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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P)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10월09일 17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78> 유연 공격문제(AD486)

 

유연의 서부지역에서 칙륵이 유연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유연 복명돈 가한이 대군을 몰아 사막지역까지 토벌에 나섰다. 위의좌복야 목량 등이 이 틈을 타서 유연을 공략하자고 하자 중서감 고려가 나서서 말렸다.

 

  ” 옛 적에는 해내가 통일이 되었으므로

    흉노를 정벌할 수가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남쪽에 오랑캐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

 

위 주군이 말했다.

 

  ” 병사를 일으키는 것은 흉기와 같아서 

    성인들이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사용한다고 했다.

    선제께서 여러 번 군사를 일으킨 것은 

    오랑캐들이 귀순하지 않고 버티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짐이 선제의 태평성세 제업을 물려받았는데

    어떻게 아무 이유도 없이 병사와 갑옷을 움직인단 말이냐!“

 

 

<79> 위의 대기근과 한기린 표문(AD487)

 

봄과 여름 수도 부근 북위에 큰 가뭄이 들어 사람들이 죽고 소의 역병도 번졌다. 6월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정치의 잘못을 숨김없이 지적하도록 했다. 제주자사 한기림이 표문을 올렸다.

 

  ” 백성들이 놀고먹는 일에 급하여 극도로 사치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농민들은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부족하여 어렵습니다.

    날로 농민의 숫자는 줄어들고 논밭은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곡식과 비단은 부족한 데 보화는 넘쳐나고 있습니다.  

    사치를 금하시고 농상을 권장하십시오. 세수가 자꾸 줄어들고 있으니

    면포로 세금을 받지 마시고 곡식으로 받아서 채우십시오.“

 

7월 국가가 나서서 창고를 열고 곡식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0월에는 비단에 수를 놓는 사람들과 공사를 담당하는 인부들을 궁에서 내보냈다. 궁궐의 창고에 가득 쌓여있는 무기의 8할을 내보내었고 , 면포는 절반 이상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북위 주군이 고우(고윤의 사촌)에게 도둑을 없애는 방법을 물었다. 고우가 대답했다.

 

  ” 옛날 송균이 덕으로 정치를 하니 호랑이가 황하를 건너갔고

    탁무가 교화를 시행하니 황충이 경계선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도둑은 실로 사람이니 똑바른 사람을 수재로 임명하시고

    백성을 제대로 교화시키면 도둑을 방지하는 일은 쉬울 것입니다.“

 

고우는 또 이렇게 제언했다.

 

  ” 지금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치적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근무 연수만을 가지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재주와 치적을 가지고 사람을 선택해야만          

    똑바른 관리들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왕이란 사람들이 비록 작위는 높고 상금은 많이 받을 지라도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에는 무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재능을 가려서 잘 임명하셔야 합니다.“

 

북위 군주는 고우를 서연주자사로 임명해 남부의 요충지인 활대를 수비하도록 내보냈다. 그 해에 북위는 현과 당에 강학과 소학을 세웠다. 

 

 

<80> 북위 이표의 안민지책(AD488) 

 

북위 황제 탁발굉이 백성은 편안히 다스리는 방법을 물었다. 비서승 이표가 밀봉하여 황제께 올렸다.

 

  ” 힘 있는 권문세가들의 사치가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저택과 수레와 의복에 등급을 정하여 시행해야 합니다.

    둘째로 나라의 미래는 후계자에게 달려있습니다.

    태자를 가르칠 사부를 제도적으로 세워서 가르쳐야 합니다.

    셋째로 한나라처럼 상평창을 만들어 만일에 대비한 곡식을 저장해 둬야 합니다.

    가문이 들었다고 풍년이 든 지역으로 주민들을 옮기는 방법은 

    매우 부적절하고 불편합니다. 

    넷째로 국가로 조세로 받은 것 중에서 남는 것은 백성들에게 되 파시고 

    풍년이 들면 국가가 나서서 곡식을 사들여서 흉년이 들 때 2푼의 이자를 받고

    되팔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은 관아에서 나오는 포백을 사려고 

    힘써 농사를 지을 것이고 재물을 쌓아두었다가 곡식도 사들일 것입니다.

   다섯째로 하표(황하 이남) 7개 지역 인재도 등용하여 관직을 부여하십시오.

   여섯째로 죄가 부자지간에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골육의 정을 무시하는 것이니 

   이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부형 간에 부끄러움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일곱째로 관료들이 상을 당하면 모두 상복을 입고 관직에 임하도록 해야 합니다.“

 

북위 주군이 이충의 건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시행에 옮겼다. 이로써 북위는 공사간에 매우 풍요로워졌고 수재나 한재가 있어도 백성들이 어렵거나 고달프지 않았다. 

   

 

<81> 뇌물죄 지은 황족 탁발천사와 탁발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AD489)

 

북위의 황족 탁발천사와 탁발정이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다. 풍태후와 탁발굉이 이 문제를 상의하는 회의를 열었다. 풍태후가 말했다.

 

  ”  경들은 이 황족을 살려줘서 명예를 훼손시켜야 하겠는가

     마땅히 죽여서 법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였다.

 

  ” 두 왕은 경목황제(탁발황)의 아들이니 가엽게 여기시고 살려줘야 합니다.“

 

태후는 대꾸하지 않았다. 탁발굉이 말했다.

 

  ” 두 왕의 죄는 용서하기 어렵다.

    그러나 태황태후(풍태후)께서는 오로지 고종(탁발준)의 우애가 깊으심을 뒤따르고

    또 남안왕(탁발정)의 효성 깊으심이 소문이 자자함을 감안하여

    나란히 감형하여 관작을 빼앗고 죽을 때까지 벼슬을 못하도록 한다.“

 

       

<82> 풍태후 사망(AD490) 

 

AD490년 9월 태황태후 49세의 나이로 풍씨가 죽었다. 주군 탁발굉에게는 할머니였다. 그는 5일 간 한 국자의 물도 입에 넣지 않고 슬픔으로 야위었다. 양춘이라는 사람이 나섰다.

 

  ” 폐하는 조종의 대업을 짊어지시고   

    만국에 군림하시는 데 어찌하여 필부와 똑같이 하고 계십니까.

    여러 신하들이 두렵고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설령 폐하께서 만대에 가장 효성스런 인주가 되시려고 하시지만

    종묘는 어떻게 됩니까.“ 

 

탁발굉이 크게 깨닫고 죽을 한 모금 먹었다. 그 후 조정에서는 탁발굉의 복상문제로 심한 논쟁이 오고갔다. 풍태후는 탁발굉이 영민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생 탁발희를 세우고 탁발홍을 죽인 것처럼 탁발굉도 폐위시키려고 했다. 빈 방에 가두고 3일 간 음식을 굶기기도 하고 매도 여러 번 때렸지만 태위 동양왕 탁발비와 상서우복야 목태와 상서 이충의 간청이 있어서 멈추었었다. 그러나 탁발굉은 한 번도 섭섭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고 오직 탁발비와 목태와 이충에게 고마운 마음을 간직했다. 풍태후가 죽었음에도 자신을 풍태후에 모함한 사람들을 문책하지 않고 덮어두었다. 풍태후에 대한 슬픔이 깊어서 중요한 정무를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탁발굉이 정사를 맡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난 AD491년 정월 24일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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