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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20 : 북제 창업자 고환의 업적을 다 까먹은 아들 고담과 손자 고위 <P>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6월30일 16시50분
  • 최종수정 2023년04월03일 11시1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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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107> 실패한 북주의 동진(AD564) 

 

북주 우문호는 고맙게 어머니를 돌려받았으므로 북제를 공격할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돌궐은 그렇지 않았다. 독자적으로도 여러 번 유주(북경부근)를 공격하였지만 전에 약속한 대로 북주와 연합하여 북제를 침략하기를 종용했다. 우문호는 돌궐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군 20만 명을 징발하여 동쪽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동관에 다다르자 우문호는 중군 10만 명을 주국 울지형의 지도아래 낙양으로 향하게 했고 권경선은 남쪽으로 나아가 여남을 포위하게 했다. 양표는 북쪽으로 나아가 제원으로 진군했다. 

 

양표는 과거 북제와의 전투에서 한 번도 진적이 었었으므로 매우 교만해 있었다. 깊숙이 북제 영역으로 진출하고서도 방비를 하지 않았다. 그런 무방비 상태를 알아차린 북제의 태위 누예가 매복 급습하는 바람에 양표는 사로잡히고 북주군사들이 패배했다. 반면 남쪽으로 나아간 권경선은 현호(하남성 여남)를 포위하자 북제의 예주자사 고사량과 영주자사 소세이가 북주에 항복하고 나왔다. 

 

우문호와 울지형이 10만 대군으로 직접 진두 지휘한 낙양공격은 30일이 넘도록 이기지 못했다. 북제에서는 곡률광을 낙양으로 투입하고 단소를 불러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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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낙양이 위태로우니 그대 단소를 보내 방어하고자 한다.

    그러나 돌궐이 북쪽을 위협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소가 대답했다.

 

  ” 돌궐은 옴이나 종기 같은 무리에 불과합니다.

    지금 급한 것은 서쪽의 북주입니다.

    이들은 가슴과 배의 질병과도 같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고담은 기병 1천을 붙여서 단소와 함께 급히 낙양으로 보냈다. 그리고 자신도 낙양으로 내려왔다. 5일 만에 태원서 부터 낙양까지 400여 킬로미터를 달려 온 단소는 곧바로 군사를 조직하여 좌군을 맡고 중군은 난릉왕 고장공(고징의 아들), 그리고 우군은 곡률광이 맡았다.  

 

단소가 번개같이 진양에서 낙양으로 내려왔다는 소문을 들은 북주 군사들은 매우 놀라고 두려웠다. 단소의 좌군은 성공적으로 북주군을 격파했다. 난릉왕 고장공의 우군도 500여 돌격기병을 이끌고 북주군영으로 치고 들어가니 북주군들이 군영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북주의 선봉 우문헌과 달해무가 곡률광과 싸워 곡률광이 쫒기는 형편이 되었는데 도만가던 곡률광의 화살이 북주군 장수 왕웅의 이마를 관통하면서 북주군의 사기도 많이 꺾이게 되었다. 달해무가 우문헌에게 말했다.

 

   ” 밤을 이용하여 군사를 물리시지 않으면

     내일은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저 달해무는 전쟁터에 오래 있어봤기 때문에 

     형세라는 것을 좀 압니다. 

     경험과 경륜이 부족한 공은 어찌 우리 군사를 

     호랑이 입에다 내맡길 수 있습니까?“

 

마침내 우문헌과 달해무가 군사를 돌려 후퇴했다. 권경선도 여남을 버리고 퇴각했다. 애초 북주 대총재 우문호는 장수로서의 지략도 없었지만 이번 전쟁을 이기고 싶은 욕망도 없었다. 우문호의 북제 침략 작전이 허망하게 실패했지만 북주 황제 우문옹은 죄를 묻지 않았다.  

 


<108> 말로 황제를 바꾼 조정 : 고담의 선양(AD565) 

 

북제 저작랑 조정(祖珽)은 문학적 소양이 깊었고 뛰어난 여러 기예를 가지고 있었지만 행동이 거칠고 물건을 훔치거나 속이는 나쁜 행실을 가지고 있었다. 고환이 도독중외제군사일 때 공조를 맡으면서 금 술잔을 훔친 일도 있고 또 벼 3천 석을 훔치다가 장 200대를 맞은 적도 있었다. 고양이 황제일 때에는 비서승으로 있으면서 궁궐의 책과 다른 물건을 훔쳤다가 교살판결이 내려졌지만 감형되어 서민이 된 적도 있었다. 고양은 조정의 행실이 나빴지만 그의 뛰어난 재능을 기특하게 생각하여 중서성으로 불러들였다. 

 

고담이 아직 장광왕으로 있을 때 조정이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 전하께서는 평범하지 않은 골상을 하고 계십니다.

    제가 전하께서 용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었습니다.“

 

고담이 이렇게 대답했다.

 

  ” 내가 만약 그리 된다면야 마땅히 형을 뷰유하고 귀하게 해 드릴 것입니다.“

 

고담이 과연 황제가 되고 나서 조정은 화사개와 함께 최고의 실세가 되었다. 조정이 화사개에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 그대가 받고 있는 황제의 은총은 예로부터 견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궁거(황제 가마)가 만가(황제 상여)가 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화사개가 깜짝 놀랐다. 무순 말이냐고 조정에게 물었다.

 

  ” 주상에게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이전의 황제 고환, 고징, 고양의 아들이 모두 황제가 못 된 것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황태자로 하여금 일찍이 황위에 오르게 하셔서

     임금과 신하의 본분을 미리 고정시켜 두셔야 합니다.’

     만약 일이 성사된다면 그 공은 모두 당신의 것이 됩니다.    

     당신이 일을 어느 정도 성공시킨다면 

     제가 밖에서 표문을 올려서 이 일을 밀고 나가겠습니다.“

 

화사개가 그렇게 하기로 했다.

마침 밤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태사가 이것은 주군이 바뀌는 형상이라고 말했다. 조정이 편지를 황제에게 올렸다.

 

  ”폐하께서 천자가 되셨으나 하늘의 징조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땅히 자리를 동궁에게 물려주시고

   천도에 부응하십시오.“  

 

그러면서 북위의 탁발홍이 AD471년 탁발굉에게 황위를 물려준 고사를 꺼냈다. 고담은 화사개와 조정의 말을 믿고 황제의 자리를 아들 고위에게 넘겨주었다. 태상황이 되었다. 이 때 나이가 서른여덟이었고 황제의 자리를 맡은 지 4년 만이었다. 북제의 세조 무성제라고 불린다. 새로 황제가 된 고위는 나이가 여덟 살이었다.(AD565)   

 

 

<109> 죽은 고양의 시호와 묘호를 고친 고담과 조정(AD565)

 

태상황 고담은 자주 큰 형 고양에게 회초리를 맞았었다. 조정 또한 도적놈이라고 놀린 고양에게 원한이 있었다. 조정은 그 상황을 이용하여 고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문선제(고양)는 미치고 포악스러웠는데

    어떻게 시호에 ‘문(文)’자를 넣을 수가 있습니까.

    또 창업자도 아니신데 ‘조(祖)’자를 넣습니까.

    만약 문선이 조가 된다면 폐하께서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고담이 옳게 여겨 문선황제를 경렬황제, 현조를 위종으로 바꾸어 부르도록 했다.(AD570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110> 북제의 인사(AD566)

 

고위가 새로 황제가 된 다음해 AD566년 4월 대대적인 인사조치가 내려졌다.

 

  하발인=태사

  후막진상=태보

  누예=태위

  울찬=태부 

  고윤=사도

  고예(고환의 동생 고침의 아들)=사공

  고효완=상서령

  곡률광=대장군

  조언심=좌복야

 

이어 10월에 또 다시 인사를 단행했다. 후막진상은 태보에서 태부, 임성왕 고개가 태보,

누예가 태위에서 대사마,고윤이 태위, 한조념을 사도로 임명했다.

 

 

<111> 화사개의 참소로 고효완 죽임(AD566)

 

상서령 하간왕 고효완은 고징의 아들이었다. 맏형 고효유가 삼년 전 화사개와 조정의 참소를 받아 억울하게 죽은 것(AD563년)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있었다. 고효유는 고담이 황후와 화사개가 더불어 손을 붙잡고 놀이하는 것을 여러 번 간한 적이 있었다. 또 고예는 고침의 아들인데 고침이 형님 고환의 첩과 내통하다가 타살된 사람이었으므로 고예를 등용하면 안 된다고 비판하였다. 고예 또한 고효유를 맞 비판하였다. 고담은 화사개와고예편을 들어서 고효유를 좋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 때 고효유는 황궁의 궁녀 중 이주씨와 환담을 나누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고담이 몹시 화를 내면서 고효유에게 벌주 37잔을 내렸다. 몸이 비대한 고효유가 뒤뚱거리자 사람을 시켜 끌고 내보내 수레위에서 벌주를 강제로 마시게 하였다. 고효유가 과음으로 괴로워하자 고담은 그를 싣고 강물에 던져 익사시켜버렸다. 주변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지만 동생 고효완은 큰 소리를 내며 울면서 슬픔을 표시하였다.(AD563년 6월) 

 

고효완은 억울한 심정을 숨기지 못하여 풀로 엮은 사람을 만들고는 활로 쏘아 분을 삭이고 있었다. 여기서 풀사람은 아마도 형님을 죽였을 때의 황제 또는 실세 조정이나 화사개를 상징했다. 그 정보를 들은 화사개와 조정이 상황 고담에게 이렇게 참소했다. 

 

  “ 풀로 만든 사람은 성스러운 분의 몸을 본 더 만든 것이 분명합니다.

   북위 때 요언 중에 하남에서 씨를 심었는데 하북에서 열매가 나고

   하얀 버드나무 위에서 금계가 운다고 했습니다.

   하남과 하북이란 말은 합쳐서 하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금계는 통상 대사면령을 내릴 때 쓰는 것입니다.

   장차 하간왕 고효완이 금계를 들고 반란을 일으킬 것이 분명합니다.”

   

고담은 고효완이 충분히 그럴 것이라고 의심했다. 이 대 고효완은 부처님의 어금니를 집 안에 두었는데 그것이 밤에 현란한 광채를 뿜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고담은 급히 고효완의 집을 수색하게 했고 창고 가득히 창과 깃발을 발견해냈다. 고담은 고효완의 여종들을 불러내 심문을 했는데 평소 고효완에게 총애를 받지 못한 진씨라는 여자가 고효완을 무고하여 말햇다.

 

  “ 고효완은 항상 폐하의 형상을 그려놓고서 그것에 대해 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은 황제가 아니라 고효완의 아버지 고징이었다. 고담은 사람을 시켜 고효완에게 심한 채찍질을 하게 했다. 고효완이 고담을 숙부라고 부르자 고담이 소리쳤다.

 

  “ 어찌 상황인 나를 숙부라고 부르느냐!”

 

고효완이 당당하게 대꾸했다.

 

  “ 신은 신무황제(고환)의 적손이고 

    문양황제(고징)의 적자이며

    동위 효정황제(원선견)의 생질입니다.

    어찌 숙부라고 부를 수 없습니까?”

 

고효완의 어머니이자 고징의 부인 풍익공주(나중에 문양황후) 원씨는 원선견의 누이였다. 고담이 더욱 화가 나서 고효완의 양쪽 정강이를 부러뜨렸는데 그 부상으로 죽었다. 고효완의동생 안덕왕 고연종이 죽은 형을 위해 통곡하며 풀로 인형을 만들고 때리면서 외쳤다.

 

  “ 왜 우리 형을 죽였느냐”

 

고담이 그 말을 듣고 고연종을 땅에 엎어놓고 말채찍으로 200대나 때려 거의 죽게 만들었다. 고연종은 북제가 멸망할 즈음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북주 우문옹에게 항거하다가 잡혀 AD577년 처형되었다. 

 

 

<112> 곡률씨의 위세(AD567)

 

북제에서 곡률씨의 위세는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좌승상 함양왕 곡률금의 큰 아들 곡률광은 대장군, 둘째아들 곡률선과 손자 곡률무도는 모두 개부의동삼사로써 유주와 양주를 장악하고 있었다. 또 곡률금의 딸은 고위의 부인이었고 곡률광의 세 아들이 모두 공주를 며느리로 들였다.  

 

그러나 곡률금은 전혀 기뻐하지 않고서 아들 곡률광에게 훈계했다.

 

  “내가 비록 책은 못 읽었지만 

   옛날부터 외척으로 집안을 보전한 적이 별로 없었다고 들었다.

   딸이 황제의 총애를 입으면 많은 사람들이 질시를 할 것이며

   총애를 입지 못한다면 증오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 가문은 전공을 통하여 부귀를 이룬것이지

   여자의 힘을 통해서 성공한 것이 아님을 명심해라.”

 

 

<113> 북제 인사(AD567) : 고엄이 녹상서사

 

AD567년 대폭의 인사조치가 있었다.

 

  동평왕 고엄(고담의 셋째 아들) = 녹상서사 및 사도

  조언심 = 좌복야에서 상서령

  누정원 = 좌복야

  서지제 = 우복야 

  고개 = 태사

  풍익왕 고윤 = 대사마 

  단소 = 좌승상

  하발인 = 우승상

  후막진상 = 태보에서 태재

  누예 = 태위에서 태부

  곡률광 = 대장군에서 태보

  한조념 = 대장군  

  고윤 = 사도

  고예(고환의 동생 고침의 아들) = 태위에서 사공

 

고엄은 아버지 고담과 어머니 호태후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므로 어사중승에 경기대도독에 영군장군까지 겸하고 있었다. 상황이 진양을 갈 때면 고엄은 남아서 국사를 관장했다. 성격은 강직하고 결단력이 있어서 황제인 한 살 위 형 고위가 나약하고 우유부단함을 지적하였다. 상황 고담과 호태후는 고위 대신 고엄으로 바꿀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이 때 고엄의 나이는 열 살에 불과했고 황제 고위는 열 한 살이었다. 따라서 결단력이 있어서 고엄으로 바꿀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좀 과장된 기술일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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