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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24>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⑥변계량[卞季良(1369-1430), 시호 文肅公](下)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2년06월17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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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변계량과의 세종의 의견차이]

 

세종시대에 들어 죽을 때까지 변계량이 좌천되거나 파면된 일이 없다고 해서 세종과의 관계가 원만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여러 차례 임금과의 의견 차이를 보였다. 예를 들어 태종의 국상 중에 과거시험을 볼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가 발생했다. 변계량을 위시하여 이원, 정탁, 유관 등 대부분 대신들은 반대했다. 오직 예조판서 김여지만 과거를 보는 것이 해로울 것이 없으므로 폐하지 말자(無害於義 不可廢也)고 했다. 임금은 과거를 보는 쪽으로 결정했다(세종 4년 10월 18일). 또 세종 6년에 사헌부는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뇌물수수관행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변계량은 음식을 주고받는 정도는 무방하니 금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세종은 달랐다.

 

   “그래서 내가 법을 세워  뇌물 받은 자나 준 자나 같은 죄로 다스리려

    하니 특별히 교지를 내리는 방법이 좋은가 아니면 영을 내려 유사로 

    하여금 법을 만들어오도록 하는 것이 좋겠는가.(故今欲立法 使受者與與  

    者同罪 特下交之乎 令攸司啓聞立法乎 : 세종 6년 7월 14일)”

 

또 화재가 빈발하고 도둑이 성행하여 백성들 생활이 매우 어려워졌다. 임금은 이런 재변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했다.

 

   “옛일을 생각해 보면 천재가 있고 인재가 있다. 사람의 일이 아래에서

    감동시키면 하늘의 변화는 위에서 반응하는 것이 정한 이치이다. 

    (稽之於古 有天災者 有人災者 大抵人事感於下 則天變應於上 理之常也

    : 세종 8년 2월 26일)”

 

그러니 화재나 도둑과 같은 인재(人災)를 없애기 위하여 사람이 할 일을 적극적으로 노력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변계량의 생각은 다른 데 있었다. 최근에 재난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국가가 너무 많은 법을 만들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전법(錢法)을 만들어 강제로 화폐(저화 및 동전)만을 사용하게 하면 백성들로는 너무 불편하며 이것이 화가 되어 범죄나 화재발생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법이 꼭 필요하다면 관청에서만 화폐를 쓰도록 할 것이고 민간거래는 자유롭게 돈이든 물품이든 놔두자고 건의한 것이다(세종 8년 2월 26일). 세종은 이렇게 지적한다.

 

   “(건의문을 보니) 그 취지는 아름답다만 법을 세우는 것은 백성들에 

    대한 믿음을 보이기 위함이지 어찌 백성들이 좋거나 싫다고 한다고 

    바꿀 수가 있겠는가. 동전법을 관청에만 적용하고 민간에는 적용하지 않  

    는다는 것은 바로 백성에게 대한 믿음을 보이지 않는 것 아닌가.(중략)

    이번에 전법에 있어서 불가하면 그만두면 될 것이지 어찌 이와 같이 

    번거롭게 변경하자는 것인가.     

 

    (觀其辭旨 意則美矣 然立法 所以示信於民也 豈可以民之好惡 以更改之

    錢幣之法 獨行於官府 以不行於民間 則非所以示信於民也 (中略) 

    今錢法之行 可已則已 如其用之 何若是其紛更乎 : 세종 8년 2월 26일)” 

  


[세종의 신임]

 

비록 다소간의 의견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세종은 변계량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변계량은 궁성을 시위하는 군사들의 기강이 최근에는 매우 해이해졌다고 생각했다. 국내외 변란도 없이 무사하다보니 농사철이니 흉년이니 하면서 빠졌다. 더우면 덥다고, 추우면 춥다고 경비를 소홀히 빼먹고 또 군사를 3교대 혹은 4교대로 갈라 농사일을 돕도록 하는 것도 문제로 생각했다. 판우군 도총제부사 변계량이 임금께 계를 올려 말했다.

 

   “그것은 정말로 전하의 휼민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난과 전염병과  

    같은 환란은 항상 전혀 생각지 못한 때에 발생합니다. 어찌 잠시 안정됨   

   을 믿고 경비방어를 허술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단, 휼민의 문제는 다   

   른 방법으로 하셔야 합니다.

    (此誠殿下恤民之心 禍患每生於不虞 豈可姑 

    恃安靜 以弛備禦乎 但當以他術存恤耳 : 세종 10년 윤4월 27일)”    

 

세종은 변명하고 싶었지만 그대로 사실을 인정했다.

 

   “근래에 이완된 것은 흉년이 져서 그런 것이지 고의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경의 말이 옳다.

    (近來緩弛 非故爲之也 但因年 嫌耳 卿言是也 : 세종 10년 윤4월 27일)”

 

종이 주인을 죽인 일이 있었다. 임금도 사헌부도 형벌을 가중하는 법을 세워야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러나 변계량 생각은 매우 깊었다.: “정치는 명분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주인과 종의 높고 낮음도 명분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법을 세움에 있어서 당연히 윗사람을 존경하고 아랫사람을 억제해야겠지만 이런 가혹하게 다스리는 법을 세우시면 아랫사람들은 주인이 종에게 잘못된 형벌을 내려도 끝내 종이 죄를 덮어 쓸 것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종들이 도리어 더 횡역한 일을 저질러 최악의 폐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자도 말했습니다.: “살인이 중한 죄라지만 노비를 죽이는 것 또한 어찌 가볍다 하겠는가.” 최근에 잘못된 형벌로 사람이 죽었습니다. 비록 법을 만들지 않더라도 있는 율로 처단하면 될 것인데 어찌 어렵다는 말씀을 하십니까(세종 8년 12월 8일).”

  

세종은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호패법 문제]

 

호패(號牌)란 열여섯 살 이상 되는 남자가 차는 긴 패로써 앞면에는 관직명, 이름, 주소, 얼굴색과 특징 등을 기록하고 뒷면에는 관인을 찍었다. 호패의 목적은 서민과 천민을 포함하는 모든 백성의 거주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유랑하는 사람의 수를 없앰과 동시에 부역의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동원함에 목적이 있었다. 태조 7년(1398)에 처음 제안되었고 태종 4년에 하륜의 주도로 다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매우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에 오랜 기간 논의만 하고 정하지 못하다가 황자후의 요청을 듣고 결국 시행하기로 한 것이다(태종 13년 9월, 1413). 그러나 그 후 거듭되는 가뭄으로 경제사정이 열악해 지면서 유민이 급격히 늘어났고 호패법을 위반하는 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렇다고 그 죄를 물을 형편도 되지 못하므로 실시한지 3년도 안되어 사실상 폐지했던 것이다(태종 16년 5월 12일).

 

세종 때 처음으로 호패법의 재시행을 들고 나온 사람은 영의정 유정현이었다(세종 3년 5월 11일). 그러나 호패법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세종은 가을이나 지나서 다시 논의해 보자고 하고 뒤로 미루었다. 유정현이 처음 문제를 거론한 지 5년이 지나서 세종이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은근슬쩍 호패법의 의도를 내비친 것이다. 얼핏 듣기에는 반대하는 것 같지만 아니었다. 

 

  “지난번에 대신들이 호패법시행을 다시 청하였다. 그 법은 이미 태종 때   

  실시했던 법이나 백성들이 원치 않아 결국 폐지했다. 나는 새로운 법을

   시행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니 만약 다시 시행한다고 하면 백성들의 원   

   성이 두렵다.   

   (向者大臣 請復立號牌之法 此法太宗時己行 以民之不願 以遂除之

   予不喜立新法 今若復行 恐民之怨咨也 : 세종 8년 12월 8일)”

 

변계량의 지론은 강경했다. 천하의 주인은 천하의 호구를 알아야 하고 한 나라의 주인은 그 나라의 호구를 알아야 하며 한 고을의 주인은 그 고을의 호구를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백성들이 좀 불편하다고 해서 정치의 근본을 저버릴 수는 없다는 게 계량의 요지였다.: “대저 백성이 꺼리는 바 있더라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법이 있고 백성이 쫓아갈 만큼 좋아하더라도 실시할 수 없는 법이 있습니다. 지금 호패를 싫어하는 백성들은 적에 올라있지 않아서 부역을 피하기를 꾀하는 자들 입니다. 호패법은 의당 실시해야 합니다(세종 8년 12월 8일).” 

세종이 듣고 보니 그럴 듯 했다. 그러나 세종 재위 시에 호패법이 단행되지는 않는다. 이어지는 재해로 백성들이 많이 피폐해 있는데다가 저화법, 공법, 북방정벌 등 훨씬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들이 앞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호패법은 결국 아들 세조의 몫이 되어 세조 5년(1459) 2월 1일 단행된다. 처음 건의 되었던 태조 7년(1398) 1월 이후 꼭 60년 만의 일이다.  

 

[한국적 선비 변계량]

 

변계량은 어떤 의미에서는 유가(儒家) 선비라기보다 토착신앙 신봉자였다. 은나라 시절 고조선으로 망명 온 기자의 귀신을 믿어 태종과 함께 귀신을 감응시키는 방법을 논하기도 하였고(태종 18년 3월 4일:1418),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천제사를 지내기를 여러 번 태종께 건의한 적도 있다. 특히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이 있으면 반드시 하늘에 제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신하들은 천자의 나라가 아닌 조그만 제후 나라 조선의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참람한 것이라 반대했다. 세종도 냉담했다.

 

   “참람한 예라 불가하다.(僭禮不可行也 : 세종 1년 6월 7일)” 

 

그러나 변계량은 강력하게 반박했다.: “전조 2천년 계속해서 하늘에 제사하였으니 이제 폐함이 불가합니다. 더구나 본국의 강토가 수 천리여서 옛 사람이 말하는 수 백리 제후국과 비교가 안 됩니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데 꺼릴 것이 무엇입니까(세종 1년 6월 7일).” 변계량은 조선이 제후국이 아니라 막강한 대국이며 더욱이 이천년 동안 이어져 오는 우리만의 전통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단군시조는 중국의 천자가 책봉한 것이 아니고 요임금 시절 무인년에 하늘의 손자로 내려 온 것이니 당연히 그 후손인 조선은 스스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의무라는 것이 계량의 생각이었다. 세종은 감탄했다.

 

   “하늘에 제사 지낼 날을 정하라.(擇祭天之日 : 세종 1년 6월 7일)”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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