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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21 : 북조를 통일한 우문태의 북주(北周) <A>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06월11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1년06월11일 09시4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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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우문태가 창업한 북주(北周)는 선비족계통의 나라다. 선비족은 AD4세기 경 부터 북중국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민족이다. 북제의 고환은 물론 전연 계통의 모용씨와 단씨, 대와 북위의 탁발씨, 남량의 독발씨, 북량의 걸복씨, 전진의 부견씨가 다 선비족으로 나라를 세운 족속이다. 이 외에도 장손씨, 욱구려씨, 누씨, 독고씨, 울지씨 등도 다 선비족에 속한다.   

 

AD4세기 중반 우문태의 5대조 때에는 전연의 모용황에게, 그 후에는 북위의 탁발씨에 복속한 우문씨는 내몽고 무천(호화호특)지역으로 강제 이주 당해 거기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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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씨의 시조는 대대로 삭주지역에 토호 족장으로 있었다. 보회라는 족장 때 옥도장을 얻었는데 거기에는 ‘황제새皇帝璽 ’라는 글이 박혀 있었다. 보회는 이상했으나 하늘이 준 것으로 생각하고 하늘이라는 의미의 선비 말 ‘우’와  주군이라는 뜻의 ‘문’을 써서 나라 이름 및 성으로 삼았다.(周書)  보희의 아들 막나는 몽고 음산으로부터 남쪽으로 요서지방으로 이동해 위나라 왕후의 아버지가 되면서 헌후라는 작위를 내려 받았다. 9세 뒤에 우문후두귀때 모용황이 죽었는데 이 때 그 아들 우문릉은 후연을 섬겨 현도공이 되었다. 북위 도무제 탁발규가 후연의 모용보를 격파할 때 모용보 부하였던 우문릉은 500기병을 인솔하고 북위에 투항하여 도목주, 안정후가 되었다. 우문릉 때 정부는 호걸을 대지방으로 옮겼는데 이 때 우문릉은 무천(내몽고 호화호특)지방으로 이사하여 거기서 우문계를 낳고 우문계는 우문도, 우문도는 우문굉을 낳았다, 

 

<1> 6진의 난 : 곳곳의 반란세력들과 이주영의 등장(AD524)

 

AD524년 경 북위의 북쪽 경계선에는 여섯 개의 진이 있었다. 서쪽으로부터 옥야진, 회삭진, 무천진, 무명진, 유현진, 회황진이 그것이다. AD524년 경 옥야진 무장 파륙한발릉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지역 변경 사람들이 호응하여 같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위가고衛可孤라는 무리가 가장 강했다. 6진의 난의 시초가 이 사건이다.

 

당시 우문굉은 무천진 향리 사람들을 규합하여 위가고의 목을 베었다. 그 후 우문굉은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중산(하북성 보정)지역으로 이사했지만 거기서 그 지역 반란군 선우수례에게 함락 당했고 선우수례는 우문굉에게 고향 무천으로 가서 무리를 데려오라고 독촉했다. 그 뒤 우문굉은 정주가 이주영에게 함락될 때 전쟁터에서 죽었다. 우문굉의 아들 8척 장신 우문태는 흑달(검은 수달)이라는 병명이 있을 정도로 얼굴이 검었는데 어려서부터 담이 크고 가사에는 관심이 없이 재물을 베풀고 선비를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아버지를 따라 반란군 선우수례의 수하로 있었는데 선우수례가 갈영에게 피살되자 18세 우문태는 갈영의 장수가 되었다. 우문태는 갈영 밑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형제들과 함께 도망갈 생각을 하던 중에 이주영이 갈영을 체포하고 하북지역을 장악하였다. 이주영은 우문태를 진양으로 데려왔는데 우문태 형제들의 비범함을 보고 배반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고 셋째 아들 우문낙생을 주살하였다. 우문태는 가족의 억울함을 호소력 있게 말하여 이주영을 감동시켜 죽음을 면할 뿐만 아니라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AD524년 3월 북위 조정에서는 북쪽 이민족을 규합하고 옥야진에서 반란을 일으킨 파륙한발릉을 토벌하기 위해 임회왕 원욱을 도독북토제군사로 삼고 군사를 일으켰다. 4월에는 그 지역 사람 혁련은이 파륙한발릉에게 호응하였다. 여러 이민족들이 힘을 합하여 북위 원욱의 군대를 격파시켰고 북위의 안북장군 이숙인도 반란군에게 패배했다. 북위 조정에서는 책임을 물어 원욱을 파직하고 그 대신 70 고령의 이숭을 보냈다. 이숭은 북토대도독으로 임명되고 최섬은 무군장군, 원심은 진군장군이 되어 북정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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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이 대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출정하는 동안 위의 서쪽 진주(천수 지역)에서도 막절대제라는 사람이 진주자사 이언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남진주자사 최유는 성안의 반란 무리들에게 피살되었고 반란세력들은 막절대제에게 가담했다. 조정에서는 옹주자사 원지를 보내 토벌하게 했고 이어서 이부상서 원수의를 서도행대로 삼아 서쪽토벌의 총책임을 맡겼다. 북토대도독 이숭은 북쪽 이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주요 원인이 변경사람들에 대한 대접이 박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그들을 모두 평민으로 인정해 줌과 동시에 그 지역 여러 진을 주로 승격시켜주었다. 그러나 이미 이 지역주민들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조정에서 파견하는 관리들이 현지에 가는 도중에 모두 길이 막혔다. 이곳으로 쫓겨 와있던 원차는 유랑민들을 규합하여 환대하고 조정에서 온 조서를 보여주며 지극히 우대하였다. 

 

이 당시 수용(산서성 삭주지역)에는 흉노계통의 토호 이주영이라는 사람이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는 신묘하고 지혜가 깊었으며 결단력이 뛰어나고 또 사리판단이 분명하여 큰 무리가 그를 따랐다. 그의 조상 때부터 위나라 조정이 북쪽으로 군대를 보낼 때마다 성심성의 물자와 병력을 지원해 보냈으므로 북위조정이 매우 고마워했다.(AD524)

 

 

<2> 호태후의 부활과 원차 제거(AD525)

 

AD523년 북위조정 막강한 실세 유등이 사망하면서 유폐된 호태후 및 황제 주변에 대한 경계는 매우 느슨해졌다. 원차 또한 AD519년 정권을 잡은 이후 몇 년이 지나면서 상황을 느긋하게 생각했다. 원차의 측근들이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고 건의했지만 원차는 듣지 않았다. 호태후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호태후는 비구니가 되어서 절로 들어간다는 핑계로 삭발을 하겠다고 했다. 황제는 호태후 곁에서 절로 들어가지 말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 틈을 타고 호태후는 황제를 붙들고 원차를 제거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황제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고 원차에게 호태후가 갇힌 것을 매우 분해하고 있으며 장차 절로 들어가 비구니가 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원차는 황제의 말이 진솔하다고 느끼고 전혀 의심을 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했다. 

당시 승상 원옹은 비록 지위는 원차보다 높았으나 실권이 거의 없는 허수아비였으므로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호태후와 황제가 함께 낙수를 거닐자 그들을 자기 집으로 초치하여 원차를 제거할 모의를 완성했다. 호태후는 원차에게 물었다. 

 

  ” 그대가 반란의 뜻이 없다면 

    연군장군 직을 내놓고 정치를 보필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소?“

 

원차가 황급히 두려워하며 관을 벗고 영군장군직을 해임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황제는 원차를 상서령, 시중으로 임명하여 병권을 벗게 하였다. 원차는 비록 병권을 벗었지만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별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느긋해 있었다. 시중 목소는 거사를 서둘러야 한다고 호태후를 재촉했다. 이 떄 황제 애첩 중에 반빈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반빈은 울면서 원차가 자신 뿐 아니라 황제까지도 해치려한다고 호소했다. 황제가 그 말을 믿고 원차가 자려고 나간 사이에 원차를 시중직에서 해임하고 입궁을 금지시켰다. 호태후가 다시 섭정을 시작하면서 원차를 서민으로 강등시키고 죽은 유등의 관작을 모두 없애버렸다. 유등의 관을 파서 뼈를 다 부수어버리고 가산을 적몰시켰으며 그의 양자들을 모두 죽였다.

 

원차도 같이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으나 그의 무리들이 세력이 만만치 않았으므로 원차를 안심시키는 뜻으로 후강을 영군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그 후 곧바로 후강을 기주자사로 내쫓은 다음 그가 부임지 기주에 도착할 때 쯤 사람을 보내 죽였다. 원차의 측근 가찬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제주자사로 내보낸 다음 임지에서 죽였다. 원차는 호태후의 여동생의 남편이었으므로 죽이지는 않고 평민으로 그냥 두었다.(AD525)

 

죽은 임성왕 원징의 아들 원순이 원차에게 핍박을 받아 외지로 나가 있었는데 호태후가 그를 불러들여 시중으로 삼았다. 원순은 원차의 처가 호태후 곁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 폐하(호태후)께서는 어찌 여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천하 사람들의 원통함을 풀어주지 못하고 계십니까?“

 

호태후는 말없이 잠자코 있었다. 다른 날 호태후는 시종들에게 유등과 원차가 철권을 요구했지만 주지 않았음을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중서사인 한자희라는 사람이 말했다.

           

  ” 일은 죽일 것이냐 말 것이냐에 달려있는 것이지  

    철권을 줄 것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 주지 않았어도 지금은 죽여야 할 때인데

    왜 오늘날 풀어주고 죽이지 않습니까?“

 

 

태후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 무렵 원차가 지방 6진의 이민족을 규합하여 정주에서 반란을 획책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원차의 친필 서신도 있었다. 호태후가 미적거리는 동안 대신들과 황제마저 독촉하자 호태후는 드디어 결단하여 원차와 그의 동생 원과에게 죽음을 내렸다. 


<3> 북위 주변의 반란과 침입과 신웅의 상소(AD525년) 

    

호태후가 정권을 다시 잡은 AD525년을 전후하여 북위는 끊임없는 외부의 도전과 반란을 겪게 되었는데 크게 네 분야에서 위협해 들어왔다.

 

   ① 파륙한발릉이 북쪽 포두부근에서 침략

   ② 막절념생 등이 서쪽 경천 부근에서 침범

   ③ 남쪽의 형만족의 반란  

   ④ 동남쪽 양나라 침범  

 

북위 장수 신웅이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 군인이 전장에 나서서 죽음을 앞두고도 용감히 싸우는 것은,

    첫째, 명예스러운 이름을 얻고자 함이요,

    둘째, 무거은 상을 바람이요,

    셋째, 형벌이 두려워서이며

    넷째, 화란을 피하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 곳에서 전쟁이 일어났지만 패하는 것은 많고 이기는 것은 적은 것은

    그 연유는 상벌이 분명치 않아서입니다.

    전투가 끝나고 일 년이 지나도 상훈은 없고  

    집에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게 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도 공이 없고

    도망쳐 돌아와도 벌이 없으니 

    누가 목숨을 내놓고 싸우려 하겠습니까.

    황제께서 직접 나서셔서 호령을 하시고 

    상벌을 정확히 내리신다면 반드시 이기고 적은 토멸될 것입니다.“

 

황제는 신웅의 상소문을 살펴보지도 않았다.   

 

 

<4> 재정고갈과 증세와 민심이반(AD526)

 

끝없이 일어나는 반란과 그를 수습하기 위한 군사징발로 북위의 조정은 크게 어려웠다. 앞으로 6년까지의 조세를 미리 거두고서도 부족하여 관료들에게 내리던 술이나 육포를 모두 없앴고 시전 점포는 물론 시장에 출입하는 백성들에게도 일인 당 1전의 세금을 물렸다. 백성들이 탄식하며 원망하였다. 이부낭중 신웅이 또다시 상소문을 올렸다. 

 

  ” 화이 만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군수와 현령이 적합하지 못하여 원성을 샀기 때문입니다.

    모두 뇌물이나 배경으로 직위를 얻었기 때문에

    황실에서 조서가 내려와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무시하고 있습니다.

    출신지역보다는 능력을 앞세우시고

    3년마다 관리를 평가하여 승진과 폄출을 정하시고

    재능이 크고 높으면 경사로 부르시되

    군수나 현령직을 거치지 않으면 중앙정부에 들이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군수나 현령들이 힘써 선정을 펼쳐서 

    억울하고 굽어진 것을 바로 잡으려 노력할 것입니다.“

 

조정은 듣지 않았다. 

 


<5> 호태후와 황제의 멀어짐(AD528)

 

북위황제 원후의 나이는 열여덟이었다. 호태후는 황제가 장성하면서 자신의 모든 비행과 잘못을 알게 될까 두려워하여 황제가 총애하는 사람들은 죄다 무고하거나 이유를 찾아내 쫓아내었다. 황제의 총신 곡사회를 호태후가 외직인 자사로 임용하려 했는데 곡사회가 거부하자 죄를 덮어 그를 죽였다. 또 선비족 언어를 잘 하는 밀다도인이라는 사람이 항상 황제 곁에 있었는데 이 사람 또한 황제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호태후가 사람을 시켜 살해했다. 황제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모자간에는 큰 틈이 벌어졌다.

 

 

<6> 호태후의 황제 원후 독살과 영웅 이주영 (AD528)

 

이 당시 북위 최고 군권은 이주영에게 있었다. 그는 흉노계통의 이민족으로써 병,사,운,광,항,운,육, 이렇게 여섯 주의 대도독이었다. 고환, 단영, 울경, 채준, 우문태는 갈영의 반란에 참여했다가 항복하여 이주영의 휘하로 들어왔다. 병주자사 원천목은 이주영을 형으로 섬길 정도로 사이가 가까웠다. 그리고 장하도독 하발악도 이주영 곁에서 훌륭한 참모역할을 했다. 원천목과 하발악은 이주영에게 하루 빨리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들어가 황제 주변의 간신들을 몰아내고 정치를 바로 세우라고 권고하였다. 이주영이 편지를 써서 호태후에게 요청했다.

 

  ” 산동지역의 관군이 연거푸 산적들에게 패배하고 있으니

    제가 기병 3천을 가지고 상주(하북성 업)로 들어가 구원하게 해주십시오.“  

 

호태후는 이주영을 의심하였으므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주영이 다시 편지를 올렸다.

 

  ” 그렇다면 군대를 북쪽 하구(하북성 래원)으로 보내 

    정형(하북성 정형)과 부구(하북성 무안)을 점령하여

    도적의 배후를 끊어 놓겠습니다.“

 

마침내 허락이 떨어져 이주영은 군사를 동쪽으로 움직였다. 호태후의 심복 서흘은 이주영 주변에 있는 막료들에게 철권을 주면서 회유하여 이주영과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이주영은 호태후와 그의 측근들의 행태에 매우 분개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북위 황제는 호태후와 그의 일당을 조정에서 몰아내려는 생각으로 이주영에게 편지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이주영은 고환을 선봉으로 삼고 출병했는데 상당(하북성 장치 북단)에 이르렀을 때 조서가 내려와 정지시켰다. 조정대신 정엄과 서흘은 이주영의 군대가 남하하자 위협을 느끼고 호태후와 결탁하여 숙종 황제 원후를 독살했다.(AD528년 2월25일) 호태후는 딸을 황제로 세우고 크게 사면령을 내렸다. 그 다음날 생각을 바꾸어 임조왕 원보휘의 아들 세 살짜리 원소를 황제로 세웠다. 원보휘는 원굉의 아들 원유의 아들로 원후와는 사촌지간이다. 

 

 

<7> 이주영의 호태후 살해와 원자유 옹립(AD528)

 

상당에 머물고 있던 이주영은 호태후의 원후 독살과 원소 옹립조치를 듣고 격분했다. 측근 원천목에게 분을 삼키며 말했다.

 

  ” 황제가 겨우 열여덟으로 아직 어린아이인데

    그보다 더 어린 말도 못하는 아기를 받들고 

    천하를 군림하려하다니 그게 말이 되는 예기인가!

    나는 철기병을 이끌고 먼저 애도를 표한 다음에  

    간사하고 요망한 무리들을 잘라내고 어른 군주를 세우려 하는데 어떤가?“

 

원천목이 동조하므로 이주영은 상소문을 조정에 올렸다.

 

  ” 대행께서 세상을 등진 것은 만인들이 짐독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찌 천자가 불편한 데 의원을 부르지 않았단 말입니까.

    어찌 천자가 위독한데 고귀한 친척들이 곁에 없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찌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또 황제의 딸을 세워 사면령을 내렸으니 

    하늘과 당을 속인 것이며 조정과 백성을 속인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이 대궐로 들어가서

    황제가 붕어한 이유를 찾아내고

    서흘과 정엄과 같은 악독한 무리들의 죄를 밝혀내어  

    하늘을 같이하고 있는 수치스러움을 깨끗이 씻고

    멀고 가까운 사람들의 원한을 사죄한 다음에

    다시 종친을 택하여 보배로운 자리를 잇도록 하겠습니다.“

호태후는 이주영의 사촌동생 금위군 이주세륭을 급히 이주용에게 보내 위로하고 타이르도록 시켰다. 이주영이 이주세륭에게 남아있기를 권유했으나 사양하면서 말했다. 

 

  ” 지금 조정이 형님을 의심하기 때문에 저를 보낸 것 아닙니까.

    제가 여기 남아있으면 저들이 더욱 확신하고 대책을 세울 것이니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이주영은 이주세륭을 보낸 뒤 팽성무선왕 원협의 아들 원자유를 세울 생각이었다. 조카 이주천광을 몰래 원자유에게 보내 의사를 타진했고 원자유 또한 그것을 수락했다. 이주영은 병사를 일으켜 상당에서 내려왔다. 이주세륭도 그 소식을 듣고 몰래 낙양을 빠져나와 합류했다. 호태후는 왕공을 모두 불러 대책을 의논했는데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서흘이 나서서 말했다.

 

  ” 이주영 작은 오랑캐에 불과합니다.

    숙위병으로 충분히 막아냅니다.

    더우기 멀리서 와서 피곤할테니 

    험준한 곳을 막고만 있어도 저절로 무너집니다.“

 

호태후는 이신궤를 대도독으로 삼고 정계명과 정선호는 하교(황하 다리), 비목은 소평진(하남성 맹진)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는 낙양으로 사람을 보내 원자유를 초청했다.(AD528년 3월) 4월 원자유가 형 팽성왕 원소와 동생 패성공 원자정과 함께 숨어서 황하를 건너 하양(하남성 맹현)에서 이주영과 만났다. 조정에서 파견한 정선호와 정계명은 성문을 열고 이주영의 군대를 받아들였다. 이신궤는 싸움도 없이 하교가 무너진 것을 보고 회군했고 비목도 이주영에게 투항했다. 서흘은 말 10필을 가지고 야밤에 동쪽 연주로 달아났으며 정엄도 고향으로 도망쳤다. 호태후는 모든 비빈을 성 밖으로 내보냈고 본인도 머리카락을 다 깎았다.이주영은 백관을 불러 원자유를 맞이하도록 했다.

 

이주영을 보자 호태후는 여러 말이 많았는데 이주영은 옷을 털고 일어나 호태후와 어린 주군 원소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비목이 이주영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 공의 병사와 말은 1만이 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전투를 이겨서 들어온 것이 아니고 

    안으로 무너져 내린 것이므로 

    사람들이 우리를 가볍게 여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백관들과 주민들을 크게 처벌하고 주살한 뒤에

    현명한 사람들을 세워두지 않으면  

    곧바로 안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주영이 그럴듯하다고 판단하고 왕공 귀족 고위관료 약 2천여 명을 행궁 서쪽에 세워놓고 주살하였다(이를 하교河橋의 사건이라 부름). 승상 고양왕 원옹, 사공 원흠, 의양왕 원략이 이 때 죽었다. 이주영은 군사들에게 원씨가 멸망하고 이주씨가 일어섰다고 외쳤다. 이때부터 사실상 북위는 멸망하고 분열된 셈이다. 이때 북위의 남쪽 영역에 있던 많은 자사현령들이 군현을 들고 양나라로 투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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