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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29>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이천 [李蕆(1376-1451), 시호 翼襄公](下)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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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7월22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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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2차 파저강 전투]

 

이천의 가장 잘 알려진 공적은 제2차 파저강 전투일 것이다. 끊임없이 출몰하는 올량합 야인을 방어하기 위해 평안도 도관찰사 박안신은 압록강 연변 적의 은신처를 없애자고 했지만(세종 19년 1월 2일),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은 더 강력한 응징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노략질을 일삼는 야인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 자원자가 매우 많을 것이고 적의 숫자도 많아야 수 백 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문제는 숲속에 숨어 사는 적의 동태와 소굴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도절제사 이천은 꾸준히 정탐꾼을 들여보냈다. 그리고 본인도 틈틈이 압록강을 건너가 염탐을 하고 있었다. 이 염탐작전이 와전되어 이천이 사냥을 즐긴다는 소문으로 세종의 귀에 들어갔다. 즉시 평안도 도관찰사 박안신에게 비밀편지를 보냈다.

 

   “하물며 지금 풀이 성하고 말이 살쪄서 적의 변고가 걱정되는 차에

    (이천이) 마음대로 방어소를 이탈해 불법으로 사냥을 하다니 실로 

    부당하다. 그가 철산과 의주에 며칠을 묵었으며 강을 건너 며칠을 

    머물렀던지 낱낱이 보고하라. 

    (矧今草盛馬肥 賊變可畏 而擅離防禦之所 違法遊獵 實爲不當  留鐵山幾日   

     留義州幾日 越江留幾日乎 備悉啓達 : 세종 19년 5월 13일)” 

 

아마 누군가가 이천의 이런 염탐행적을 사냥행각으로 의심하여 세종에게 밀고한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열심히 정탐하던 이천은 정확히 어디인지는 몰라도 괴수 이만주가 올라산 안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정병 7,8백이면 충분하겠지만 지형 등의 어려움을 감안해 3천 병력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작전개시는 낙엽으로 숨기 어렵고 사람과 말이 싸우기 적절한 9월 하순경으로 결정했다. 이천은 세 가지 대안을 세종께 올렸다(세종 19년 6월 11일). 

 

(i안) 6월 경 정병 150명으로 먼저 습격하고 퇴각한 뒤 방심을 틈타

     9월 본격 공격을 단행한다. 

(ii안) 명년 2월 강물도 반쯤 얼어있는 상태에서 저들이 숨을 장소가 

      없을 때 기습공격을 단행한다.   

(iii안) 공격하고 퇴각하고를 반복하여 도저히 생업을 유지하지 못하도록 

      교란한다. 

 

야인들을 근본적으로 토벌해야 한다는 이천의 생각에는 동의했지만 군사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 세종은 소극적이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i) 적들이 정보를 알아 차려 대비전략을 수립했을 것이고,

(ii) 소굴을 찾아내도 적이 도망가 버리면 소용이 없으며,

(iii) 정탐꾼이 잡혔으므로 이쪽 전략이 노출된 것이다.

 

곰곰이 따져 본 세종은 비밀리에 이천에게 편지를 썼다. 이천의 말이 매우 옳으므로 여러 사람을 배제하고 비밀리에 ‘일’을 진행하자는 것이다. 먼저, 그곳에 있는 노인과 전략가들과 숙의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군사를 일으키면 언제가 좋으며, 병력은 얼마가 되며, 길은 몇 갈래로 나누며, 기병의 수는 얼마이며, 보졸의 수는 얼마이며, 적의 소굴을 어떤 방법으로 알아내며, 만약 참고 행동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몇 년이나 기다려야 하는지를 물었다. 세종은 이 글을 도승지 신인손과 좌부승지 김돈에게 보여주었다. 세종의 속 마음을 알고 있으라는 뜻이었다. 여태껏 꾹 참고 왔으나 오랑캐들이 반성하는 마음은 없고 더욱 방자해졌으니 이를 힘으로 다스려야겠다는 뜻이다. 황제도 적의 토멸을 허락하고 있으며, 정벌을 하지 않는 것에 무슨 이익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신개 이외에는 절대로 알지 못하도록 비밀유지를 부탁했다.

 

이천은 세종의 편지에 대해 즉각 답변을 보내왔다. 세종의 16개 전략 중에서 일부는 찬성하지만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대안을 제시하였다. 군사와 말을 세 부분으로 나누는 문제에 관해서는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고 또 매복에 걸릴 가능성이 높으므로 두 군데로 나누자고 했고, 전투에 능하지 않은 수령을 교체하는 문제는 소문을 퍼지게 하며 이미 15명의 유능한 지방 수령이 있으므로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 정탐 기병 5,60명을 은밀히 침투시킨다는 조항도 지금은 적절치 않으며 전쟁에 돌입했을 때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도내 정병 수백 혹은 수천 명을 뽑아 적의 소굴을 수색하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작년 귀화한 동두리불화의 정보로 볼 때 이만주 일당은 분명히 올라산 오미부 근처에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9월 초순이나 8월 하순 일을 감행하면 된다고 수정 제안했다. 며칠 뒤 이천이 작전계획을 서울로 보내왔다(세종 19년 7월 17일). 공격개시 시점만 8월 20일과 9월 초순과 중순 셋 중에서 정해 주시라고 요청했다.  

 

세종은 이천이 보내온 전투계획을 도승지 신인손과 좌부승지 김돈과 참찬 신개 세 명에게 의논하게 한 뒤 그 결과를 이천에게 말했다. 첫 번째 전략인 8월 10일 먼저 50, 60 여명의 척후병으로 습격한 뒤, 8월 20일 대군으로 진격한다면 적군이 다 알고 도망칠 것이므로 상책이 아니라 하책이라는 점과, 작전 개시 시점에 관해서도 어떻게 결정하기가 어려우니 이천이 현장에서 잘 판단해 결정하라고 지시했다. 전략은 충분한 토론 끝에 수립되었고 현장에서는 평안도 도절제사와 도관찰사가 모든 준비를 착실하게 진행했다. 세종은 다시 한 번 도절제사 이천에게 편지를 띄워 주의를 환기시켰다. 

 

   “대저 토벌에는 소탕이 최고다. 경이 그것을 잘 알아 작량 시행하라. 

     (大抵討伐 掃盪爲最 卿其知之 酌量施行 : 세종 19년 8월 14일)”

 

오랑캐 토벌작전은 9월 초 7일 개시됐다. 군사는 최종적으로 세 갈래로 나누기로 하고 좌군은 이화의 지휘 하에, 우군은 정덕성의 지휘 하에 산양회에서 압록강을 건너갔다. 중군은 도절제사 이천의 지휘 아래 만포구자에서 압록강을 건넜다. 좌우 군사는 11일에 올라산 서남방 고음한 지방으로 진격해 들어갔고 이천 휘하 중군군사는 오자점으로 나아갔다. 13일 새벽 우군과 이천의 군사가 합류하여 오미부를 포위하였으나 적은 이미 도피한 뒤였다. 도절제사 군대는 즉시 후퇴했고 우군은 남아 좌군과 합류했다. 여러 번 적의 기습을 격퇴하였고 그 다음날 14일 모두 퇴각하여 16일 모두 본진으로 돌아왔다. 적 포획 60명에 아군 피해는 사망 1명이었다. 이천의 승전급보는 보름 뒤 서울에 도달했다(세종 19년 9월 22일).

 

[이천의 귀양]

 

이천에 대한 견제는 여러 번 있었다. 세종 13년 10월 지신사 안숭선은 군기감제조 이천과 최해산이 불의한 짓을 많이 해 청렴하지 못하므로 교체해야 한다고 지적한 적이 있었다. 세종은 안 된다고 말렸다.

 

   “군기의 일을 타인이 어찌 그 두 사람의 재주와 능력을 따라 가겠는가.

    교체하면 안 된다.  

    (軍器之事 他人安能及二人材巧 姑勿遞 : 세종 13년 10월 13일)”  

 

또 야인들의 동태를 염탐하는 것을 사냥하는 것으로 밀고당한 적도 있었다.  세종이 인정하지 않아 죄를 받지는 않았지만 파저강 전투에서 동생 이온이 부정한 방법으로 전공을 올렸다고 해서 탄핵을 받은 적도 있었다. 즉, 거마대라는 야인의 공적을 거짓으로 이온의 공적으로 바꿔치기 했다고해서 탄핵을 받았다(세종 21년 2월 23일). 그러나 세종이 이를 인정하지 않아 죄가 성립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끈질기게 이천을 모함으로 몰아가는 세력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천의 공을 폄하했다가 벌을 받은 노한이나 황희와 같은 일부 의정대신들이 이천을 박대한 것은 사실이다.  

 

평안도 도절제사가 되어 4년 동안 제2차 파저강 전투를 비롯하여 뚜렷한 무공을 세운 이천에게 인생 최대의 시련기가 다가왔다. 올량합 오랑캐 2백여 명이 조명간 구자에 침입하여 사람 7명과 소와 말을 여럿 탈취해 간 사건이 발생했다(세종 22년 4월 23일). 평안도감사의 보고를 받은 병조는 즉각 병조좌랑 김광수를 보내 조사한 결과 도절제사 이천을 비롯하여 도사 황보공과 도진무 박눌생 여연절제사 유강 등 관련자 전원을 처벌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세종은 우의정 신개와 우찬성 하연을 불러 이렇게 물었다.

 

   “이천이 평안도에서 말할 만한 죄가 없는데도 물의가 분분하니 장차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까. (李蕆之於平安道 無罪可聲 而物議紛紛 

    將何以處之 : 세종 22년 6월 20일)” 

 

신개와 하연이 파면함이 옳겠다고 대답하자 세종은 알았다고만 했다. 병조에서도 율에 따라 이천을 파직시켜야 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의정부에서는 파직만으로는 약하므로 후세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 귀양을 보낼 것을 요청했다. 세종은 이천을 천안으로 귀양 보냈다(세종 22년 7월 22일). 물론 5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 이후 이천은 약 10여 년을 원로회의 격인 중추원부사로 조용히 재직했으며 문종 1년(1451) 11월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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