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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27>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⑦김종서[金宗瑞(1383-1453), 시호 忠翼公](下)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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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7월08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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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읍성이냐 장성이냐] 

 

은퇴로 빠진 영의정 황희를 제외한 대신 여섯 명을 모아 놓고 세종은 장성(長城)과 읍성(邑城) 중 어느 것을 먼저 지어야 하는지를 물었다. 대신들의 의견이 갈렸다. 좌의정 하연과 좌찬성 박종우와 좌참찬 정분과 우찬성 김종서는 읍성을 먼저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큰 도적들이 몰려오면 작은 둑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읍성으로 급히 피해야 하므로 당연히 돌로써 크게 쌓아 사람들로 의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먼저 읍성을 쌓자고 했다. 우참찬 정갑손이 반대하고 나섰다. 장성공사가 거의 끝나 가니 중도에 그만 둘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경원, 회령 및 경흥읍성은 이미 돌로 되어있으며 종성과 온성 읍성은 비록 흙으로 된 성이기는 하지만 매우 견고하므로  당연히 장성을 건축해야 한다고 했다. 우의정 남지는 엉뚱하지만 요점을 찌르는 안을 들고 나왔다. 회령들판은 적들이 침입하는 가장 긴요한 길이므로 이곳을 먼저 성을 쌓아 요새처럼 방어한 다음에 돌로 읍성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세종은 이 세 안들을 훌륭하게 종합하는 대안을 제시했다.  

 

   “만약 읍성을 돌로 쌓으면 민력이 부족하여 십년이 되도록 못 끝낼

    것 같다. 지난 번 하경복 말이 ‘목책으로도 적을 방어할 수 있다’고

    했는데 경들은 목책으로는 적을 방어하기에 어렵고 석축만 못하다고

    하니 그렇다면 민력이 부족하더라도 반드시 일을 일으켜 장성을 

    쌓아야 하겠지만 만약 목책으로도 적을 방어하기가 가능하다면 

    적로의 요해처에만 장성을 축성하면 어떻겠는가.    

    (若石築邑城民力不足 雖至十年似不能 昔河敬復云 ‘木柵亦足禦敵’ 

     卿等以爲 木柵不能於大賊 莫如石築 若然則雖民力不足 必須大擧 

     若木柵猶足禦敵 則賊路要害 畢築長城如何 : 세종 30년 3월 7일)”

  

 

민력의 부족이라는 한계점을 극복하면서 동시에 방어의 핵심을 지키는 방법은 ‘적로의 요해처’에 장성을 축성하는 것 아닌가. 세종은 훌륭하게 절충하였다. 

 

[요동변란 : 달단(韃靼)의 위협] 

 

명나라 영락제가 몽고의 한 부족인 달단(韃靼 혹은 達達)과 싸우다 전사하는 변고가 발생하자(세종 6년 8월, 1424), 조선 조정은 달단에 대해 매우 긴장하기 시작했다. 명나라가 패배할 정도면 달단의 위력은 무서운 것이 분명했다. 달단이 직접 공격해 오는 것도 문제였고 명나라가 달단을 친다는 명분으로 군병을 요구해오는 것도 문제였다. 달단족은 몽고의 한 부족으로서 탈환(토곤,脫歡)이라는 자가 실권자였고 그 아들 야선(에센,也先)이 후계를 이어 받아 압록강 이북은 물론 명나라 북쪽 지역을 위협하던 세력이었다.

    

세종 29년 6월에 평안도 감사에게 세종은 특별한 지시를 내렸다. 야선의 대군이 황하강 유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어 언제 어디로 공격해 올지 모르니 준비해두라는 지시였다.

 

   “내가 생각해보니 이미 세 위(衛)를 격파했고 서해의 여러 부족들을 

    섬멸하고자 하므로 야인들이 겁에 질려있어 편안히 살 수가 없다.

    그 세력이 여러 방면으로 확장되어 저렇게 강해진다면 장래의 변은

    제대로 다 알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경은 내 이 뜻을 은밀히 알고

    즉각 방어할 모든 준비를 갖추며 미리 조치해 두도록 하라.     

    (予料也先旣滅三衛 欲殲海西諸種 野人莫不畏懼 不敢寧居 蓋其勢方張 

     如此其盛 將來之變 難易盡知 卿密知此意 一應防禦諸事 預愼布置 

     : 세종 29년 6월 27일)”      

 

세종은 의정대신들과 병조의 고위관료를 불러 함께 대책을 의논했다. 마병을 보낼 수가 없으니 어떤 대책이 좋을 지 물었다. 황희, 하연, 황보인 등 대부분의 의정대신들은 도절제사가 보고하기를 기다려보자고 했다. 그러나 좌찬성 박종우와 우찬성 김종서는 의견이 달랐다. 연변의 군과 성들 중에서 인원이 넉넉한 곳은 그대로 두되 부족한 곳은 남쪽 병력을 이동시켜 보충하자고 했다. 황희 등은 평안도 군량비축이 여의치 않으니 확실한 정보를 좀 더 기다려 보고 결정하자고 했다. 좌의정 하연이 절충안을 내 놓았다. 적변은 예측하기가 어려우므로 첩보를 기다리는 것은 늦다고 했다. 미리 군사와 군량을 보내는 것도 어렵다. 그러므로 하삼도에서 이백 호 당 한 명씩 군정을 차출해서 관에서 의복과 군량을 제공하고 해빙기에 한해 방어를 위해 보내시고 끝나고 돌아오면 직책을 주자고 건의했다(세종 29년 10월 29일).

 

남쪽의 하삼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군사를 옮겨 보내는 것 이외에는 대신들의 의견이 일치를 보지 못하고 여러 갈래로 의견이 갈리었다. 의정부는 의견들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세종 29년 10월 29일).;

 

   (i) 평안도 국경지역의 군읍을 둘(兩界)로 나눌 것 :    

            - 강계도 : 위원, 자성, 우예, 여연, 무창  

            - 삭천도 : 이산, 벽동, 창성, 정녕, 의주, 인산 

 

   (ii) 각 도에 2품 절제사 및 판관을 두며,

 

   (iii) 도절제사의 영은 영변에 두고 판도호부사를 겸하며 총감독 할 것.   

     

야선의 군대가 점점 다가오자 세종은 함길도 도절제사에게 긴급히 지시를 내렸다(세종 30년 2월 26일).

 

    (i) “가까운 믿음직한 야인들로부터 다시 첩보를 입수하여 보고하라.

        대개 첩보없이 군대를 모으는 것은 아예 불가능 한 일이다. 

        (更於親信野人 細聞聲息以啓 夫末聲息 預聚軍卒 固不可也)”

 

   (ii) “연대에서 망을 보고 봉화로 방비하는 일을 더욱 신중히 할 것이며

       연변에 거주하는 농민의 농사 또한 예전과 같이 부과하고 권면하라.

       (姑將烟臺候望 烽火防守等事 益加謹愼 沿邊居民農務 亦仍舊勸課)”

 

평안도 도절제사에게도 같은 지시를 내렸다.

 

   “적이 일으키는 변란은 형체가 없어서 우리 백성들을 먼저 피곤하게 하      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따로 병마를 징발하지 말 것이며 예전과       같이 척후병을 보내고 봉화를 신중히 하며 변방 백성이 농사를 실기하      지 않도록 하라. (賊變末形 而先困吾民 固非良策 毋得別徵兵馬 仍舊遠斥      候謹烽火 邊民耕種 亦毋令失時 : 세종 30년 2월 26일)”

세종 31년 7월 말에 요동에서 드디어 사태가 발생했다. 통사 이유덕의 보고에 따르면 7월 20일에 야선의 병마가 요동의 장성을 뚫고 들어와 광령총병관의 군졸 1천명과 말 8천 필을 빼앗고 요동과 광령까지 참로가 모두 야선의 손안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 날 밤 새벽(2고)에 소식을 들은 조정은 즉시 의정부와 병조 및 도진무의 긴급회의를 개최했다(세종 31년 8월 2일).

좌의정 하연의 제안에 따라 마련된 대책은 다섯 가지이다. 

 

   (i) 통사를 보내 정찰활동을 강화할 것 : 김지안과 강문보를 파견할 것, 

   (ii) 변장이 경비를 특별히 강화할 것,  

   (iii) 믿을 만한 야인의 첩보 탐지를 깊이 할 것,

   (iv) 전국의 인재를 거용할 것 : 이징옥, 이징석, 박이령, 하한을 소환할          것, 

   (v) 성의 축조를 일시 중단할 것 등이었다.    

 

세종은 이 대책이 미덥지 않았던지 평안도 도절제사와 관찰사를 겸하고 있는 한확을 두고 별도의 새 절제사를 보내야 할 것인지 아니면 한확으로 도절제사를 하게하고 새 도관찰사를 보낼 것인지를 의논케 했다. 의견은 갈렸다. 한확으로 도절제사를 하게 하자는 의견은 좌의정 하연, 좌찬성 박종우, 도진무이견기 및 김하 네 명이었다. 한확으로 도관찰사를 하게 하자는 쪽은 도진무 정효전과 우찬성 김종서, 좌참찬 정분, 우참찬 정갑손 병조판서 민신 병조참판 박중림으로 여섯 명이었다. 임금은 의견의 일치가 되지 않자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다. 

 

함길도에는 이미 도절제사 권맹손이 있으니 평안도 도절제사를 누구로 하느냐가 문제였다. 좌의정 하연은 박종우와 김종서와 이징옥을 천거했다. 임금은 김종서를 평안도 도절제사로 결정하고 박종우를 함길도 도체찰사로 임명했다(세종 31년 8월 2일). 김종서는 함길도에서 돌아온 지 9년 만에 다시 변방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북방 달단의 위협은 곧 사라졌다. 김종서가 평안도로 파견되고 6개월 만에 세종은 김종서에게 명령을 내렸다.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오라. (率軍士上來 : 세종 32년 2월 11일)”

 

이 지시가 세종이 김종서에게 내린 마지막 명령이 되었다. 6일 뒤 김종서가 돌아오는 도중 세종이 승하한 것이다(세종 32년 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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