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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20 : 북제 창업자 고환의 업적을 다 까먹은 아들 고담과 손자 고위 <F>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4월21일 16시50분
  • 최종수정 2023년04월03일 11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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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37> 우문태의 후막진열 토벌(AD534)

 

위 주군이 하발악의 사망 소식을 듣고 우문태와 후막진열을 조정으로 불렀다. 후막진열은 이미 고환의 반간계에 넘어가 고환 편에 서 있었으므로 소환에 응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소환을 해놓고 거부해야만 토벌의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우문태는 후막진열을 심하게 비난했다. 황제와 함께 북위 종묘사직을 구하기로 맹세한 후막진열을 반란을 일으킨 수장으로 규명하고 도리어 토멸대상으로 규정했다.

 

우문태는 먼저 후막진열의 영향 하에 있는 원주(영하자치구 고원)자사 사귀를 공략하여 함락시켰다. 우문태가 강군을 가지고 쳐들어오자 남진주자사 이필은 후막진열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후막진열은 거절하고 우문태를 막았다. 우문태의 대군이 고원에서 남쪽으로 밀려오자 후막진열은 상규(감숙성 천수)로 후퇴하여 이필과 같이 우문태를 방어했다. 그러나 이미 이필은 이미 질 것을 알고 우문태와 내통하다가 성문을 열고 투항해 버렸다. 후막진열은 도주의 길에 올라 여기저기 방랑하다가 조니에게로 갈 생각으로 영주(영하자치구 은천)로 달아났다. 우문태의 기병들이 빠르게 따라 붙자 목을 매고 자살했다. 이제 황하 이서 관중 지역은 사실상 우문태가 지배하는 영역이 되었고 황하 이동지역은 고환의 세력권으로 양분된 셈이다.

 

고환은 달콤한 말로 우문태에게 편지를 보내 동맹을 하자고 했다. 우문태는 거절했다. 장궤를 시켜 황제에게 고환의 편지를 보냈다. 북위조정에 있던 곡사춘이 장궤에게 물었다.

 

  ” 하발공과 비교하면 우문은 어떻소?“  

 

장궤가 이렇게 답변했다.

 

  ” 문장실력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만하고(文足經國)

    무력으로는 반란을 평정하기에 충분합니다(武足定亂).“

 

위 주군은 만족하여 우문태에게 조금씩 동진하여 고환을 압박하라고 명했다. 신임 옹주자사 양어가 우문태의 명을 받고 군대를 끌고 동쪽으로 나아가 장안을 접수했다. 조정에서는 우문태에게 시중, 표기대장군, 관서대도독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38> 북위 황제 원수의 고환 제거 책략(AD534)

 

북위 황제 원수에게는 평원공주라는 동생이 있었다. 평원공주를 두고 봉융지와 손등이 다투었는데 결국 평원공주는 봉융지에게 시집을 갔다. 평소 봉융지는 고환과 가까워서 고환에게 곡사춘이 고환을 배반할 가능성이 있다고 귀띔을 했었다. 평원공주를 얻지 못한 손등은 곡사춘에게 봉융지가 고환축출 음모를 고환에게 귀띔한 사실을 알려줬다. 곡사춘은 즉시 황제에게도 그 사실을 보고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봉융지는 고향으로 도망쳤다. 고환은 봉융지를 진양으로 불렀다. 봉융지를 밀고한 손등도 궁궐에서 어사를 때려죽인 죄를 짓고 진양으로 도망쳐 고환에게로 갔다. 

 

북위 황제 원수는 진양을 토벌할 심산으로 계엄령을 내리고 곡사춘을 총책임자로 해서 낙양에서 대군을 사열했다. 겉으로는 양나라를 원정한다고 말했다. 6월 황제는 비밀스럽게 고환에게 편지를 보내서 말했다. 

 

  ” 내가 남쪽 양나라를 정벌한다고 한 것은 사실은 

    다른 뜻을 품은 우문태와 하발승을 토벌하기 위한 변명이었소.

    공도 역시 같이 도와야 할 것이오.

    이 편지는 보는 즉시 태우도록 하시오.“

 

고환은  즉시 표문을 올려서 대답했다. 

 

  ” 형주(자사 하발승)와 옹주(자사 우문태)는 장차 반역할 것이 확실합니다.

    신이 병마 3만을 거느리고 황하 동쪽에서 건너겠습니다. 

    또 항주자사 고적간 등 4만을 보내 내위(산서 하곡)에서 강을 건너겠습니다.  

    영군장군 누소 등은 장병 5만으로 형주를 토벌하고 

    기주자사 울경 등은 산동지역 병사 5만, 돌격기병 5만으로

    강좌(양나라)를 공략하겠습니다.

    모두 정돈하여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황제는 자신의 제거계략을 눈치 챈 것을 알고 고환이 표문을 띄운 것이라고 보고 대책회의를 소집했는데 고환의 군사를 중지시켜야 한다고 했다. 고환도 병주의 참모들을 모아놓고 의논에 들어간 다음 표문을 올렸다.

 

  ” 신은 조정 간신들의 계략에 희생되어 황제의 의심을 샀을 뿐입니다.     

    신이 만약 감히 폐하께 누를 끼칠 생각이 있다면

    신에게 천하의 재앙을 받게 하시고 자손은 절멸될 것입니다.

    폐하가 만약 저의 충심을 믿으신다면 창과 방패를 움직이지 마시고 

    간신 한 두 명을 폐출하기를 바랍니다.“    

   

조정 회의결과 황제는 전군에 고환에 대한 방비체계를 갖추도록 하는 한편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긴 편지를 고환에게 보냈다.

 

  ” 하발승과 우문태의 행동을 보니 이상한 흔적은 없소.

    그대의 군사행동은 적절치 않소.

    그대가 말하는 간신이 누군지 알지 못하겠소.

    봉융지와 손등이 그리로 도망갔는데

    충신이라면 어찌 그들의 목을 베어 압송하지 않소?“  

 

북위 중군장군 왕사정은 걱정에 잠긴 황제에게 우문태에게로 피신했다가 돌아오면 된다고 위로했다. 황제는 산기시랑 유경을 고평(영하자치구 고원)에 보내 우문태의 의견을 물었다. 우문태도 황제를 받겠다고 했다. 황제는 유경의 뜻을 물었다. 유경은 형주 쪽 보다는 고평 쪽이 믿음직하다고 답했다. 그러나 동군태수 배협은 왕사정에게 우문태가 자신의 칼자루를 남에게 주지 않을 사람이라면서 끓는 물을 피하려다 불길에 뛰어드는 격이라고 반대했다. 배협은 고환과 싸우기도 버겁고 또 우문태에게로 가는 것도 위험하니 일단 서쪽으로 이동하여 함곡관까지 간 다음 천천히 결정하자고 했다.    

 

황제는 한번 칙서를 써서 고환의 군사행동을 중지하라고 촉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종묘사직을 위해 결단에 나설 것이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내려 보냈다. 고환도 즉시 표문을 올려 우문태와 곡사춘의 죄상을 극력 상주했다. 황제는 상황이 급박하여 하발승을 낙양으로 급히 불렀다. 그 때 그는 형주자사로 남쪽에 있었다. 하발승이 노유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고 자문을 구하자 노유는 고환의 패역함을 이유로 들면서 올라가서 살든지 죽든지 일전을 펼치는 것이 상책, 동서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1백만 대군을 만든 다음 기회를 엿보는 것이 중책, 양나라에 몸을 의탁하는 것이 하책이라고 조언했다. 하발승은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황제는 하발승과 우문태 중에서 우문태에게로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39> 북위 황제 원수의 몽진(AD534) 

 

고환은 태원을 동생 고참에게 맡기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어차피 도읍도 진양(태원)에서 업으로 옮길 생각이었으므로 겸사 겸사인 셈이다. 출병의 명분은 곡사춘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북위 황제 원수는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하교(황화대교)에 진을 치고 선봉 곡사춘은 망산에 주둔했다. 곡사춘은 기병 2천으로 고환을 기습하고자 했으나 황제는 곡사춘을 믿을 수도 없고 또 고환이 죽으면 또 다른 고환이 생길 것이므로 반대하는 황문시랑 양관의 말을 믿고 허락하지 않았다. 곡사춘은 일개 환관의 어리석은 말에 넘어가는 황제를 보면서 통탄해했다.

낙양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을 들은 우문태는 이렇게 말했다.  

 

” 고환이 여러 날을 달려 팔, 구 백리를 뛰어 왔는데 

  이는 병가에서 크게 기피하는 일이 이 틈을 타고 그들을 공격해야 한다.

  황제는 분명 움츠리면서 결전하지 못하고 지키기만 할 것이다. 

  황하의 길이가 1만 여리나 되어서

  지키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한 곳만 뚫려도 대사는 날아갈 것이다.“

 

이어 대도독 조귀를 행대로 삼아 포판을 건너 병주로 보내 고환의 배후를 공략하게 하고 동시에 날쌘 기병 1천을 대도독 이현에게 주어 낙양으로 보냈다. 고환은 두태를 활대로 보내고 한현은 정주시 북쪽이 석제(하남성 위휘)로 내려 보냈다. 북위군의 활대 방어책임자 가현지는 애초부터 두태에게 투항할 의사였으므로 활현은 맥없이 무너졌다. AD524년 7월 26일 고환은 황하를 건넜다. 

 

 

황하가 뚫린 상황에서 북위황제는 어디로 가야할지를 다시 물었다. 남쪽 양나라로 가자는 의견, 남쪽 형주 하발승에게로 가자는 의견, 관중(장안 방면)으로 가서 지키자는 의견, 끝까지 사수하자는 의견 등으로 분분했다. 평소 곡사춘과 권력을 다투었던 원빈지가 황제에게 거짓으로 고환의 군사가 황궁 가까이 도달했다고 보고했다. 황제는 도망가기 위해 급히 곡사춘을 소환했다. 7월 27일 황제는 남양왕 원보거, 청하왕 원단, 광양왕 원담 등을 인솔하고 서쪽으로 피신했다. 원담과 원단은 황제가 서쪽으로 도망갈 것을 알고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황제는 우문태가 보낸 대도독 이현을 효(삼문협)에서 만났다. 황제는 우문태가 보낸 조귀와 양어의 영접을 받고 장안으로 들어갔다. 우문태에게 대장군, 옹주자사, 겸상서령을 내리고 군국의 모든 정사를 맡겼을 뿐 아니라 여동생 풍익장공주를 우문태에게 시집보냈다. 

 

 

<40> 고환의 낙양입성(AD534) 

 

고환은 7월 29일 낙양에 입성했다. 즉시 고오조를 보내 황제를 뒤쫓아 갔지만 따라잡지 못했다. 고환은 북위조정 백관을 소집하여 심하게 문책했다.

 

  ” 신하가 되어서 주군을 받들고 

    위급한 것을 바로잡으며 구원해야 할 것인데     

    바른 말로 간쟁해야 할 때 간언하지도 않고

    황제가 나갈 때에는 따라서 좇지도 않고

    좋을 때에는 부귀영화만 탐닉하다가

    어려울 때에는 숨고 피하면 신하의 절개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겸상서좌복야 신웅이 일어나서 말했다.

 

  ” 주상께서 항상 측근들과만 상의하므로 

    우리들은 대소사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황제가 서쪽으로 간다고 들었을 때에도 따라가면 

    간신취급을 받을 것 같아서 머무르면서 대왕을 기다렸지만

    나가든 머물든 죄를 피할 곳이 없었습니다.“ 

 

고환이 질책했다.

 

  ” 경과 같은 대신들은 

    마땅히 몸으로 나라에 보답하여야 하는 것이오.

    아첨쟁이들이 용사하는데 경등은 일찍이 한 마디라도 따졌었소?

    국가의 일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었는데

    죄가 어디로 가야할 것 같소?“  

 

고환은 신웅, 개부의동삼사 질열연경, 이부상서 최효분, 도관상서 유흠 탁지상서 양기 산기상시 원사필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41> 고환이 낙양에 세운 허수아비 동위 황제 원선견(AD534) 

 

고환은 여러 차례 황제 원수를 불러 돌아오라고 했지만 돌아 올 리가 만무했다. 직접 영접하기 위해 삼문협까지 갔지만 응답이 없었다. 고환은 원로 백관들을 불러 황위를 누구에게로 계승할 것인지 물었다. 장안의 북위 조정으로부터 빠져 도망 온 청하왕 원단이 적임자였으나 벌써부터 황제 행세를 하는 것이 추하다고 여긴 고환은 그의 아들 원선견을 세우기로 했다. 효정제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원단은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에 남쪽으로 도주하였으나 고환이 사람을 보내 설득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원선견이 11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이것으로 동위(AD534-AD550)가 태어난 셈이다. 동위 조정에서는 원심을 대사마, 원탄을 태위, 고성을 사도, 고오조를 사공으로 임명하였다. 동위 수도를 업으로 정하고 고환은 태원으로 돌아왔다. 

 

 

<42> 음란한 황제 원수의 독살(AD534) 

 

북위 효무제 원수는 여성편력이 매우 문란하여 사촌 여동생을 건드렸고 그 중 세 명에게는 공주라는 작위를 책봉했다. 평원공주 원명월은 남양왕 원보거의 친남매로 황제를 따라 갔는데 우문태가 황제와의 흉측한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 평원공주를 붙잡아 죽였다. 황제는 활을 당기기도 하고 책상을 치기도 하면서 분노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 사건으로 우문태와의 사이가 다시 크게 벌여졌다. 그 소식을 들은 우문태는 황제가 마시는 술에 독을 타서 죽였다. (AD534년 11월 15일) 이 때 효무제 원수의 나이는 25세였다. 

 

우문태는 여러 사람들과 후계를 의논한 끝에 광평왕 원찬을 추천받았다. 원찬은 효무제 원수의 조카다. 시중 복양왕 원순이 울면서 반대했다.

 

  ” 고환이 돌아가신 황제를 압박하여 축출하고 어린 군주를 세웠는데 

    밝으신 공께서는 고환의 짓거리와는 다르게 행하십시오.

    광평은 나이가 너무 어리니 어른을 세우는 것만 못하오.“

 

우문태는 원찬 대신에 28세 남양왕 원보거를 옹립했다. AD534년 북위는 원선견의 동위와 원보거의 서위로 나누어지게 된다. 물론 서위 황제 원보거는 다음해인 AD535년 1월에 즉위하였으므로 AD535년을 기원으로 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위의 실세는 고환이고 서위의 실세는 우문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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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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