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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 #21 : 북조를 통일한 우문태의 북주(北周) <V>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11월05일 11시10분
  • 최종수정 2021년06월11일 10시19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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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46> 종친 우문헌 살해(AD578) 

 

우문헌은 우문태의 다섯째 아들로 황제 우문옹의 바로 아래 동생이어서 황족 중에서 항렬도 높았고 또 명망도 깊었다. 여러모로 부족한 태자로써는 황위에 대한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우문헌인 셈이었다. 우문빈은 삼촌 우문헌을 죽여 줄 것을 우문효백에게 부탁했다. 우문효백은 우문빈의 감언이설에 속을 사람이 아니었다.

 

   ” 그렇게 되면 신은 불충한 사람이 되옵고

     폐하는 불효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일 이후로 우문빈은 우문효백을 미워하며 둘 사이가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우문빈은 우지와 정역을 시켜 우문헌을 반란혐의로 무고하게 했다. 우문헌은 태사직을 사양하고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날 저녁 우문빈은 모든 황족 친왕들을 궁궐로 소환했다. 우문헌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불려가 목을 메어 죽었다. 우문헌 나이 35세 였다. 그의 측근 왕흥, 독고웅, 두로소 등도 모두 같이 제거되었다.

 

 

<147> 우문빈의 4輔官 조정 구축과 충신 낙운의 여친팔계輿櫬八戒(AD578) 

 

북주 황제 우문빈은 곧바로 측근들로 조정을 새로 꾸렸다. 전후좌우 네 명의 최측근 직인 사보관을 설치했는데 월왕 우문성이 대전의, 촉공 울지형은 대우필, 신공 이목은 대좌보, 수공 양견은 대후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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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경조군승 낙운樂運은 황제의 정치에 대해 가차 없이 비판했다. 형벌을 적용함에 있어서 사면이 너무 무분별하고 빈번하여 악인들을 무더기로 양산한다고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관을 가지고 와서 황제의 여덟 가지 정치잘못(여친팔계輿櫬八戒)을 지적하였다.   

 

첫째, 최근 중대사를 독단으로 처리하면서 여러 재상을 참여시켜 같이 의논하지 않은 잘못,

둘째, 미녀를 색출하여 후궁에 들여놓으면서 재상집 여자를 결혼하지 못하게 한 것,

셋째, 후궁이 들어오면 며칠을 궁궐에서 나오지 않고 환관에게 모든 일을 처리하게 한 것,

넷째, 벌을 내리면서 터무니없이 관대했다가 반년도 안 돼 다시 갑자기 엄격하게 바뀐 것,

다섯째, 고조(우문옹)께서 검소하라고 부탁했는데 돌아가신지 일 년도 안돼 다시 사치한 것,

여섯째, 백성을 부려서 배우와 씨름꾼에게 봉사하게 한 것,

일곱째, 상서한 사람이 글자를 잘못 썼다고 죄를 물어서 상서를 아예 막으려 한 것,

여덟째, 하늘이 내리는 경계를 바탕으로 조심하고 반성하여 좋은 길로 가지 못한 것.      

 

황제는 격노하여 죽일 생각을 품었다. 신하들도 모두 내용의 대담함에 하나같이 경악했다. 낙운을 돕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는데 내사중대부 원암만이 나서서 이렇게 낙운을 두둔했다.

 

   ” 장홍臧洪과 함께 죽는 것도 사람들이 원하는 바 일 텐데 

     하물며 비간과 같은 훌륭한 사람과 같이 죽는 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만약 낙운이 사형을 못 면한다면 

     나 또한 같이 죽을 것이다.“

 

장홍이란 사람은 후한 헌제 AD195년 원소에 반항하여 사형을 당한 사람인데 그 죽음이 의롭다고 생각한 같은 마을 진용이 함께 죽었던 고사를 말한다. 그리고는 황제를 알현하기를 청하면서 말했다.

 

   ” 낙운이 죽음을 무릎 쓴 것은 깨끗한 이름을 남기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폐하의 성스러운 도를 넓히는 일입니다.“  

     

우문빈은 그의 말에 공감하고 다음 날 낙운을 소환했다.

 

   ” 짐이 어제 밤 그대가 말한 내용을 깊이 생각해 봤는데  

     과연 충신이라고 할 만 했소.“ 

 

식사를 대접한 뒤 낙운을 돌려 보냈다.

 


<148> 북주 우문빈의 어두운 정치 : 충신 왕궤의 죽음(AD579)

 

 하루는 황제 우문빈이 조용히 정역을 불러 물었다.

 

  ” 내 다리에 있는 상처는 누구 때문에 생긴 것인가요?“

 

정역이 답했다.

  

  ” 오환 왕궤와 우문효백 때문에 생겼습니다.“ 

 

이일 이후 왕궤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우문옹과 함께 우문호를 몰아 낸 공신 왕궤는  황제 우문빈이 자격 없음을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었다. 왕궤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은 서주로 남쪽 진나라 조정과 국경이 맞닿아 있어서 언제라도 그쪽으로 붙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왕궤는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 충의지절이란 쉽게 더럽히거나 거역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선제(우문옹을 말함)의큰 후덕과 은혜를 입은 입장에서

    어떻게 경거망동하여 죽은 주군에게 죄를 짓겠는가. 

    오로지 기다렸다가 죽음으로써 

    천년이 지난 다음이라도 나의 진정한 마음을 알리고 싶을 따름이다. “ 

우문빈은 내사 두경신을 보내 왕궤를 죽일 참이었다. 원암은 조서의 서명에 끝까지 반대하고 나섰으며 중대부 안지의도 간절하게 죽이지 말 것을 요청했지만 황제는 듣지 않았다. 원암은 머리 두건을 벗고 머리를 숙여 삼배를 한 뒤 한 걸음씩 전진하며 항의의 뜻을 표했다.

우문빈은 이렇게 꾸짖었다.

 

  ” 너는 오환(왕궤가 오환족이었다)같은 무리가 되려는가?“

 

원암이 이렇게 대꾸했다.

 

  ” 저는 왕궤의 무리가 아닙니다.

    다만 멋대로 사람을 죽여서 천하의 기대를 저버리시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마침내 왕궤는 사약을 받고 죽었다. 원암의 가족들도 모두 폐족되었다.

 

 

<149> 북주 우문빈의 어두운 정치 : 충신 울지운과 우문효백의 죽음(AD579)

 

울지운은 우문빈이 태자로 있을 때부터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기를 간청하였다. 당시 황제 우문옹은 태자를 잘 교육시키는 울지운이 고맙기 그지없었지만 우문옹이 죽고 우문빈이 황제가 된 다음에는 상황이 달랐다. 황제 본인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꾸짖었던 여러 선생들이 자신을 헐뜯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울지운, 우문효백, 우문신거 등을 적대세력을 보고 잇었다. 울지운이 그런 상황을 우문효백에게 토로했다 

 

  ” 닥쳐올 재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요? “

 

우문효백이 이렇게 말했다.

 

   ” 지금 노모가 살아계시고 지하에는 무제(우문태)거 계십니다.

     신하가 되고 아들이 되어서 무엇을 알고 싶으십니까.

     또 인사를 담당하는 사람이면 의당 대의명분과 의리를 따라야 할 것,

     간언을 올려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죽어도 좋은 것이지 어찌 도망가겠습니까

     족하가 만약 몸을 생각하신다면 마땅히 멀리 도망가십시오.“

 

다른 날 황제가 우문헌의 일로 우문효백을 꾸짖었다.

 

   ” 공은 우문헌이 모반을 일으키려 하는 것을 알고서도 어찌 말이 없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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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효백이 말했다.

 

    ” 신은 제왕 우문헌이 사직에 충신이라는 것을 알았지

      자질구레한 여러 참소의 말을 믿지 않았으므로 말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또 선제께서 부족한 신에게 부탁하실 때 

      오로지 폐하를 보필하라고 지시를 받았습니다.

      지금 간언을 올려도 가납하시지 않으셨는데 

      선제의 부탁을 받은 몸으로 심히 송구스럽습니다.“

      그것이 죄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황제는 참울한 마음을 가눌 수 없어서 말없이 머리만 올렸다 내렸다 했다. 우문효백에게 나가라고 한 뒤 사약을 내렸다. 병주자사로 있던 우문신거에게도 사신을 보내 짐독을 내려 죽였다. 진주총관으로 부임하게 되는 울지운 또한 우울한 마음이 병이 되어 죽었다.      

 

 

<150> 북주 우문빈의 황위 양위소동(AD579) 

 

AD579년 초 황제 우문빈은 돌연 제위를 어린 아들 우문천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했다. 우문천의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스스로 천원황제라고 칭하고 머무는 곳을 천대라고 불렀다.면류관의 줄은 통상 12줄에서 24줄로 늘였으며 모든 수레, 의복, 거처, 집기들의 크기를 두 배로 했다. 천원, 즉 우문빈은 더욱 사치하고 방탕하며 교만해졌다. 두렵고 무서워하는 것이 없었고 국가 의식은 마음가는대로 고치고 바꾸었다. 자신을 알현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사흘간 목욕재계해야 했고 직전 하루는 모든 것을 금하고 몸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가다듬도록 했다. 다른 사람의 칭호에 天, 高, 上 및 大 라는 말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지했고 관직 중에서도 이 글자가 들어가는 것은 모두 고쳤다. 따라서 성씨 중에 高씨는 姜씨로 바꾸었고 구족 중에서 高祖는 長祖로 불렀다.  

 

신하를 불러 의논할 때에도 오직 만들고 고치고 바꾸는 것만 하려했고 정사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잘못을 저지르는 신하나 궁녀들에게는 항상 매를 때렸는데 하늘이 내린 매, 즉 천장天仗이라고 해서 한 번에 꼭 120대를 내리쳤다. 겁에 질린 신하와 궁녀들은 종일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발을 포개어 걷기를 계속했다. 

 

 

<151> 북주의 번국 설치(AD579)

 

북중국을 통일한 북주는 AD579년 5월 전국 지방에 다섯 개 봉국을 설치하고 황제의 친족을 왕으로 책봉했다. 왕에는 모두 우문태의 아들을 세웠다. 말이 번국이지 실제로 봉읍은 1만호 밖에 안되는 작은 나라였다. 

 

  ▪ 조국왕 : 우문초(우문태 아들)

  ▪ 대국왕 : 우문달(우문태 아들)

  ▪ 진국왕 : 우문순(우문태 아들)

  ▪ 월국왕 : 우문성(우문태 아들)

  ▪ 등국왕 : 우문유(우문태 아들)

 

수공이 양견이 조용히 대장군 여남공 우문경에게 말했다.

 

  “ 천원은 쌓은 덕도 없고

    외모를 보니 또한 오래 살지도 못할 것 같소.

    여러 번국이라고는 하지만 1만호 밖에 되지 않아 약하기 그지없소.

    뿌리도 얕고 약하니 근본을 굳게 하는 대책이 아닌 것 같소.

    깃털이 이미 잘렸는데 어찌 멀리 날 수 있겠소.”

 

여기서 깃털이란 북주를 날아가게 하는 중심인물, 즉 왕궤, 우문효백, 울지운, 우문신거 같은 충신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양견이 이 말을 건넨 우문경은 사약을 받은 우문신거의 동생이었다. 양견은 조심스럽게 조정에 반대하는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정은 양견에게 4보관의 가장 높은 자리인 대전의라는 자리를 맡겼다. 그 해 겨울 10월 천원(우문빈)은 그동안 금지시켰던 불상과 천존상을 모두 복구하고 종교숭배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152> 북주와 진나라의 회수, 장강 전투(AD579)

 

진나라 선제 진욱은 기병 10만과 누함 500척을 도독 임충에게 주어 회수지역을 확실히 장악하도록 지시했다. 이 지역은 북제가 혼란한 틈을 타서 AD573년 진이 탈취한 땅이어서 아직 완전히 국토라고 볼 수 없는 땅이기도 했다. 북주에서는 진나라의 북침의도가 깔려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즉각 대응했다. 위효관을 행군원수로 삼고 행군총관 우문량, 양사언을 인솔하고 회수지역을 보냈다. 위효관은 우문량을 서쪽 안륙(호묵성 안륙) 에서 보내 황성(호북성 황피)을 공략하도록 하고 양사언은 동쪽 광릉(강소성 양주)을 탈취하도록 했다. 북주의 군대는 전진하여 비구(안휘성 수현)을 포위했다.

 

진나라 조정에서는 임충이 7천, 번의가 2만 군사를 거느리고 장강을 건너 북주에 대항했지만 북주군이 승리하여 거의 모든 성들이 함락되었다. 장강 이북에 거주하던 진나라 백성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장강이남으로 도망갔다. 이제 장강 이북은 모두 북주의 영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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