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정치인의 무지와 경거망동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10월30일 14시20분
  • 최종수정 2021년10월30일 14시10분

작성자

  • 최진석
  •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사)새말새몸짓 이사장

메타정보

  • 4

본문

소크라테스는 ‘용기’를 ‘지적 인내’라고 표현한다. 지적이지 않으면서 용기 비슷한 것을 ‘경거망동’이라고 한다. 용기가 지적 인내인 것은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것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나 사회적 의미 등으로 단련된 내면으로부터 오는 판단에 따라 힘을 쓰기 때문이다. 경거망동은 자잘해진 사람의 몫이고, 용기는 큰 사람의 몫이다. 

요즘 정치인들에게는 경거망동이 자주 보이고, 용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상황이 이러한 것은 정치인들이 지적으로 정련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생각하는 능력이 없고, 자기 성찰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목표에만 집중하며 살다가 목적을 살필 줄을 모르게 되어 버렸다. 이것을 더 줄여서 말하면, 무지(無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 비틀어 말하면, 다 크기를 잃고 자잘해졌다는 뜻이다.

정치인들의 경거망동은 우선 국가가 무엇인지, 민족이 무엇인지, 민주가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과거가 무엇인지, 역사가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승리가 무엇인지, 정치가 무엇인지, 자본이 무엇인지, 시장이 무엇인지, 권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조차도 지적으로 정리가 안 되어있는 것과 관계된다. 다 똑똑한 사람들인데, 설마 그러하겠느냐고 생각해 본 적도 있지만, 하는 행태를 보면 무지하다는 결론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 무지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지적이라고 한다. 지적이면 감각적인 느낌보다는 사유(思惟)의 경로를 따른다. 

한 예를 들어본다. 어떤 대선후보는 국가가 음식점 총량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 허가를 하겠다고 한다. 점입가경은 그것을 또 자유와 방임의 문제로까지 연결시킨다. “무제한적 자유 속에 몰락할 위험을 감수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냐”고도 한다. 택시 면허제나 의사 면허제도 택시 기사들이나 의사의 몰락을 막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다. 대학 정원도 대학생들이나 대학의 몰락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몰락 여부는 각자 하기에 따라서 정해질 뿐이다. 음식점을 여는 것을 자유로, 음식점이 망하는 것을 방임의 결과로 배치시키는 것은 무지의 결과다. “망할 자유를 보장하는 게 국가의 역할인가”라는 표현에서는 듣는 내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다. “망할 자유”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가?

“무제한적 자유 속에 몰락할 위험을 감수하게” 하지 못하면, 이혼율의 증가가 위험하니 이혼 총량제도 실시할 것이다. “몰락할 위험”까지 국가가 간섭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나는 원하지 않는다. “불량식품을 사 먹을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고 하는데, 불량식품을 사 먹을 자유도 자유다. 국가는 식품 안전 관리에만 최선을 다하면 된다. 국가는 내가 어린 아들과 동네 문방구 앞에서 불량식품을 사 먹든 사 먹지 않든 상관하지 마시기 바란다. 국가는 나의 몰락까지 책임지겠다고 나에게 접근하지 마시라. 

자잘해진 자에게 권력을 주면 그것을 국민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데 쓴다. 큰 자가 권력을 가지면 그것을 허용하는 데에 쓴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민주와 자유를 위해 투쟁한 역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와 자유를 억압하는 일을 더 많이 하려고 한다. 독재에 저항하고 투쟁한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재의 냄새가 스멀스멀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상한 것은 민주와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희생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민주와 자유를 억압하려 들고, 독재에 항거하느라 젊음을 다 썼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독재를 시도한다는 점이다. 

인격이 망가지면 더 자잘해지고, 인격이 성숙해질수록 사람은 더 커진다. 자잘하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큰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큰 사람은 파멸하더라도 패배하지는 않겠다는 삶의 다짐이 자신도 모르게 장착되기 때문이다. 정치한다는 사람은 최소한 “인간은 파멸당할(destryed)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defeated) 않는다.”는 헤밍웨이의 문장에 자신의 반 이상을 허용할 정도의 인격은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얼마나 자잘해졌는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ifsPOST>​

 

4
  • 기사입력 2021년10월30일 14시20분
  • 최종수정 2021년10월30일 14시10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