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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22 : 사마염의 서진(西晉) <E>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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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12월24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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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6> 황후 양씨 사망(AD274)

사마염은 후궁을 여섯 개 만들고 공경의 딸을 선발하여 채웠다. 숨기는 사람은 불경죄로 다스렸고 후궁이 찰 때까지 혼인을 금지시키면서까지 사람을 채웠다. 이 일을 책임 맡아서 한 사람은 양황후다. 그는 피부가 희고 키가 큰 사람을 주로 뽑았다. 뽑힌 사람은 공경의 딸이면 3 부인과 9빈으로 임명했고 이천석 관리나 장군의 딸이면 양인으로 삼았다.

가을에 양후가 죽었다. 사마염은 태자 충이 모자라는 사람이어서 죽기 전에 교체하는 문제를 양후와 상의했다. 양후는 이렇게 말했다.

   ” 후계자는 당연히 장자를 세우는 법입니다.
     똑똑한 것이 무슨 소용있습니까 ?“  

사마염은 장군 호분의 딸 귀빈으로 삼아 총애하였으므로  양황후는 자신이 죽고 나서의 일이 걱정되었다.

   ” 숙부 양준의 딸 양지가 덕도 높고 미색도 갖추었으니
     6궁으로 데려 와 나중을 준비하십시오.“

죽음을 앞 둔 양황후의 간청을 듣고 사마염도 눈물을 흘리며 약속했다. 


<17> 이부상서 산도가 추천한 혜소(AD274)

전에 태상이었던 산도는 이부상서가 되었다. 10년 동안 관리를 뽑는 일을 했던 산도는 관리가 한 명이라도 결원이 생기면 적당한 인물 몇 명을 먼저 고른 다음 황제의 의중을 파악한 다음에 그를 추천해서 올렸다. 그런 연유를 모르는 사람들은 산도가 마음대로 사람을 뽑아 올렸다고 비판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뽑아 올린 적이 없는 것을 잘 아는 황제는 산도를 더욱 신뢰하고 중용하였다.   

산도는 사람을 추천하여 올릴 때에는 항상 간단한 평가를 덧붙여 올렸는데 이를 산공계사 山公启事라 했다. 산도가 혜소를 추천하면서 비서랑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자 사마염이 그것을 승낙했다. 그러나 혜소는 아버지 혜강이 사마소에게 죄를 지어 죽었으므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갇혀 살면서 서진 조정과 담을 쌓고 있었다. 산도가 그에게 말했다.

   ” 그대를 위해 오래 상각해 봤지만
     하늘과 땅에도 숨을 죽이는 계절이 있기 마련이오.
     사람에게도 그럴 것이오 .
     그러니 이제 폐쇄의 시간을 거두고 밖으로 나오시지요.“

혜소는 산도의 간청을 받아들여 비서승으로 임직하였다. 혜소는 서진이 망할 즈음이 AD304년에 서진의 혜제를 보필하다가 반란군에 의해 칼에 찍혀 죽는다.   


<18> 삼징칠벽을 거절한 왕포(AD274)

사마염의 아버지 안동장군 사마소가 동관에서 AD252년 패하였을 때 사마소가 패전이 누구의 책임인가를 물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안동장군의 부하 왕의가 그 책임은 군사책임자인 사마소에게 있다고 지적했다. 화가 난 사마소는 왕의의 목을 베어버렸다. 왕의의 아들 왕포는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마음아파하며 숨어 지냈는데 사마염이 세 번이나 징소 하고 일곱 번이나 벽소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왕포는 절대로 수도가 있는 낙양을 향해 앉지 않았고 아버지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슬피 울면서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묘 옆에 있던 측백나무마저 말라 죽었다. 집안은 가난하여 힘들게 농사를 직접 지었고 누에를 키워 근근히 생계를 이었다. 주변에서 불쌍하게 생각하고 음식을 나눠주면 받지 않았고 도움도 거절했다. 제자들이 몰래 보리를 베어 받쳤으나 끝내 받지 않아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사마광은 사마염에 의해 등용된 이 두 사람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 순임금은 곤(우임금의 아버지)의 목을 베었지만
     우임금은 아버지를 죽인 순임금을 섬겼으니
     이것은 지극히 공적인 일을 함에 있어서 불가피 한 일이다.
     혜강과 왕의는 모두 죽임을 당했지만
     자신의 잘못 때문은 아니었으니
     그 아들들이 부름에 응하지 않는 것은
     공적의무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혜소가 만약에 혜제를 보살피다가 칼에 죽는 충성을 보이지 않았다면    
     군자들의 비웃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19> 위나라 수절의 모범 범찬(AD274)

위나라 조방이 죽었다. 마흔 셋이었다. 조방은 조해의 아들이었지만 후가가 없던 명제 조에가 입양하여 일곱 살에 황제가 되었던 사람이다. AD254년 폐위되어 여러 궁을 떠돌며 지냈다. 이 때 태재 중랑 범찬은 흰 옷을 입고 조방을 배웅하며 그 이후 병이 들었다고 하면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세 아들도 학업을 포기하고 사람 사귀는 일을 끊고서 평생 동네 밖으로 나기지 않았다. 사마염이 즉위하고 그 소문을 듣고 비단 100필과 이천석의 녹질을 주었지만 큰 아들 범교는 받지 않고 말도 하지 않으면서 36년을 살다가 84세에 죽었다.   
 

<20> 순욱과 사마유(AD276) 

사마유는 사마소의 친 아들이었지만 아들이 없었던 친 형 사마사의 양자로 입양되었던 사람이다. 사마염이 열두 살이나 위인 맏형이었으나 사마유는 재능이 뛰어났고 온화하며 명성이 자자했다. 따라서 사마소는 틈틈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 천하는 경왕 사마유의 천하다.
  나는 재상 자리를 차지할 뿐 
  백년 후의 대업(즉 건국)은 마땅히 사마유가 이룰 것이다.“

거의 태자가 될 뻔했었다. 아버지 사마소나 어머니 왕씨는 생전에 걱정이 되어 큰 형 사마염에게 사마유의 신변을 간곡히 부탁했었다. AD276년 마흔 살의 사마염이 병이 들자 조정 대신들은 사마유에게 기대려는 마음이 컸다. 하남윤 하후화라는 사람이 가충에게 말했다. 가충은 사마유의 장인이기도 하고 또 태자 사마충의 장인이기도 했다.

   ” 경의 두 사위는 경으로써는 친소가 같습니다.
     사람을 황제로 세울 때에는 
     아무래도 덕이 높고 평판이 좋은 사람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유는 평소 가충의 무리인 순욱과 풍담을 매우 혐오했다. 그러므로 순욱이나 풍담의 입장에서는 만약 사마유가 집권하게 되면 큰 재앙이 아닐 수 없었다. 순욱이 풍담에게 황제 사마염에게 이렇게 말씀을 올리라고 권했다.

   ” 황제께서 병환이 들어 낫지 않으면
     제왕 사마유가 공경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태자 사마충은 양보하려고 한 들
     어찌 죽음을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왕을 번국으로 돌려보내시어   
     사직을 안정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마염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겼다. 사마유에게 마음을 둔 가충의 병권을 회수하고 하후화를 광록훈으로 전보시켰다. 그러나 사마유를 지방으로 내보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마유에게 사공자리를 주어 국정에 참여하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21> 양씨를 황후로 세움(AD274)

사마염의 본 부인이자 태자의 생모인 무원황후 양씨가 AD274년 서를 여섯 살 나이로 죽었으므로 사마염은 또 다른 양씨를 황후로 들였다. 양준의 딸인 무도황후 양지였다. 양지는 무원황후 양염과는 사촌지간이었으므로 이를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두 황후를 동시에 배출한 양씨가문에서 걱정이 컸다. 양지의 숙부 양요가 황제에게 부탁했다.

   ” 옛 부터 한 집안에서 두 명의 황후가 나오게 되면 
     그 종족이 온전하게 보전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저의 이 표문을 종묘에 보관하셨다가
     다른 날 신이 걱정하는 일이 벌어지면
     화를 면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사마염은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허락해 주었다. 양준은 인물이 교만하고 자잘했으며 신중하지 못했다. 따라서 사마염이 그를 거기장군으로 임명하자 반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사마염은 개의치 않고 임명했다. 호분이 양준에게 말했다.

   ” 경은 딸을 믿고 호탕하게 구는구료.
     예전 시대의 일을 살펴보면
     천자 집안과 혼인을 맺고서 집안이 멸망하지 않은 적이 별로 없어요.
     단지 빠르거나 혹은 늦거나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소.“  

양준이 대꾸했다.

   ” 당신의 딸도 천자의 집에 있지 않소.“

사마염이 공경대신들의 딸을 궁으로 입궐시켰기 때문에 웬만한 대신의 딸이 모두 후궁으로 들어와 있었다. 호분이 말했다.

   ” 내 딸은 경의 딸의 시녀에 불과하지오. 
     어찌 가문에 해를 끼칠 자리라고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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