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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15>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① 황희[黃喜(1363-1452), 시호 翼成公, 배향공신] (下)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2년04월15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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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세자의 섭정문제]

 

세종 24년 5월 눈병이 심해지자 세종은 영의정 황희와 예조판서 김종서, 도승지 조서강을 불러 세자(珦:문종)에게 업무를 넘기는 문제를 논의했다. 

 

   “내 눈병이 날로 심해져 중요한 업무를 친히 결단하기 어려우니

    세자로 하여금 서무를 보도록 하고자 한다. 

    (予之眼疾日深 未得親斷機茂 欲令世子處決庶務 : 세종 24년 5월 3일)”

 

황희 등 대신들은 안 된다고 했다. 첫째, 연세가 아직 한창이시고 둘째, 나라 온 신민들이 실망할 것이며, 셋째, 후세에 모범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끝으로 중국이나 여러 이웃나라가 어떻게 생각하겠냐는 것이다. 세종은 뜻을 철회하기로 했다.

 

   “경들의 말이 그러하니 내 다시는 그 말을 꺼내지 않겠다. 

    (卿等之言如是 予不復言 : 세종 24년 5월 3일)”

 

그리고는 조용히 도승지 조서강을 불러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내 눈병이 이제 십년이 되었으며 최근 5년 동안 더욱 심해졌다.

    처음 병이 생겼을 때에는 이렇게 심해질 줄 몰라 휴양에 힘쓰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연전에 온양 목욕을 다녀 온 후 조금 효험이 있어

    장차 나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금년 시월 이후 다시 과거로 돌아

    갔으니 종묘에 직접 제사를 드리려 해도 이제 절망적이구나.(중략)

    보는 일을 좀 줄이고 눈을 이삼년 휴양시키면 좀 낫지 않겠는가.

    (중략)또 일가 중에서도 가장에 유고가 생기면 장자가 대행하는데

    더구나 임금의 후계자요 임금 다음이니 종묘의례와 강무의 일을 

    세자가 대행해도 무방할 것이다. 너는 내 이 뜻을 대신들에

    상세히 알려 잘 알도록 하라.

   

    (予患眼疾 今己十年 而近來五年尤甚 當其初患之時 不知至於此極

    不善休養 予今悔之 年前溫陽沐浴後 證候稍有 意謂從此痊癒矣 

    自十月以後 亦復如前 雖欲親祭宗廟 己絶望矣 (中略)

    減其視事 休養目力 延二三年不猶愈乎(中略) 

    且一家之中 家長有故 則以長子代行 況世子 國儲君副 宗廟之祭 

    講武之事 使世子代行 固無妨矣 爾將此意 詳告大臣 使之知悉

    : 세종 24년 5월 3일)”

 

이 당시 세종의 병환은 매우 심했다. 10년을 앓아 왔고 최근 5년 동안 더 심해져 좀 쉬면 나아질 것으로 생각하고 세자에게 번잡할 사무를 위임하려고 했는데 신하들이 한사코 못 하도록 말렸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다시는 그 말을 꺼내지 않기로 약속은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불편한 세종은 도승지를 불러놓고 그 꽉 막힌 속내를 털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세종의 약속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일 년이 지나 세종이 다시 세자섭행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번에는 지난 번 보다 훨씬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저번에는 대신들의 의견을 물어보고 의논을 했지만 이번에는 그게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형식이었다. 먼저 고사(古史)를 들고 나왔다.

 

   “임금이 늙고 병들면 세자가 정사를 섭행하는데 이것은 고례이다.

    현재의 왕정제도에도 ‘온 천하가 황태자의 신하이다.’ 라고 했고 통전

    에도 ‘태자가 사해를 신하로 삼는다.’고 했다.

    (國君老病 世子攝行事 此古禮也 時王之制 天下稱臣於皇太子 

    通典 亦曰 太子普臣四海 : 세종 25년 4월 17일)”

 

물을 것도 없고 따질 것도 없이 앞으로 세자에게 섭행을 시키겠다는 것이다. 초1일과 16일 아침 조례를 제외한 모든 조참을 세자가 대행하며 인사와 재판 및 군사에 관련된 일은 세종이 맡되 그 나머지 서무는 세자가 처리한다는 것이다.

 

먼저 승지 여섯 명이 대경실색하며 탄식했다. 무식한 자기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발을 굴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의정부 대신들도 나서서 반대의견을 올렸다. 작년에 올린 반대 이유와 같은 것이었다. 세종 전하의 춘추도 한창이시고 또 세자가 남쪽을 향하여 신하를 대하는 예가 고금에 없다고 막아섰다. 임금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내가 교지를 내린 까닭은 경들로 하여금 가부를 의논하자고 한 것이

    아니다. 대신들은 당연히 원대한 계획을 의논하는 것이지 소신들의 

    업무를 가지고 ‘품격높은 토론(고론,高論)’을 하는 것이 아니다.  

    (予下敎旨 非使卿等議其可否也 大臣當爲遠大之謀 不可如小臣之務 

    爲高論也 : 세종 25년 4월 17일)”

 

예조판서 김종서 등 육조 판서와 참판들이 다 반대하고 나섰지만 세종도 물러서지 않았다.

 

   “대사를 어찌 의견합치를 보고 단행하는가. 마음에 이미 결심이 섰다.  

    (大事 豈可議合而後爲之 予當內斷於心耳 : 세종 25년 4월 17일)”

 

영의정 황희 등 의정부 대신과 호조판서 박종우 등 육조판서들이 모두 세자가 남면하여 신하를 대하게 하는 것은 예법상 전례가 없던 것이라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세종은 확고부동했다.

 

   “만약 들어 줄 수 있는 일이면 의정부 단독으로 청해도 당연히 듣겠지만      

    만약 들어주지 못할 것이면 의정부와 육조가 다 와서 청해도 어찌 들어

    줄 수 있겠는가.

    (事若可聽 雖政府獨請 予當聽之 若不可廳 雖政府六曹盡來請之 

    其可聽乎 : 세종 25년 4월 17일)”

 

의정부 및 육조 대신들이 그러면 인사나 재판이나 군사의 세 가지 일을 제외한 모든 서무를 세자에게 맡긴다고 하지 마시고 그냥 ‘큰 일(범칭대사,泛稱大事)’을 제외한 서무만 세자에게 맡기시겠다고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또 인사, 재판 및 군사의 세 업무가 실제로 대사를 다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 큰 일이 있다면 어찌 내가 모르겠는가.

    다 의정부와 의논해서 결정할 것이다. (且用人刑人用兵數語 實包大事

    然此外大事 予何不知 予與政府議定耳 : 세종 25년 4월 17일)”

 

육조 신하들이 다 나가고 난 뒤, 황희 등 의정부 신하가 남아 반대했지만 임금이 마지막으로 선언했다.

 

   “내 병이 이미 심해져 다시는 정사에 매진할 방법이 없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국정을) 그렇게 소홀히 걱정되게 할 수는 없다.    

    (予病己深 更無勤政之理 爲國不可如是其疎虞也 : 세종 25년 4월 17일)”

   

이렇게 해서 중요한 일을 제외한 업무는 문종이 처결하는 체제가 되었다. 세자가 업무를 처결하는 동안에도 중요한 국사는 세종이 처결했다. 세종 25년과 세종 26년에 걸쳐 왜인의 약탈사건, 들끓는 도적문제, 토지법 개정문제, 공법 문제 등 첩첩히 쌓인 현안문제 해결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세종 26년 12월 다섯 째 아들 광평대군(1425.2-1444.12)이 죽자 임금은 아예 연희궁으로 거처를 옮겼다(세종 27년 1월 2일). 그 다음해 1월 16일에는 일곱 째 아들 평원대군이 크게 앓더니 죽었다. 두 아들 모두 열아홉의 나이로 사망하자 임금은 크게 낙담했다. 며칠을 굶으며 애통해 했다. 오랜 병고에 시달리던 터에 두 아들마저 연거푸 죽게 되자 절망적인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종은 그것이 하늘이 도와주지 않음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근년에 수해와 한해가 수차례 이어 발생하고 또 내 고질 병이 실타래

    처럼 나를 옭아매고 있는데다 두 아들을 이어 잃었으니 이는 분명히 

    하늘이 돕지 않음이다. (近年水旱相仍 且予宿疾纏綿 連喪二子 

    天之不佑也明矣 : 세종 27년 1월 18일)”  

 

하늘이 세종을 돕지 않으니 이제 왕위를 물려 줘야할 때라고 생각했다.

 

   “질병으로 인하여 조례도 못받고 인근국 사신도 접견하지 못하며

    제사흠향도 직접 못하고 구중 깊은데 들어박혀 모든 일을 환자에게

    명을 전달하여 처리하다 보니 착오가 많다. 임금의 직이 과연 이래서야

    되겠는가. 이제 세자가 즉위하여 일을 처리하고 나는 물러가되 군국의 

    중대사는 직접 처단하겠다.    

    (因疾不受朝 又不見隣國之使 祭享香祝親傳 深居九重之內 

    凡事皆令宦者傳命 錯誤者多 人君之職 果如是乎 欲今世子卽位治事 

    予則退去 軍國重事 予將親斷 : 세종 27년 1월 18일)”

 

좌의정 신개 등 의정부 대신들이 밤늦도록 물러나지 않고 불가하다고 버티므로 임금이 할 수 없이 물러섰다.

 

   “그렇다면 오늘은 내 그 대들의 청함을 일단 따르겠다.  

    (然今日則姑從卿等之請 : 세종 27년 1월 18일)”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끝이 아니었다. 세종이 넉 달 뒤 이 문제를 다시 들고 나섰다.

 

   “지난 번 세자에게 선위(禪位:왕위를 물려 줌)하고 한가히 병을 요양

    하고자 하였으나 경등이 눈물로 호소하기에 할 수 없이 따랐다.  

    그러나 반복해 생각해 보니 번잡한 서무를 모두 직접 처리하다보면

    반드시 다른 증세가 나타날 것이 매우 염려가 된다. 영을 내려 군사와

    나라에 중대한 문제를 제외하고 모두 세자가 처리하도록 하고자 한다.

   

   (向者予欲禪位世子 閑居養病 卿等泣請不己 勉從之 然反覆思之 

    煩碎庶務 一皆親斷 則必生他證 予甚慮焉 今欲軍國重事外 

    一應庶務令世子代治 : 세종 27년 5월 1일)”

 

황희가 앞장서서 반대하고 나섰다. 사실 상 왕이 두 명이 되고 그러면 명이 두 군데서 나오므로 혼란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을 그렇게도 못 알아듣다니 세종으로서는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세종이 버럭 화를 냈다.

 

   “이전에 세자로 대신 다스리고자 함은 내가 몸을 보호하기에 급급하여

    나온 조치이다. 경들은 어찌 내 병을 생각하지 않고 억지주장만을 늘어      

    놓는 건가.(今世子代治 是予汲汲保身之意也 卿等何不料予病而强說乎 :

    세종 27년 5년 1일)”

 

그제야 황희는 세종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러면 잠시나마 임금님의 뜻에 따라 시행 하십시오.

     (姑依上旨施行 : 세종 27년 5월 1일)”

 

이렇게 해서 세자 향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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