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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6-2: 전한(前漢) 원제 유석(BC75-BC49-BC33) <G>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12월17일 16시50분
  • 최종수정 2021년12월07일 12시07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둘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30> 사예교위 개관요盖宽饶의 대담한 황제비판(BC60) 

 

위군 사람 사예교위 개관요가 강직하고 곧은 사람이어서 여러 번 황제의 심중을 거스렸다. 

그 때 황제는 형벌을 멋대로 적용하고 환관을 높이 등용하자 개관요가 봉서를 올려 말했다.

 

   ” 최근 성스러운 도가 추락하고

     유교의 가르침이 행해지지 않아서

     벌을 내리는 사람이 마치 주공이나 소공처럼 숭상받고

     형법을 마치 시경이나 서경처럼 존중하는 혈편입니다.“

 

그리고는 역경을 인용하면서 말했다.

 

   ” 오제는 천하를 통치하고 삼왕은 가문을 다스렸습니다.

     가문이기 때문에 자손에게 대대로 전해주었고

     천하통치는 현명하고 성스러운 사람들로 이어져 갔습니다.“ 

    

봉서가 올라오자 황제는 개관요가 원망과 훼방했다고 여기고 그 봉서를 수사관에게 넘겼다.

당시 집금오가 그 사안을 의논한 끝에 이렇게 결정을 내렸다.

 

   ” 개관요의 본뜻은 황위를 선양하라는 것이니 대역부도한 것이다.“

 

간대부 정창은 충직우국하는 개관요를 불쌍히 생각하여 사안이 그렇지 않으며 집금오를 몹시 꾸짖고 책망하면서 개관요를 위해 글로써 말했다.

 

   ” 내가 듣기에 산에는 맹수가 있어서 채소를 마음대로 뜯지 못하고,

     나라에는 충신이 있어서 간사한 사람들이 일어서지는 못합니다.

     사예교위 개관요는 편안함을 구하지 않고

     식사도 배부르고 먹지 아니하며 

     오직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행동하며 나아가고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키는 마음으로 물러서는 사람이어서

     위로는 허씨나 사씨(모두 황제의 외가)에게 구애받지 않고

     밑으로는 김씨나 장씨(황제의 처족)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사찰을 하는 것이 자신의 직분이니 

     곧바름으로만 행동하였으므로 

     적은 많고 친구는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글월을 올려서 국사를 진술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사들은 대벽으로 결판 내렸습니다.

     신은 다행히 대부의 직함을 가지고 간언을 하는 직책에 있으므로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황제는 정창의 말을 듣지 않았다. 9월 개관요는 감옥에 갇히자 북궐문 아래에서 패도를 가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31> 훌륭한 영천태수 한연수(BC59) 

 

BC59년 3월에 승상 위상이 죽고 그 자리에 병길이 등용되었다. 병길은 관대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항상 예와 겸손으로 행동했다. 소소한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당시 사람들은 그가 큰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소망지는 어사대부로 임명되었다. 

 

이 때 동군태수는 한연수가 좌풍익이 되었다. 전에 한연수가 영천태수가 되었을 때 전임태수 조광한이 도입한 상호고발제도를 이어받았으므로 세속 간에 원한관계가 매우 많았다. 한연수는 그 제도를 고치고 예양으로 교육하였으며 노인을 불러 여러 가족 간의 혼례, 상례를 협의하여 결정하고 옛 풍습을 따라 좇으면서도 법을 어기지는 않도록 하였다. 주민들은 그의 가르침을 따라서 제사와 무덤 부장품으로 쓰이는 각종 소, 말, 사람의 인형들을 버렸다. 

      

황패가 한연수의 후임으로 와서 그의 족적을 따라 더 큰 치적을 남겼다. 한연수는 동군 관리로 있으면서 예의를 중시하였으며 옛 교화의 사례를 좋아하였다. 현명한 사람을 초빙하여 예로써 대우하고 여러 가지를 서로 의논하면서 간쟁을 서슴지않고 받아들였다. 효제하는 자를 높이 표창했으며 학문과 예악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주민들은 모두 그를 따르며 존경하였다. 동군을 다스린 지 삼 년 만에 좌풍익으로 옮기게 되었다. 

 

한연수가 나와 고릉에 다다랐을 때 형제가 밭을 가지고 서로 법적으로 다투는 것을 보았다.한연수는 마음이 상하여 스스로 말했다.

 

    ” 다행히 군수자리에 있게 되어서 표본을 가지고 솔선하려고 했는데

      교화가 충분히 되지 않아서

      형제들이 저렇게 서로 다투고 싸우어서 풍속이 심이 어지러워 졌구나.  

      이 때문에 관료, 장노, 형제들이 모두 수치스럽게 되었으니

      그것은 책임자인 나에게 있는 것이므로 

      당연히 서둘러 이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날로 병을 핑계로 업무를 보지 않고 사무실을 닫고 드러누워 마음으로 잘못을 통회하였다. 모든 현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그 밑의 관직자인 영, 승, 장부 및 삼로들 또한 자신들의 잘못을 빌게 되었다. 서로 소송을 걸었던 형제의 친족들이 그 소식을 듣고 소송당사자 형제를 꾸짖으면서 스스로 머리를 깎고 육단하며 사과했다. 문제의밭은 서로 가지지 않겠다고 양보했으며 죽을 때까지 다시는 쟁송하지 않았다. 군내가 모두 그런 분위기가 되어서 서로 조심하며 양보하면서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 한연수의 은혜스러운 통치분위기가 좌풍익내 24개현을 두루 퍼지면서 소송을 거는 자가 없어졌다. 그의 정성에 감동되었기 때문에 주민들 중에서 사기를 치거나 속이는 행위가 사라졌다.   

 

 

<32> 소망지의 생각 : 不以义动兵,恐劳而无功(BC57)

 

한나라 사람들은 다수가 이렇게 생각했다.

 

    ” 흉노들의 폐해가 오래되었다. 

      그들 내부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공격하여 괴멸시켜야 한다.“

 

황제가 그것을 어사대부 소망지에게 그것을 물었는데 답이 이러했다.

 

    ” 춘추에 보면 진나라 사유가 장수가 되어서 제나라를 침략했을 때

      제나라 제후가 죽었다고 하자 군대를 돌려 돌아왔습니다.

      군자는 상을 당한 삶을 공격하지 않는 것을 중히 여기는 것은

      효자가 그 은혜에 감복하고

      제후가 감동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전에 흉노선우들이 한화되는 것을 사모하여

     스스로 동생이라고 칭하면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해내는 흡족해했고 

     야만족들도 모두 그것을 들었습니다.

     그 화친약속을 체결하기 전에 적신으로 몰려 끝내 죽었지만

     지금 흉노 정벌에 나서게 된다면 

     이것은 저쪽의 분란을 틈타 승리의 요행을 바라는 것일 뿐입니다.

     저쪽은 필시 멀리 도망갈 뿐입니다. 

     의로움으로 군사를 일으키지 않으면 헛수고로 돌아갈 것입니다.

     마땅히 먼저 사자를 보내서 물어보고

     그들의 미약한 부분을 파악한 다음에 

     공격을 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사방 야만족들이 그 소식을 들을 것인데

     모두 중국의 어짐과 의로움을 존경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과거와 같은 은혜를 입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므로

     반드시 칭신복속하면서 덕이 크게 성하는 것입니다.“ 

        

황제는 소망지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33> 萧望之 다음으로 左冯翊된 한연수韩延寿가 기시되다.(BC57)

 

한연수가 어사대부로 옮겨가는 소망지 다음으로 좌풍익이 되었을 때 일이다. 소망지는 한연수가 동군태수로 있을 때 관금 천만전을 뿌렸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수사를 지시했다. 한연수 또한 그 소식을 듣고서 좌풍익 시절의 소망지의 비리를 수사시켜서 관금 100만전을 빼돌린 것을 적발해 냈다. 소망지가 황제에게 보고를 올렸다.

 

     ” 제 직책이 천하를 수사하는 것이라 

       들은 정보를 수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한연수에게 책잡히게 된 것일 뿐입니다.“

 

황제는 한연수가 정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소망지의 관금횡력 혐의는 증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소망지가 동군에 파견한 수사관은 한연수가 관금을 이용하여 기사 시험날 사치한 증거와 관물을 녹여 칼을 만들고 관전과 비단을 사용하여 요역을 부린 사실을 적발해냈다. 결국 교활하고 부도덕하다는 죄목에 걸려 한연수는 기시되었다. 주민 수 천 명이 한연수가 기시될 위성에 와서 노소 할 것 없이 술과 안주를 바쳤으며 한연수가 거절하지 않고 마신 술이 1석이 넘었다. 한연수가 부하관리를 시켜 일일이 고맘다고 인사하게 한 후 말했다.

 

    ” 멀리서 애써 와 주신 여러 주민들 고맙습니다.

      이 한연수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 사건에 대해 후대 역사가 안사고는 소망지가 한연수의 명성을 꺼려하여 제거했다는 해석을 내렸다. 그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전한의 명군 반열에 서 있던 선제의 명성에 금이 가기 시작한 사건이 바로 이 사건이다. 한 연수는 분명히 드물게 보는 능력있는 지방관이었다. 주민들의 반응이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런 한연수를 소망지가 수사하고 결국 선제가 죽게 만든 것은 선제의 명성에 큰 오점이 아닐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 이후로 전한의 여러 명신들이 좌천되거나 처단되면서 전한의 위엄이 빠르게 무너져 내려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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