단 일행이 방문을 마치고 GATT 본부 현관에 이르렀을 때 이경해 회장은 돌연 할복을 시도 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후 이경해 회장은 2003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의 WTO 본부 앞에서 WTO가 UR 후속으로 추진하는 농업협상을 반대하며 ‘WTO kills Farmers’라는 피켓을 몸에 두르고 한 달여 동안 단식농성을 했으며, 2003년 9월 11일 제5차 WTO 각료회의가 열린 멕시코 칸쿤에서 자결로 WTO 농업개방협상에 저항했다. 이경해 열사 10주기 < 기획 < 기사본문 - 한국농어민신문 (agrinet.co.kr)

4) 나는 당시 장관 자문관 자격으로 본회의(1+1)에 참석 회의 흐름을 살피고 장관 발언 작성 등의 역할을 했다

5) 양지경제연구회 제2회 세미나, ‘UR과 농업협상:전망과 대책’,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주제발표 최양부), 1993. 3. 29​ 

6) 나는 당시 정부의 마지막 협상 전략이 너무 안이하다고 판단 조선일보 송희영 경제부장과 인터뷰를 갖고 미국과의 막바지 새로운 협장 전략을 제시했다. 이 인터뷰는 1993년 12월 1일 자에 대서특필되었다. 나는 이 기사를 본 황인성 총리의 요청으로 내가 구상하는 새로운 협상 전략을 황 총리에게 특별 보고했다. 황 총리는 이를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재가를 받으면서 정부대표단의 협상 전략이 전격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7) 최용규, 앞의 책, 162쪽 

8) 김영삼 대통령 사과 담화의 핵심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

   “쌀을 지키기 위해 가트(GATT)체제를 거부하고 국제적 고아로 혼자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가트 체제를 수용하면서 세계화, 국제화, 미래화의 길로 나아갈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저는 과연 국가 이익이 무엇인지를 놓고, 대통령으로서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로서는, 자유무역을 통해 경제적 성장과 국부를 신장시켜 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UR은 우리에겐 개방과 국제화로 나아가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하나의 관문입니다.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절대절명의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였으면 합니다....저는 대통령으로서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 대비, 농업구조 개선사업을 앞당겨 실시토록 하는 등 농업경쟁력 강화에 노력해 왔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쌀 개방을 감내할 만큼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데 대해 매우 안타깝고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오히려 무서운 각오로 다함께 경제를 살리고, 농촌을 새롭게 일구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농업의 끝이 아니라, 우리 농업의 새로운 출발이 되게 해야 합니다.”(1993. 12. 9. UR 협상 타결과 관련한 김영삼 대통령 사과 담화문)

9) 당시 나는 김영삼 대통령 사과 담화를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청했다. 더욱 자세한 사항은 다음 글 참     조, 최양부, “거산과 함께한 ‘변화와 개혁의 신농정’ 1,524일,” 김영삼 대통령과 신한국 창조: 문민정부 출범 30주년 기념 프로젝트, 재단법인 김영삼대통령 기념재단 편, 김영삼 재단, 2023:466-468

10),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12월 23일 UR 이후 농정개혁을 대통령이 직접 챙기기 위해 우리 정부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통령 농수산수석비서관’(1996년 해양수산부 발족으로 ‘농림해양수석비서관’으로 변경)’을 신설했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농수산수석비서관에 임명되어 김영삼 대통령 퇴임 시까지 4년 2개월간 청와대에서 김영삼 정부의 농림수산 및 해양정책을 통할했다.

11) 최양부, 앞의 논문, 김영삼 재단, 189-500

12) 다만 김대중 정부 5년간은 전업농 육성보다는 가족농육성이란 정책을 도입하고 쌀 정부수매가격도 매년 4~5%씩 5년내내 인상하는 등 ‘포퓰리스트적 양정’을 추진했으나 관세화 유예기간인 2004년이 다가오면서 다시 쌀 경쟁력 강화대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3)  당시 정부는 1993년 8월 양정개혁을 발표하고 양곡수매방출제도의 개선을 위하여 쌀 값의 계절진폭제도의 허용을 발표하였으나 경제기획원의 반대 등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1994년 초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나는 대통령이 주재하는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계절진폭제 허용의 필요성을 보고하고경제수석의 결단을 촉구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수석에게 쌀값 계절진폭제 허용을 즉각 실시할 것을 지시해면서 계절진폭제가 마침내 도입되었다. 

14)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후 그해 가을부터 재임기간 5년간 매년 4~5%씩 정부 수매가를 올리면서 쌀시장기능을 자율화하려는 정책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었다. 김영삼 정부 이후 정부의 쌀 수매가격 결정은 또다시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의 정치재가 되어 현재까지도 진행형이 되었다.  

15)농림부, 농정개혁백서:개방에의 도전, 1997: 536~537

16) 양곡관리법[시행 2005. 7. 1.] [법률 제7432, 2005. 3. 31., 일부개정] ​

17) 쌀소득 등의 보전에 관한 법률 [시행 2005. 7. 1.] [법률 제7433호, 2005. 3. 31., 전부개정]

18)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저자의 앞의 글 (3) 참조, 최양부,  입법전쟁 부른 쌀 산업, 지속가능한 미래의 선택은? <3> 문재인 정부, 쌀 변동직불제 폐지와 양곡법 개정 > News Insight | (사)국가미래연구원 (ifs.or.kr) 2023,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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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5월30일 12시00분
  • 최종수정 2023년05월30일 11시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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