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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콘의 역사-기원, 이상, 그리고 실패 <6> 미완으로 끝난 1991년 걸프 전쟁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7월31일 14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7월18일 13시17분

작성자

  • 이상돈
  •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대 국회의원,

메타정보

본문

 <6> 미완으로 끝난 1991년 걸프 전쟁

 

대부분의 전쟁이 그러하듯이 1991년 걸프 전쟁도 오판으로 시작됐다. 1990년, 미국은 소련의 붕괴로 인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란과의 전쟁으로 국력이 피폐해졌지만 아직도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는 이라크는 이란과 시리아가 자국을 공격할 것이며 쿠웨이트가 거기에 가담하고 있다고 믿었다. 

 

쿠웨이트가 이라크와의 국경지대에서 석유생산을 늘리자 양국 간에는 긴장이 감돌았고, CIA는 이라크가 국경지대에 병력을 증강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그런 와중에 이라크 주재 미국 대사는 사담 후세인을 만났으나 강력하게 경고하지 못해서 미국이 마치 불개입할 것 같은 잘못된 시그널을 후세인에게 주었다. 1990년 8월,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공했고, 쿠웨이트는 힘없이 무너졌다.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미 공군을 사우디에 파견하고 항모 전단을 주변 해역에 보냈다. 또한 이라크에 대해서 쿠웨이트에서 철수할 것을 단호하게 요구했다. 이라크가 거부하자 미국은 유엔 안보리 결의를 통과시켰고, 다국적군을 조성해서 1991년 1월 16일부터 42일 동안 공중 폭격과 미사일 공격을 단행했다. 

 

2월 15일부터 지상군 작전이 시작됐고 미 육군 기갑부대는 이라크의 탱크 수천 대를 파괴하는 개가를 올렸다. 지상군 전투는 5~6일 만에 종료됐고, 2월 28일 부시 대통령은 쿠웨이트 해방과 전투행위 종식을 선언했다. 걸프 전쟁은 다국적 연합군 50만 대군이 단기간에 전쟁을 끝낸, 당시 합참의장 콜린 파월(Colin Powell)의 전략이 결실을 이룬 전쟁이었고, 이를 통해 미국은 우수한 군사력을 과시해서 초강대국임을 증명해 보였다.   

 

지상군 작전이 개시되기 전에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국민들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도록 저항해야 한다고, 이라크에서의 민중봉기를 부추겼다. 이 메시지는 아랍어 방송을 타고 이라크 전역에 퍼져나갔다. 한편 휴전을 선언하면서 연합군 야전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은 이라크에 대해 고정익 전투기 운용은 금지하면서 헬기 운용은 허락하는 조치를 취했다. 

 

아랍어 방송을 통해 부시의 메시지를 들은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 족과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주민들은 대규모 무력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사담 후세인에 충성하는 공화국 수비대는 헬기를 동원해서 쿠르드와 시아파 주민들을 마구 학살했다. 이들은 신경가스와 겨자가스 같은 화학무기도 동원해서 대규모 살육을 감행했다. 

 

쿠르드와 시아파 주민에 대한 대학살이 진행될 때 그 부근에는 미 지상군 병력이  있었고 무장헬기도 대기하고 있었다. 참혹한 학살을 목격한 현장 지휘관들은 합참에 발포명령을 요구했지만 합참은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았다. 후세인의 정예군인 공화국 수비대를 섬멸하기도 전에 휴전명령이 떨어진 것도 현지 장교들은 불만이었는데, 소수파 주민들이 무차별하게 학살되는 현장을 보고 있어야 했으니 이들은 충격과 좌절에 휩싸였다. 

 

합참의 명령만 떨어지면 대기 중인 전투헬기로 양민 학살을 자행하는 이라크 헬기들을 섬멸할 수 있었음에도 미군은 그대로 철군하고 말았던 것이다. 본국에 돌아 온 이들은 발포명령을 거부한 합참의장 콜린 파월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됐고, 언론도 과연 방관한 것이 적절했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부시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이던 브렌트 스카우크로프트(Brent Scowcrof) 장군은 이라크를 점령해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후세인 정권이 있어야 이란을 견제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에 가장 크게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폴 월포위츠였다. 

 

당시 국방차관보였던 월포위츠는 사담 후세인을 남겨 둔 것은 큰 실책이었다고 공공연하게 비판의 목소리를 내었다. 그는 무력하게 학살되는 소수민족을 그대로 버려둔 것은 강대국의 직무포기라고 생각했는데, 유태인인 그는 무력하게 가스실에서 죽어갔던 유태인들을 연상했을 수도 있다.  

 

그 후 미국은 이라크에 대해 경제제재와 비행금지(No Fly)구역 설정 같은 통제(containment )정책을 유지했다. 월포위츠는 앞으로의 유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국방계획지침(Defense Planning Guidance)을 작성했다. 그는 통제정책은 냉전시대의 낡은 정책이며 미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필요하다면 독자적으로라도 선제공격(preemptive attack)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쟁을 실제로 겪어 본 합참의 장군들에게 이런 주장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별다른 지지를 얻지 못했다. 

 

1992년 대선에서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함에 따라 월포위츠는 국방부를 떠나서 대학으로 돌아갔고, 콜린 파월도 퇴역했다. 해외 분쟁에 대해 미국이 개입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클린턴 행정부 들어서도 계속됐는데, 이번에는 유고연방의 해체 과정을 두고 발생한 인종청소와 관련해서였다. 폴 월포위츠는 존스 홉킨스 대학 국제대학원장이며 전직 국방차관보로서 이런 문제가 제기 될 때마다 선제적 군사개입을 주장하게 되며, 그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이론가들은 2000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의 유력 주자인 조지 W. 부시 텍사스 주지사 주변으로 모이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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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걸프전 당시 콜린 파월,  노먼 슈워츠코프, 폴 월포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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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20년07월18일 13시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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