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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하지만 인성이 모자라는 군주의 병폐 : 중국 고대사에서 배운다 <1> 하(夏)나라의 혁련발발(상)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2년02월13일 16시5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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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국의 고대 역사는 수많은 민족과 크고 작은 많은 나라들이 어우러져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반복해왔다. 그 중심에는 항상 최고지도자인 ‘왕(王)’이 자리 잡고 있다. 군주(君主)의 자질과 능력, 인성과 성품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좌우됐던 것이 역사에 기록된 사실(史實)들이다. 유능하지만 인성이 모자라는 군주도 있고, 인성이 출중하지만 능력이 모자라는 군주도 있었다. 물론 자질도 우수하고 인성도 훌륭한 군주도 있었다.

오는 3월 9일 제20대 대통령을 뽑는 대선을 30여일 앞두고 후보자들에 대한 자질과 능력, 인성과 성품, 그리고 가족을 둘러싼 갖가지 의문들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 고대(古代)역사에서 나라를 일으켜 세운 군주는 어떤 사람이었고,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없는가? 특히 유능하지만 인성이 모자라는 나라를 망친 군주의 사례는 없는가? 통일 국가로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통치 기간을 지닌 왕조, 한(漢)나라 이후 혼란기의 역사에서 그 사례를 찾아보기로 한다.​

 

<1> 생명의 은인인 장인을 죽인 하나라(AD407-AD431)의 혁련발발

 

(1) 철불 흉노족의 나라 하(夏)나라

 

하나라는 AD407년 흉노족의 일파인 철불흉노(鐵弗匈奴)가 세운 나라다. 후한 시대 흉노가 남북으로 분열되면서 북흉노는 몽고 사막일대에 남아 중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남흉노인 철불부는 지금의 내몽고 서남부지역 일대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면서 때로는 한(漢) 혹은 서진(西晉)과 같은 중국 조정에 복속되기도 했고 또 때로는 독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중국과 분리되기 보다는 중국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은 민족이다.

 

철불 흉노부의 선조는 한-위-오 삼국 시대 흉노의 지배자 즉 선우였던 어부라(於夫羅)의 조카뻘인 철불 우현왕(右賢王) 거비(去卑)다. 그는 조조(曹操)의 신임을 받아 남흉노를 관할하였으며 대략 이 때부터 한나라 유씨(劉氏) 성을 사용하였다. AD310년 거비의 손자 유호(劉虎)가 선비족(鮮卑族)이자 나중에 대(代)나라를 세운 탁발부(拓跋部)에게 본거지인 산서 일대를 빼앗기자 다시 본거지인 오르도스 지방으로 옮겨와 할거하면서 전조(前趙), 후조(後趙), 전진(前秦)에게 차례로 협력하였다. AD341년 유호가 죽고 그 아들 유무환, 그리고 AD356년 유무환이 죽고 그의 동생 유알두가 유무환의 두 아들, 즉 조카 유실물기와 유위진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유알두는 선비족 나라인 대의 탁발십익건에 굴종함으로써 철불흉노는 사실상 대의 복속국이 된 셈이다.(AD356)


(2) 유연부족 욱구려씨와 유위진 피살(AD391)

 

부견이 대를 멸망시켰지만(AD376)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하면서 전진이 몰락하는 공백을 틈타 AD391년 북위 탁발규가 일어나면서 대부분의 유목민족들이 북위에 복속했다. 그러나 유연부락 욱구려씨는 흉노족이었으므로 선비족인 북위를 섬기지 않았다. 탁발규가 그런 유연부락을 공격했다. 유연부락의 욱구려씨족 두목 욱구려필후발과 욱구려온흘제 형제는 탁발규에게 항복했다. 탁발규는 그들을 운중(내몽고 탁극탁)으로 모두 이주시켰다. 탁발규가 쳐들어와 자신의 수하세력 욱구려씨를 빼앗아가자 유위진은 아들을 보내 북위에 대항했지만 결국 패했다. 유위진과 아들 유직력제는 서쪽으로 도주했다. 탁발규의 장수 이위가 끝까지 쫓아가 악극탁전기에서 유직력제를 사로잡았고 유위진도 부하에게 피살되었다.(AD391년 11월) 북위 창업자 탁발규는 유위진의 종족 5천명을 참수하고 그 시체를 황하에 버렸다. 그리고 유위진이 가지고 있던 말 30만 필과 소양 4백여만 마리를 획득했다. 이번 토벌로 탁발규 북위는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매우 강성한 국가가 되는 기초를 닦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때 유위진의 열 살짜리 막내아들 유발발은 가까스로 선비족의 일족인 설간부락으로 도주할 수 있었다. 탁발규는 후환을 아예 뽑아버리기 위해 설간부락에 사람을 보내 유발발을 색출했다. 설간부락 두목 태실장은 유발발을 세워놓고 이렇게 말했다.

  

  “ 나라가 망하고 집안이 무너져 

    내게 귀의한 유발발을 

    같이 망하면 망했지

    어찌 그를 붙잡아 북위에게 넘기겠는가?“  

 

태실장은 유발발을 영하성 고원에 주둔하고 있던 후진의 선비족 족장 몰혁간으로 보냈다. 유발발의 생김새와 언사가 범상치 않음을 본 몰혁간은 딸을 줘 처로 삼게 하였다.(AD391)

 

 

(3) 북위와 후연의 대결 : 참합피 대전(AD395) 

 

AD391년 흉노 유위진을 멸망시키면서 국력이 강해진 북위 탁발규는 그 여세를 몰아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해갔다. 당시 최강국이었던 후연과 북위의 일대전투는 불가피해졌다. AD393년-AD394년에 걸쳐 후연 모용수는 7만 보기병을 붙여서 북위와 우호관계에 있던 모용영의 서연을 멸망시키는 한편 서쪽의 후진과 연대한 뒤 북쪽의 북위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팽창하는 북위와 후연의 대결은 불가피해졌다. 선제공격은 북위가 먼저 일으켰다. AD395년 5월 탁발규가 후연의 국경을 침범한 것이다. 모용수는 즉각 태자 모용보와 아들 모용농, 모용린에게 8만 기병을 주어 반격하도록 했다. 그리고 모용덕에게 1만 8천 군사를 주어 그 뒤를 이어 받쳐 주도록 했다. 이것이 북위-후연의 참합피 대전(AD395년)이다. 이 전쟁에서 후연은 크게 패했다. 이미 70세가 넘어 노쇠한 주군 모용수의 판단력과 리더십이 흔들린 것이 패인이기도 하겠지만 북위 탁발규의 능력이 더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후진이 보호하고 있던 유위진 아들 유문진은 북위 탁발규에게 투항했다. 탁발규는 종실의 여자를 그에게 주고 숙씨라는 성을 내려 주었다.(AD399) 

 

(4) 북위 서쪽 정벌과 : 능력많으나 욕심많고 교활하며 잔혹한 유발발 (AD407)

 

AD395년 참합피에서 대승하고 또 AD397년 호타하(하북성 석가장 부근 하천)전투에서도 후연 군사를 크게 깨뜨린 북위는 다음 서쪽 방면으로 눈을 돌렸다. AD401년 12월 탁발규는 탁발준과 화발을 5만 군사와 함께 보내 고평(영하성 고원)의 몰혁간을 습격하도록 했다. 몰혁간은 후진과 연대하던 세력이다. 원래 북위 탁발규와 후진은 나쁜 사이가 아니었다. 탁발규가 말 1천 필을 후진에게 보내면서 딸을 달라고 했는데 이미 탁발규에게는 후연 모용수의 손녀딸 아내가 있었다. 요흥은 자신을 속인 탁발규에 대해 내심 불쾌했는데 게다가 군대를 보내 자신의 속국인 몰혁간 영토를 공격하게 되자 양국관계가 급속하게 냉각되었다. 북위 대군이 들이닥치자 몰혁간과 유발발은 일단 진주(감숙성 경천)로 몸을 피했다.(AD401) 이 때 나이가 갓 스무 살을 넘게 된 유발발은 체격이 장대하고 몸가짐이 수려했으며 총명하고 언변이 매우 뛰어났다고 기록되었다. 그런 유발발을 후진 군주 요흥은 매우 아끼고 중용했다. 유발발은 요흥의 지원에 힘입어 강력한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 요흥의 아우 요옹이 믿을 수 없는 간교한 유발발을 경계하라고 귀띔했지만 요홍은 듣지 않았다.

 

     “ 세상을 구제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내가 그와 더불어 천하를 평정하려고 하는데

       어찌 그를 꺼리는가?“

 

오히려 유발발을 안원장군으로 삼아 몰혁간을 도와 고평(영하 고원)에 진수시켰다. 그리고 과거 유발발의 아버지 유위진에게 속했던 부락민 3만을 배속시켜 북위의 침입에 대비하도록 했다. 요옹이 형님 요흥에게 한사코 유발발 등용을 반대했다. 요흥이 반문했다.

 

 “ 네가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를 어떻게 아느냐?”

 

요옹이 대답했다.

 

  “ 윗사람 받드는 것이 게으르고 

    사람을 잔혹하게 다루며

    욕심이 많고 교활하여 어질지 않습니다. 

    거취를 가볍게 여겨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을 보면

    믿을 사람이 못됩니다.

    그런 인간을 너무 총애하시니 장차 변경에서 

    걱정거리를 만들까 심히 걱정됩니다.“

 

동생이 극렬하게 반대하자 요흥은 마침내 유발발을 등용시키는 것을 잠시 멈추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유발발을 끝내 안북장군 오원공에 임명하고 여러 선비족을 통솔시켜 삭방(내몽고 항금기)에 진수시켰다.(AD407) 

 

(5) 후진과 북위의 화해가 촉발시킨 유발발의 대하 건국(AD407)  

 

북위 탁발규는 6년 전인 AD401년 겨울 고평을 공격할 때 사로잡힌 후진 장수 당소방을 돌려주었다. 적대관계를 풀자는 신호였다. 후진 요흥 또한 북위와 적대관계를 풀고 싶었기 때문에 좋은 말 1천 필 탁발규에게 보내면서 포로가 된 후진 장수 적백지도 돌려 줄 것을 요청했다. 탁발규가 허락했다. 요흥의 후진과 탁발규의 북위가 우호관계를 맺는 것을 절대로 용납 못할 사람이 유발발이었다. 왜냐하면 북위는 AD391년 아버지 유위진을 죽인 원수였기 때문이다. 

 

때마침 유연부락의 욱구려사륜이 종주국 북위에게 보내는 말 8천 필을 보냈는데 유발발은 그 가운데에서 말들을 약탈하고 욱구려사륜의 무리 3만명마저 탈취하여 무리를 몰고 고평(고원)으로 갔다. 장인 몰혁간에게는 사냥한다고 거짓말 한 유발발은 몰혁간을 죽이고 그의 무리마저도 병합해버렸다. 유발발은 마침내 후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대하(大夏)라는 나라를 건국했다. 스스로 대하천왕 및 대선우라고 하면서 도읍을 대성, 즉 통만(지금의 산서성 유림)으로 정했다. 유발발은 아버지 원수를 갚고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어려운 위기 때 자신을 구해주고 딸까지 준 장인 몰혁간을 죽일 수 있었던 패륜아였다. 

 

(6) 대하 유발발의 남침(AD407)

 

통만에서 대하를 건국한 유발발은 근방의 선비족 설천 등 3개 부락 함락하여 포로 약 만 여명을 흡수한 뒤 곧바로 후진의 북쪽 북경인 삼성을 침범해 들어갔다. 그 전투에서 후진 장군 양비와 요석생을 사로잡고 바로 참수했다. 유발발의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 폐하께서 관중을 장악하시려면 

    의당 먼저 근본을 단단하게 한 다음

    사람들의 신임을 얻으셔야 합니다.

    고평(영하성 고원)은 땅이 넓고 산천이 함하며 견고하고 또 비옥하므로

    도읍으로 정할 만합니다. “

 

유발발이 말했다.

 

   “ 경등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소.

     나의 대업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어서 병사가 많지 않고

     또 요흥이 한 시대 영웅으로 굳게 버티고 있으니

     아직은 관중을 예기할 때가 아니오.

     내가 지금 한 성만을 지킨다면

     그는 반드시 대군을 몰아서 공략해 올 것인데

     그것은 수적으로 불리한 우리가 앉아서 멸망하는 길일뿐이요.

     용맹스런 기병을 날려서 그들이 예기치 않은 곳으로 나아가서

     앞으로 오면 뒤를 공격하고

     뒤로 오면 앞을 공격하여 

     그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한다면 

     적이 몇 백만 대군이라도 감당할 수가 있소.      

     10년이 되지 않아 영북(섬서성 예천 이북)과 하동(산서성 서남부)은

     모두 우리 소유가 될 것이요.

     요흥이 죽기를 기다리면

     못 난 그 아들(요홍)은 어리석고 나약하니  

     장안은 힘들이지 않고 내가 차지할 수가 있는 것이요.“

 

유발발은 영북지역을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후진의 요흥이 탄식하며 말했다.

 

 “ 내가 황아(요옹)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이 되었구나!”

 

유발발은 남량의 독발녹단에게 혼인을 요청했다. 독발녹단이 거절하자 유발발은 기병 2만 군사를 이끌고 지양(감숙성 난주시 북서쪽 영등)을 공격하여 1만여 명을 사상하고 3만여 가축을 약탈하고 돌아왔다. 독발녹단은 유발발을 반격할 계획을 세웠다. 부하 장수 초랑이 반대하고 나섰다.

 

  “ 유발발의 군대가 엄격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읍니다.

    결코 아직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장수 하련이 반발했다.

 

  “ 유발발 잔당은 유위진 패잔병의 무리일 뿐입니다.    

    어찌 그들을 피하여 약함을 드러냅니까?“

 

독발녹단은 하련의 말대로 유발발 공격에 나섰다. 유발발은 독발녹단 군사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양무(감숙성 정원현) 골짜기에 병사 매복시켜 놓고 얼음 깨고 수레를 묻어 독발녹단 군사를 막았다. 추격해 오는 독발녹단의 군사가 막힌 강 앞에서 허둥대는 틈을 타고 습격하여 크게 대패시켰다. 독발녹단의 장수 10 중 6-7명이 전사했고 독발녹단 홀로 도주했을 뿐 근위병은 거의 모두 체포되거나 잡혀 죽었다. 유발발은 죽은 시체를 쌓아 올려 촉루대라고 이름 붙였다. 유발발은 또 독발녹단을 지원해 온 후진 장군 장불생 군사 5천도 참수해버렸다. 독발녹단은 남은 주민을 데리고 고장(감숙성 무위)으로 도망갔다.(AD407)       

 

(7) 후진 요흥에게 승리하는 하나라 유발발(AD409-AD411)

 

서쪽으로 독발녹단, 그리고 남쪽으로 동진 유유와 화친한 후진 요흥은 이제 마음 놓고 북쪽의 유발발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동생 요충과 장수 적백지에게 4만 기병을 주어 유발발 공격을 지시했다. 하루 길을 북쪽으로 가다가 영북(섬서성 예천)에 도착한 요충은 거꾸로 장안의 형 요흥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적백지가 반대하자 그 자리에서 독을 먹여 죽였다. 요충이 반란을 모의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요흥은 요충에게 죽음을 내렸다. 이 틈을 타고 하의 유발발은 기병 2만으로 후진의 평양(감숙성 화정)을 공격하고 주민 7천을 약탈한 뒤 의역천(감숙성 화정현 남쪽)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후진 요흥은 유발발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북쪽 이성(섬서성 황릉)으로 나아갔다. 유발발은 기병을 거느리고 요흥을 선제공격했다. 요흥의 군사가 대패하면서 장안으로 급히 후퇴하였다. 요흥이 남연의 모용초를 돕기 위해 보낸 한범과 요소도 패하였다. 요흥의 후진군은 북쪽, 서쪽 그리고 동쪽에서 모두 패한 셈이다. 

 

요흥이 패퇴하자 유발발은 강력한 기병을 바탕으로 줄기차게 후진의 북쪽 변경인 평량(감숙성 화정)과 정양(섬서성 의천현)을 노략질해 들어왔다. 요흥은 군사를 이끌고 직접 유발발을 맞아 싸웠지만 기병으로만 이루어진 유발발의 치고 빠지는 전략을 감당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관중 북부 지역에서 후진의 요흥 세력을 격파한 유발발은 거침없이 군사를 몰아 지배영역을 넓혀 나갔다. 황릉을 관할하던 후진의 왕매덕은 유발발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유발발이 후진을 어떻게 토벌해야 하냐고 왕매덕에게 묻자 기다리면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고 대답했다. 후진의 영역이 장안부근으로 쪼그라든 반면 유발발의 하나라 영역은 감숙성 동남부와 섬서성 중부와 남부는 물론 산서성 서부까지 세력을 넓혔다.(AD411) 그러나 유발발의 군대는 한 지역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유목민족의 특성상 옮겨 다니는 군대였으므로 세력영역이라고 해서 정착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8) 서진 걸복씨 조정의 내분(AD412)

 

AD412년 6월 걸복공부가 감숙성 무위를 근거로 하는 서진의 주군 걸복건귀와 그 아들 10여명 살해하고 대하(감숙성 광하)로 도망갔다. 걸복공부는 주군 걸복건귀의 조카이고 서진 창업자 걸복국인의 아들이다. 아마 삼촌 걸복건귀가 병사한 아버지의 자리를 꿰찬 것에 대한 반발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걸복건귀의 아들 걸복치반은 기병 3천을 보내 걸복공부를 추격했다. 걸복치반이 보낸 추격군은 감숙성 유중 부근에서 걸복공부 무리를 생포한 다음 그의 네 아들과 함께 환열형에 처했다. 후진 요흥의 부장들은 이 호기를 살려서 서진의 땅을 공격하자고 간청했다. 도량이 넓고 인자한 주군 요흥은 반대했다. 

 

  “남의 상사를 이용하여 공격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오.”

 

하나라 유발발도 서진 걸복치반을 공격할 생각을 가졌지만 군사중랑장 왕매덕이 이렇게 조언했다. 

 

   “ 걸복치반은 우리의 동맹국 수장입니다. 

     지금 상란을 당하여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들을 무력으로 친다면 필부들도 부끄러워 할 일인데

     하물며 만승의 군주가 할 일이겠습니까?“

 

머쓱해진 유발발은 서진 경략계획을 중지시켰다. 

 

 

(9) 후진 양불숭이 유발발에게 패전(AD412)

 

후진 요흥은 양불숭을 옹주(감숙성 진원)자사로 삼고 주변 군사를 몰아서 유발발을 치도록 했다. 요흥이 이렇게 말했다.

 

“ 양불숭은 적을 볼 때마다 용맹함을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흥분하므로

  내가 군사를 조절하여 5천이 넘지 못하도록 하였소.

  지금 그가 거느리는 너무 군사가 많은데

  적을 만나면 반드시 패할 것을 어떡하면 좋겠소?“ 

 

요흥의 말대로 양불숭은 유발발과 맞붙어 크게 패하였다. 유발발에게 사로잡히자 양불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0) 유발발의 통만성 축성과 혁련발발로 이름 변경(AD413)

 

유발발은 AD413년 승리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봉상이라고 고쳤다. 그리고 영북(섬서 예천)의 이민족인 이족과 하족 10만 명을 징발하여 삭방수(황하 지류 무정하) 북쪽과 흑수(세하)의 남쪽에 거대한 도성을 쌓도록 했다. 기본적으로 유목민 특성을 지닌 흉노족 세력인 유발발이 도성을 쌓고 한 곳에 정착한 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문화와 전쟁의 성격을 송두리 째로 바꾸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발발은 이렇게 말했다.

 

  “ 짐은 바야흐로 천하를 통일하여 만방에 군림할 것이므로

    이 성의 이름을 통만이라고 부를 것이다.“

 

통만이란 오르도스남쪽 지금의 산서성 유림 정변의 사막지역이다. 유발발이 축성을 질간아리에게 맡겼다. 질간아리는 매우 꼼꼼하면서 잔인한 사람이었다. 구운 벽돌 벽을 칼로 찔러봐서 1촌이라도 패이면 담당자를 죽여 성곽에 함께 묻었다. 병기를 만들 때에도 화살이 갑옷을 못 뚫으면 화살장이를 죽였고 갑옷이 뚤리면 갑옷 만든 사람을 죽였다. 그렇게 축성된 것이 통만 성이므로 견고함에 있어서는 따라 올 성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성이었다고 전해진다.    

 

유발발의 유씨 성은 난제묵돌이 옛 한나라 시절 유방에게 내려 받은 성이었다. 유발발을 그렇게 내려 받은 유씨 성을 수치로 여겨 혁련으로 바꾸었다. 흉노어로 그 뜻은 ‘영광과 권력’을 상징하고 또 한자로는 ‘아름답고 성대한 모양이 하늘과 닮았다’라는 뜻이다. 그 외의 다른 흉노 부족들도 성을 모두 ‘철벌’씨로 바꾸었다.  

 

 

(11) 후진의 내분 : 요홍과 요필의 대립(AD414) 

 

후진 주군 요흥에게 병이 났다. 이 때 요흥(AD366-AD416)의 나이는 48세였다. 병든 몸임에도 불구하고 반란을 일으킨 이홍과 구상을 토벌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몰고 황릉까지 가서 역적구상의 목을 베고 이홍은 사로잡아 돌아왔다. 이 때 태자 요홍은 좌장군 요문종을 총애하였는데 요홍의 동생 요필이 요문종을 싫어하여 요흥에게 요문종을 요망하다고 무고했다. 셋째 아들 요필을 매우 아낀 요흥은 요문종에게 죽음을 내렸고 사람들은 모두 요필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요흥은 요필의 말이라면 듣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기밀을 취급하는 요흥의 핵심 측근은 모두 요필의 심복들로 교체되었다. 요흥의 우복야 양희와 시중 임겸과 경조윤 윤소 등 조정 대신들은 요흥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 부자지간의 일은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어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군신지간의 일은 부자지간의 일에 비추어 가볍지 않으니    

     신들은 침묵하고 아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최근 광평공 요필이 적자의 자리를 뺏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길거리에서는 폐하께서 조만간 태자 폐립의 계획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런 일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요흥은 깜짝 놀랐다.

 

  “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양희 등이 다시 말씀을 올렸다.

 

  “ 진실로 그런 일이 없으시다면

    폐하께서 요필을 아끼시는 것이 

    오히려 그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의 주변 사람을 쫓아내시고

    그의 권세와 위엄을 조금 줄이는 것이 

    사직을 위해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흥은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곧바로 대사농 보온과 좌장사 왕필 등이 요필을 태자로 교체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요흥은 들은 척 하지도 않았다. 요필은 요흥의 병세도 그렇고 또한 요흥의 총애를 확신한 나머지 군사 수천을 모아 결사대를 꾸렸다. 

 

요흥의 다른 아들 요유는 공공연한 요필의 반란 계획을 지방에 나가 있는 형님들에게 알렸다. 포판에 있던 요의(요흥의 둘째 아들), 낙양에 있는 요광(넷째), 봉상에 있는 요심(여섯째) 등이 군사를 훈련하며 장안의 요필 토벌계획을 세웠다. 요흥의 병문안을 온 정로장군 유강이 요흥에게 여러 황자들의 반란계획을 보고해 올렸다. 양희와 윤소는 거듭해서 요필을 죽여야 한다고 간청하면서 말했다.

 

  “ 진정으로 죽이지 못하시겠다면 

    그의 지위와 권세만이라도 박탈하셔야 합니다.“

 

마지못한 요흥이 요필의 상서령 직을 뺏고 평장군과 공작의 직위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요흥의 지시를 들은 요의 등 요흥의 여러 아들들은 군사를 풀고 토벌계획을 접었다. 강규와 양희는 요필과 반역무리를 더 멀리 쫓아내자고 권했지만 요흥은 대꾸하지 않았다.

 

 

(12) 요필과 요선의 갈등을 틈타 침략하는 혁련발발(AD415)

 

광평공 요필이 지난 해 자신을 헐뜯은 동생 요선을 아버지 요흥에게 참소했다. 마침 요선의 사마(측근 신하) 권비가 장안에 들어오자 요흥은 요선을 잘 계도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죽이려고 하였다. 권비는 죽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주군 요선의 비행을 고자질하면서 형벌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요흥은 요선 등의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고 화가 나서 요선이 주둔하고 있는 황릉에 사람을 보내 그를 감옥에 가두라고 지시한 뒤 요필에게는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진주(감숙성 천수)에 주둔하라고 명령했다.   

 

윤소가 나서서 요흥을 말렸다.

 

  “ 지금 광평공 요필과 황태자 요홍이 사이가 좋지 않은데

    저렇게 많은 군사를 요필에게 주신다면

    만일 황제께서 편치 않게 되시는 날에는 

    천하가 위험하게 됩니다.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커다란 계책이 위태로워진다(小不忍,乱大谋)’고 했습니다.

    이는 바로 지금의 폐하를 위해 하는 말입니다.“

 

요흥은 윤소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왕 혁련발발은 후진의 행성(섬서성 황릉)을 뽑아 버리고 후진 병사 2만 명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요흥이 격분하여 북지(섬서성 요현)으로 진격하여 진주에 있는 요필과 염만외를 차출하여 신평(섬서성 빈현)으로 보냈다. 혁련발발은 북량의 저거몽손과 연대를 모색하면서 후진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13) 후진(後秦) 멸망과 유유와 혁련발발의 형제 맺기(AD417)  

 

AD417년 8월 동진 유유의 군대에게 후진 요흥이 항복했다. 태위 유유가 장안에 도착해서 왕진악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나의 대업을 이루게 한 사람은 경이오!“ 

 

후진의 모든 황족과 장수들이 유유에게 항복했는데 유유는 그들을 모두 살해했다. 그리고 요홍도 건강까지 데리고 와서 목을 베었다. 유유는 건강에서 낙양으로 천도할 것을 생각했으나 측근 왕중덕이 반대하였으므로 그만 두었다. 

 

유유가 후진을 멸망시킬 때 혁련발발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 요홍은 유유의 적수가 절대 못 된다. 

    게다가 안에서 내분이 일어났으니 어찌 외적을 막을 수가 있겠느냐.

    그러나 유유는 결단코 장안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을 것이다.

    장차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자제와 부하에게 장안을 맡길 터인데

    내가 그곳을 빼앗는 것은 검불 줍는 일 보다 쉬울 것이다.“

   

유유가 장안을 점령하는 사이 혁련발발은 후진의 옛 북쪽 땅을 거의 대부분 차지하였다. 유유는 혁련발발에게 편지를 붙여 보내 형제서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더 이상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싶어서였다. 혁련발발도 원하는 바였다. 혁련발발은 유유에게 보낼 답장 편지를 중서시랑 황보휘가 외우도록 한 뒤 유유의 사신에게 구술로 불러주어 받아 적게 하였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배려도 있었고 또 받아 적게 함으로써 높은 위엄을 보이기 위한 속셈이기도 하였다. 유유가 탄식하며 말했다.

 

  “ 내가 혁련발발 보다 못하구나.”  

 

혁련발발과 우호조약을 맺은 유유는 장안을 출발하여 낙양 방면으로 돌아갔다.(AD417년12월) 혁련발발은 장안 공략의 방도를 왕매덕에게 물었다. 왕매덕이 대답했다.

 

   “ 어린 아들 유의진을 두고 허겁지겁 돌아갔으니 

     필시 동진 황위 찬탈에 뜻을 둔 것이며  

     중원에는 뜻이 없음이 분명합니다.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관중을 내린 것이니           

     먼저 유격부대를 보내 

     청니(섬서성 남전) 상락(섬서성 상락)을 점령하여 장안 남쪽을 끊고 동시에         

     동관을 장악하여 수로 육로를 끊은 다음 

     삼보지역(장안)에 격문을 띄워 위세와 은덕을 동시에 베풀면서 

     유의진을 타도한다면

     그것은 말할 거리조차 되지 않는 쉬운 일이 될 것입니다.“

  

혁련발발은 왕매덕 말대로 아들 혁련창을 보내 동관을 장악하게하고 왕매덕을 청니로 보내 장안 남쪽을 포위했다. 

 

 

(14) 혁련발발의 장안 공격(AD418)

 

장안의 사방을 틀어막은 혁련발발은 혁련귀를 시켜 장안을 장안 공격했다.(AD418) 혁련귀가 위수에 이르자 주변은 모두 혁련귀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동진장수 용양장군 신전자는 겁을 먹고 후퇴한 뒤 왕진악에게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급한 상황을 보고했다. 왕진악이 사자를 보내 심전자를 심하게 책망했다.

 

   “ 공(유유)께서 10살 어린 아이를 우리에게 맡기셨으니

     마땅히 죽기를 각오로 싸우셔야지 

     어찌 후퇴하고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평소 왕진악과 심전자는 서로 불화하던 사이였으므로 왕진악의 꾸중을 듣고 심전자는 이를 악물었다. 왕진악과 심전자가 다시 군대를 정리하여 북지(섬서성 요현)로 전투를 나갔다. 이때 장안 안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유의진을 볼모로 왕진악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소문이었다. 심전자 무리가 퍼뜨린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심전자는 왕진악을 유인했다.유유가 전달한 극비 상황을 알려 드릴게 있다는 이유로 측근을 모두 물리게 한 다음 왕진악을 살해했다.(1월15일) 그리고는 유의진에게는 거짓으로 태위(유유)의 명으로 죽인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살해 현장에 있었던 부홍지가 사실대로 심전자가 왕진악을 유인하여 살해한 것이라고 유의진에게 보고했다. 유의진의 수하 왕수는 심전자를 사로잡아 처형했다. 그리고 모수지를 왕진악을 대신하여 군사 참모로 등용했다. 부홍지는 혁련귀 군사를 크게 격파했다. 일단  하나라 군사는 물러났다.

 

장안을 통치하는 어린 유의진은 이번 승전에서 매우 불공평하고 또 과도하게 논공행상을 처리하면서 정치가 크게 어지러워 졌다. 보다 못한 왕수가 나서서 잘못된 논공행상을 취소하고 혼란한 정치를 바로 잡으려 했다. 그러자 상을 취소당한 사람들이 왕수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 심전자가 왕진악을 죽인 것이 모반 때문이라면

   왕수가 심전자를 죽인 것도 모반이나 다를 바가 없다.“

 

가득이나 정치에 간섭하면서 잔소리 해대는 왕진악이 눈엣가시였던 유의진은 사람을 시켜 왕수를 처형해 버렸다. 그리고 혁련발발의 침입으로 불안해지자 장안 안팎의 모든 군사를 장안 안으로 불러들이고 말았다. 장안을 총력 방어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혁련발발에게 항복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동진 군대가 다 장안으로 들어가자 방어력을 잃은 장안 주변의 모든 군현은 혁련발발에 항복하고 말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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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2월13일 16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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