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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에너지 위기와 남북러 가스관 프로젝트의 기억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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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8월30일 17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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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경제와 정치에 ‘겨울’이 오고 있다. 에너지 위기가 그 시작점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이 제재에 나서자 그 보복으로 자국에 에너지를 의존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가스관을 수시로 통제하고 있다.

 

냉전종식과 세계화라는 기존 국제정치 질서의 기본 틀이 블록화와 신냉전이라는 방향으로 바뀐 현실의 모습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유럽 에너지 위기로 나타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다가오고 있는 혹한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서방 선진국의 대명사격인 유럽 국가들은 지금 변해버린 국제정치의 냉정한 현실 속에서 러시아의 ‘무기력한 인질’이 되어버렸다. 독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영국 등 유럽 각국의 국민들은 치솟는 전기,가스 요금과 휘발유 가격에 신음하고 있다. 

부자 나라의 국민들이 강제적으로 에너지 소비를 제한 당하고 있다. 독일 프랑스 등은 이번 여름에 에어컨 온도를 27~28도 밑으로 내리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펼쳤고, 스페인에서는 노 타이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모두 전기 수요를 줄이기 위해서이다.

 

문제는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겨울 난방 온도를 18~21도 이하로 강제하는 정책이 발표되고 있다. 혹한기에 국민의 동사를 막기 위해 가스 배급제를 실시하,고 산업 시설 가동을 일시 중단 시키는 방안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해당 국가의 경제에 커다란 피해를 입힐 수밖에 없는 조치다.

 

유럽 국가들이 겨울이 오기 전에 자력으로 에너지 공급을 늘리는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러시아의 ‘자비’를 바라면서 최대한 에너지 허리띠를 졸라 매며 ‘생존 모드’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유럽 국가들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나이브했고 에너지 안보 리스크를 간과했던 정치인들의 판단 착오가 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발전 과정에서 에너지 수요가 급증했던 유럽 국가들은 냉전 시기에도 소련으로부터 육로 파이프라인을 통해 석유와 가스를 구매해 왔다. 이에 대해 미국은 유럽의 소련 에너지 예속을 우려하며 지속적으로 반대 의사를 명확히 했었다. 

실제로 러시아는 2006년과 2009년 친서방 정권이 수립된 우크라이나에 대해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해 유럽 국가들을 에너지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국가들은 도입선 다변화에 나서지 않고 에너지를 러시아에 더 의존하는 길을 선택했다. 탈원전에 따른 에너지 부족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데다, 러시아와 교역을 늘려 평화를 만들겠다는 ‘소망’도 그런 정책의 근거가 됐다.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까지도 지속적으로 유럽, 특히 독일에 대해 러시아 에너지 종속을 경고했다. 2018년 7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은 러시아와 독일을 연결하는 천연가스 수송용 가스관인 '노르트스트림2' 사업을 비판하며 "독일이 러시아의 포로가 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트럼프와 여러 측면에서 상극인 바이든 현 미국 대통령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입장이 동일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21년 1월부터 독일에게 ‘노르트스트림2’ 건설 공사를 중단하라고 강력히 압박했다. 미국은 에너지가 유럽의 안보와 경제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러시아의 무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당시 총리는 이런 미국의 우려와 요구를 거절했다.

 

그 결과는 유럽의 러시아에의 에너지 종속 심화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인 2021년 현재 유럽 국가들의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보면, '노르트스트림2'를 주도한 독일이 49%였으며, 오스트리아 86%, 핀란드 75%, 그리스 64%, 헝가리 61%, 체코 55%, 폴란드 50%, 이탈리아 38% 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2022년 2월 24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유럽으로 가는 가스관을 수시로 잠그며 에너지를 무기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유럽 에너지 위기는 현재의 국제정치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큰 지정학의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세계 주요 대학의 국제정치학 표준 교과서라고 평가 받고 있는 ‘세계정치론’이라는 책에는 이런 문구들이 있다.

 

“서구와 러시아 사이에서 ‘새로운 냉전’을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100p)

“푸틴의 러시아는 가까운 동반자로 보이지 않았지만 심각한 위협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신경 쓸 만한 이념적 임무를 강조한 것도 아니고, 세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21세기 초가 되어서는 가장 낮은 수준으로 추락했다.”(100p)

 

2022년의 현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내용들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이 1996년 말했던 “맥도날드 매장이 있는 나라 사이에선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맥도날드 평화이론’도 허망한 꿈으로 종말을 고했다. 경제교류가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으면서 사라져 버렸다.

 

결국 메르켈 전 총리 등 유럽의 정치인들은 이런 기존의 사고방식과 안보 리스크를 간과한 나이브한 생각으로 국민과 자국의 경제, 그리고 정치를 위기로 몰아넣는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전 세계의 찬사 속에 퇴임했던 메르켈은 지금 정반대로 국가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강력한 비판을 받고 있다.

유럽은 이제 유로화 가치 급락에서 볼 수 있듯이 경제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도 EU의 존속이 언제까지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까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러시아 가스관’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단어다. 한국~북한~러시아를 잇는 가스 파이프 라인을 건설해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도입한다는 남·북·러 가스관 사업은 지난 문재인 정부 당시 적극적으로 추진했지만 진전을 보지 못했던 정책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2022년 2월 말에도 김부겸 당시 국무총리가 외신 간담회에서 “남·북·러 가스관 사업은 계속 추진돼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탄소 중립 달성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아찔한 순간들이 많았다.

 

한국도 오는 10월에 전기,가스요금 인상이 예정되어 있다. 가스 수입 대금이 1년 전보다 두 배 정도 상승했기 때문에 요금 인상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한국은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는 에너지 위기 상황에 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 더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한국은 현재의 국제정치질서 지각변동에 제대로 대처하고 있는가. 

리스크를 간과하는 나이브한 생각에서, 아니면 현실과는 동떨어진 신념에 사로잡혀서, 허망한 꿈을 꾸며 국민과 국가를 위기로 끌고 가려는 정치인은 없는가. 에너지 위기 속에서 다가오는 정치경제적 겨울에 대비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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