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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 #21 : 북조를 통일한 우문태의 북주(北周) <X,끝>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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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11월19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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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59> 북주 친왕 우문초 등의 양견 암살시도(AD580)

 

조왕 우문초는 양견을 죽일 생각을 하고 양견을 집으로 초대했다. 양갼은 술과 안주를 싸가지고 우문초의 집으로 갔다. 우문초기 양견을 침실로 끌어들였는데 거기에는 아들 우문원과우문관 처남 노봉이 모두 칼을 차고 서 있었으며 무장한 무사들이 병풍 뒤에 숨어 잠복하고 있었다. 양견의 좌우의 호위무사들은 모두 따라 갈 수가 없어서 오직 6촌 동생 양홍과 대장군 원주만 침실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술자리가 익어가면서 우문초는 품속에 있는 작은 패도를 꺼내어 오이를 계속 잘라 먹이다가 양견을 찌를 생각이었다. 낌새를 알아차린 원주가 양견에게 말했다.

 

  ” 상부에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더 머무르실 수가 없습니다.“ 

 

우문초가 원주를 크게 꾸지었다. 원주는 칼을 만지작거리면서 들어가 양견 곁을 호위했다.우문초가 언성을 낮추며 원주에게 술을 권하면서 말했다.

 

  ” 내가 어찌 불손한 생각을 했겠는가. 경은 어찌 그리 심하게 경계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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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초는 취해서 토하는 척 하면서 뒷방으로 들어가기를 여러 번 했는데 원주는 그 행동을 의심하고 우문초를 부축하여 자리에 앉혔다. 우문초가 원주에게 목이 마르니 물을 좀 갖다달라고 부탁했지만 원주는 들은 척도 않고 양견을 보호하였다. 마침 등왕 우문유가 도착하자 양견은 그것을 핑계로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그를 영접하였다. 원주가 양견의 귓속에 이렇게 말했다.  

 

  ”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속히 떠나셔야 합니다.“

 

양견이 말했다.

 

  ” 저들은 군사력이 없는데 무슨 짓을 할수 있겠소“

 

원주가 말했다.

 

  ” 병마는 원래 저들의 것이었습니다.

    저들이 먼저 발동하면 대업은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저 한 몸이야 목숨을 사양할 것이 없지만

    죽어도 아무 이익이 없다는 것이 두렵습니다.“

 

양견이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원주는 방 뒤 병풍 사이에서 갑옷입은 군사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 취한 양견을 거의 강제로 끌어 내 말을 태워 보냈다. 우문초가 급히 따라 나왔지만 원주가 강하게 저지하는 바람에 양견을 따라잡지 못했다. 사흘 뒤 양견은 우문초와 월왕 우문성 무리를 반역으로 몰아 모두 죽였다. 북주 친왕들도 여러 번 양견을 죽이려고 시도했지만 양견의 도독 임경과 이원통이 철통 같이 호위하여 해를 입지 않았다.    

 

 

<160> 무척대치 (AD580)

 

위효관의 울지형 토벌군이 영교성(하남성 무척)에 도달했다. 부장들이 서둘러 성을 공격하자고 했지만 위효관은 이렇게 말했다.

 

  ” 성은 작지만 견고하오.

    이기기도 쉽지 않지만 만에 하나 진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오.

    이겼다고 하더라도 적의 대군을 격파하는 것이 더 중요하오.“

 

위효관은 무척에 주둔하며 성을 쌓았다. 울지형은 아들 울지돈에게 10만 대군을 무척의 동쪽 무덕으로 보냈다. 위효관의 대군과 울지돈의 대군이 심수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가을 비 때문에 심수가 크게 물이 불어서 양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물이 가라 앉기를 기다렸다.

위효관의 장사 이순이 말했다.

 

  ” 양사언, 우문흔, 최홍도 총관이 울지형에게 

    금을 뇌물로 받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군대 안에 근심하고 불안한 기운이 심각합니다.“

 

양견은 이 세 사람을 교체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이덕림에게 물었다. 이덕림이 이렇게 판단했다.

 

   ” 지금은 혼란기라서 

     누구라도 공의 명령을 위엄있게 받들지 못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원칙과 위엄을 가지고 

     제 장수들을 다스리며 설득하는 것에 힘쓰셔야 합니다.

     장수를 바꾸신다고 그들이 명령을 잘 따르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뇌물 풍문은 그 진위를 잘 알지도 못합니다.

     만약 교체한다고 하면 그들이 다 도망가 버릴 것입니다.

     만약 가두어버린다면 위효관 부터 모두 두려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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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을 앞에 두고 장수를 바꾸시는 것은 

     전국시대에 연과 조가 패배한 까닭입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공의 심복 중 능력도 있고 제장들도 따르는 한 사람을 뽑아 

     보내어 그곳을 지휘하게 하고 상황을 낱낱이 보고하게 하십시오.

     그곳에서 딴 생각을 품는 사람들도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고

     움직이더라도 즉각 제압할 수 있습니다.“

 

양견이 소리를 질렀다.

 

  ” 내가 크게 일을 그르칠 뻔 했구려. “ 

 

양견은 위효관의 군영에 파견할 사람을 물색했다. 먼저 소내사 최중방을 보내려고 했지만 선친이 그곳에 살고 있다고 하면서 사양했다. 유방과 정역을 뽑을까 생각했지만 유방은 군사경험이 없는 문신이라고 사양했고 정역은 어머니가 연로하다고 거절했다. 인선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본 승상부 사록 고경이 흔쾌히 가겠다고 자원했다. 고경은 명령을 받고 어머니에게 하직인사만하고 곧바로 전장으로 출발했다. 이후 양견은 군사에 관한 일을 이덕림하고만 상의했다. 

 

   

<161> 위효관이 울지형 대파

 

고경이 서둘러 군영에 도착하고 나서 맨 먼저 한 일은 심수를 건널 다리를 건축하는 일이었다. 울지돈은 심수 상류에 뗏목을 만들어 다리를 부수려고 했지만 고경은 물속에 토담을 쌓아서 뗏목 피해를 예방했다. 울지돈은 옛날 비수대전처럼 북주 조정군사가 강을 건너도록 한 뒤에 습격하려고 조금씩 군사를 뒤로 물렸다. 그러나 위효관의 군사들은 순식간에 강을 건너 먼저 다리를 북 태운 뒤 뒤로 물리고 있는 울지돈의 대군을 급습하였다. 울지돈의 대군은 순식간 대패하였고 본인은 단기로 도망갔다. 위효관은 곧바로 북진하여 업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울지형은 울지돈과 울지우와 13만 대군으로 위효관을 업성 남쪽에서 막았다. 울지형의 특수병 1만 명은 모두 푸른 수건과 누런 비단 두루마기 걸쳤으므로 황룡병이라고 불렀다. 비록 늙기는 했지만 오랜 군대생활로 실전에 경험이 많은 울지형이 갑옷을 입고 직접 선두에 나서서 지휘했으므로 군대들이 격렬하게 방어한 까닭에 위효관은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업성 내에서는 위효관과 울지형의 싸움을 수수방관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것을 본 위효관의 총관 중의 한 명인 우문흔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속임수를 써서 적을 함락시킬 것이다.“

 

우문흔은 울지형에게 금을 뇌물로 받았다고 의심받은 세 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전쟁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을 향해 활을 쏘았다. 돌연 자신들을 향해 화살이 비오듯이 쏟아지자 성 안의 사람들이 놀라서 몸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혼란을 틈타서 우문흔이 큰 소리로 말했다.

 

  ” 성 안의 적들이 패배했다.“    

그 기세를 타고 위효관의 군대가 울지형의 진영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울지형은 업성으로 들어가 방어에 치중했다. 위효관은 업성을 포위했다. 위효관의 군대가 성벽을 타고 올라가자 쫓기던 울지형은 성내 누각 위로 도망쳤다. 행군총관 최홍도가 성을 타고 올라가 누각아래에서 울지형에게 설득하며 나섰다.

 

  ” 우리는 서로 인척지간 아닙니까.

    그러나 나라 일을 도모하는 것이므로 사사롭게 처리할 수 없습니다.

    형세가 이렇다면 신속하게 결단을 내려야지

    길게 끈다고 무슨 좋은 일이 생기겠습니까?“

 

빨리 항복하라는 예기였다. 최홍도의 누이동생은 울지형의 며느리였다. 울지형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활과 무기를 던졌다. 한 동안 양견을 향해 욕을 뱉은 다음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최홍도는 동생 최홍승에게 을지형의 목을 취하라고 했다. 업 성 안에 있던 수 만 명의 사람들을 위효관은 모두 땅에 묻어버렸다. 자치통감에서는 울지형이 패배한 이유로 울지형이 핵심참모를 우둔하고 무능한 최달나를 장사로 삼은 때문이라고 했다. 도망갔던 울지근, 울지돈, 울지우는 모두 청주에서 사로 잡혀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양견은 울지형의 아들 울지근을 죽이지 않았다. 전에 자신을 위해 울지형을 설득하려고 했던 공을 참작한 것이다. 동쪽으로 나간 우문중은 울지형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양군(하남 상구), 조주(산동 정도),성무(산동 성무)를 차례로 뽑았다. 위효관은 또 군사를 나누어 관동(함곡관 동쪽)의 반란세력도 소탕했다. 양견은 상주의 치소를 업에서 안양(하남 안양)으로 옮기고 업성을 해체해 버렸다.

 

 

<162> 황패의 몰락(AD580)

 

정역과 유방은 양견에게 정권을 잡게 한 일등 공신이었다. 양견이 이들에게 내린 상과 품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황공 유방과 패공 정역은 그 공로를 의지하여 교만하고 사치하며 재물을 탐을 내고 직무를 소홀히 하였다. 그러나 지난 번 울지형 정벌 때 감군이 되기를 거부한 일로 말미암아 크게 실망한 양견은 점점 이들을 멀리하게 되었다. 반면 감군으로 자원한 고경이 돌아오자 양견은 큰 상을 내리고 총애와예우가 날로 깊어졌다.

 

당시 남쪽 안륙지장의 사마소난과 익주의 왕겸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양견은 걱정이 많았는데 황공 유방은 술과 향락을 그치지 않았다. 양견은 사마 유방을 고경으로 교체하고 정역은 차마 파직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두되 속관들에게 정역에게 보고하지 못하도록 하여일을 처리하지 않도록 했다. 그 사실을 안 정역은 불안을 느끼고 면직해주도록 강하게 요청했지만 양견은 직책을 그대로 두었다.  

 

 

<163> 안륙지방 사마소난과 왕겸의 익주 평정(AD580)

 

북주의 장군 왕의가 네 명의 총관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운주, 즉 지금의 안륙지방으로 내려왔다. 대항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한 사마소난은 왕의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또 양예는 보기 20만의 군사를 이끌고 익주의 왕겸을 토벌했다. 오아겸은 장군 달해기, 고아나굉 을불건 등을 10만 군사와 함께 파견하여 맞서 싸웠다. 그러나 힘이 달린 달해기와 을불건이 양예에게 투항하면서 왕겸의 익주는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왕겸은 30여 명의 측근을 이끌고 사천성 신도로 도망갔다가 신도 현령 왕보에게 붙잡혔다. 양예는 왕겸과 고아나굉의 목을 잘라 장안으로 보내고 익주방면을 완전히 평정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서 위효관은 죽었다. 자치통감에서는 위효관을 이렇게 평가했다.

 

  오랫동안 병경에 있으면서 여러 번 강적을 막아 싸웠다. 

  전략을 세우고 군사를 배치하는 것을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나놓고 보면 두루 놀라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신묘했다.

  비록 군대 생활을 오래 했지만 

  문장과 역사에 매우 통달하고 친족들에게 화목하고 돈독했으며

  봉록을 받으면 개인적으로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으로 칭송했다.

 

<164> 양견이 수나라 건국(AD581)

 

대체로 강북 전국을 장악한 양견은 상국으로 취임하고서 백관을 총괄했다. 20개 군을 수국으로 편입했는데 양견은 그 중 10개 군만 수령했다. 조정에서는 양견에게 구석의 예를 갖추어 대접하게 했다. 그리고 5대 친왕 중 남은 대왕 우문달과 등왕 우문유 및 그 아들을 모두 살해했다. (AD580) 다음해 2월 대장군 유계재의 강력한 제안으로 양견은 하늘의 천명을 받고 북주의 황제자리를 양위를 받도록 했다. 수나라가 건국된 것이다. 북주의 군주 우문천은 제위를 선양한 다음 별궁으로 옮겨졌다가 몰래 살해되었다. 이로써 AD557년 우문각이 세운 북주는 24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우경칙이 양견에게 모든 우문씨를 다 없애자고 권고했다. 고경과 양혜 또한 좋다고 했다. 이덕림은 반대했다. 양견이 이덕림에게 말했다. 

 

  ”그대는 서생이니 이 문제를 더불어 의논하기 부족하오.“

 

수 십 명의 우문씨가 이때 도륙되었다. 우문씨가 북제의 고씨를 모두 죽인 것이 4년 전의일이었다. 38년 뒤 양씨 또한 당의 이씨에게 도멸당하고 만다.  

 

 

<165> 북주(AD557-AD581)의 멸망원인

 

길지 않은 북주의 건국 24년 동안 가장 강력한 시절이었다면 우문옹에 의해 북제를 멸망시켰던 AD577년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 만에 북주가 멸망한 원인을 돌이켜 보면 몇 가지 분명한 이유가 드러난다.

 

첫째로 북주 최고의 명군 우문옹의 돌연 사망이다. 북제를 멸망시킨 그 바로 다음해 AD578 우문옹은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치통감이 드물게 칭찬했던 명군 우문옹이 몇 년만 더 살았더라도 남조의 진을 통합하여 전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우문옹의 아들 우문빈이 형편없는 군주였다는 점이다. 사치하고 향락을 즐겼으며 끝없이 제도를 바꾸고 고쳐서 백성들을 불안하게 했다. 

 

셋째로 정역과 유방 같은 수준이하의 간신들을 가까이 하면서 국정을 농단했다는 점이다. 물론 우문빈이 혼군이었으니까 당연히 간신배들을 가까이 했겠지만 이들은 우문빈에게 붙어서 권세를 부리다가 결정적으로 양견에게 붙어서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앞장을 섰던 사람들이다. 

 

넷째로 북주 최고의 충신이며 종친이었던 우문헌과 우문효백, 그리고 울지운과 같은 훌륭한 신하를 무참히 죽여 버렸다는 점이다. 이들만 살아 있었어도, 정역과유방 같은 간신만 없었어도 북주는 훨씬 튼튼하고 강력한 나라로 성장했을 것이다. 북주가 이룰 수 있었던 모든 업적은 양견이 역성 혁명으로 세운 수나라가 다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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