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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콘의 역사-기원, 이상, 그리고 실패 <1> 유태인, 그리고 신보수주의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7월20일 14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7월22일 09시28분

작성자

  • 이상돈
  •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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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오콘’에 대해서 한번 정리해 보고 싶은 생각을 전부터 갖고 있었다. 그들이 주도했던 이라크 전쟁은 지정학적 고려를 무시한 탓에 실패했더라도 그들이 남긴 지적 유산(intellectual legacy)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존 볼턴의 책과 더불어 다시 네오콘에 관한 비난이 일고 있어 차제에 이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7회에 걸쳐 그 기원과 전개과정을 짚어본다.​ 

 

<1> 유태인, 그리고 신보수주의 

 

네오콘(Neocon)이라는 단어가 보수 그 자체를 폄하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신보수주의를 주창한 일단의 학자들이 유태인이고, 이들이 친이스라엘 성향이다 보니 이를 확대해서 유태인 전체를 폄훼하는 수준으로까지 인식되고 있다. 우선 우리나라에서 유태인에 대한 선입견이 좋지 않은 것 같다. 섹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덕분인지, 웨스트뱅크를 점령한 이스라엘 때문인지, 여하튼 복합적인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이른바 진보 매체는 거의 노골적으로 반(反)이스라엘, 반(反)유태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 유태인들이 세계 금융을 장악하고, 점령지 아랍인들의 인권을 유린하며, 미국을 움직이고 전쟁을 일으킨다는 식이다. 개신교 열성신자들도 유태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최근에 남북 화해 무드가 물 건너가고 게다가 존 볼턴의 책이 파문을 일으키자 볼턴을 네오콘 (Neocon)이라고 평가절하 해 버리는 기사를 많이 보게 된다. 이처럼 네오콘은 아주 나쁜 집단이며 유태인이 움직이는 친이스라엘 극우세력이라는 식의 인식이 우리 사회, 특히 현 정권 지지세력 사이에 팽배해 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존 볼턴은 유태인이 아니고, 존 볼턴은 네오콘의 본류가 아니다. 사실 네오콘이라는 명칭부터가 폄하하는 용어가 되어 버렸다. 네오콘으로 불리는 이들은 자신들은 신보수주의자(neoconservative)라고 부르지만, 이를 줄여서 밖에서 통칭하는 네오콘은 경멸적 뉘앙스가 담겨있다. 

 

여하튼 우리가 흔히 네오콘이라고 부르는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는 일단의 유태인 지식인 집단이 그 뿌리인 것은 맞는데, 그 배경은 유태인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유태인을 비난하고 적으로 대하는 반(反)유대주의(anti-Semitism)는 유럽에서 그 뿌리가 깊다. 히틀러라는 괴물이 나타나기 전에도 유태인들은 유럽 사회에서 차별을 받았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개신교 백인의 나라로 세워졌다. 교회가 세속적인 분야에 개입하는 것을 싫어했던 토머스 제퍼슨 덕분에 미국 헌법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미국에서 동유럽과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가톨릭 신자들은 2류 시민 대우를 받았다. 유럽에서 건너온 유태인들도 마찬가지거나 그 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근면한 유태인들은 미국 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잘 알다시피 수학이나 과학 분야에서 이들은 뛰어났다. 인문사회 과학 분야에서 다른 전공에 대해선 내가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법조계에서 유태인이 미친 영향은 심대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유태인인 루이 브랜다이스(Louis Brandeis)를 연방대법관으로 임명한 일은 일대 사건이었다. 브랜다이스는 인권과 근로기준법에 대한 진보적 판결로 시대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그 전통을 이어받은 벤자민 카르도조 (Benjamin Cardozo), 펠릭스 프랑크퍼터(Felix Frankfurter)대법관도 유태인이었다. 이 세 사람은 미국 법의 지평을 바꾸어 놓았다고도 할 만하다. 

 

1960년대 들어서 대법관을 지낸 아서 골드버그(Arthur Goldberg)와 에이브 포터스(Abe Fortas)도 유태인이었다. 1969년에 포터스가 사임한 후 주로 공화당 대통령이 연방법관을 지명했기 때문에 클린턴이 대통령에 취임하기까지는 유태인 대법관의 맥이 끊겼었다. 1993년에 클린턴 대통령은 유태인인 러스 긴스버그(Ruth Bader Ginsburg)를 대법관으로 임명했고, 이어서 역시 유태인인 스티븐 브라이어(Stephen Breyer)를 대법관으로 임명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엘레나 케이건(Elena Kagan)을 대법관으로 임명함에 따라 현재 연방대법원 대법관 9명 중에 유태인이 3명이나 됐으니, 놀라운 일이다. 카르도조를 제외하면 유태인 대법관은 모두 민주당 대통령이 임명했으며, 이들의 판결 성향은 모두 진보적이었다. 유태인들의 성향이 민주당이고 또한 진보적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핍박 받았던 소수파였기 때문이다.  

 

법조계는 사정이 이러한데, 어떻게 해서 일단의 유태인 정치이론가들이 오늘날 신보수주의란 철학을 만들어서 미국의 대외정책을 움직였다는 말인가?  아마도 이런 배경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제1차 대전이 끝나고 유럽에선 유태인 대이동이 시작됐다. 1차 대전 중인 1917년 영국 정부는 발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을 발표해서 당시 오토만 치하에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태인 정착지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렇게 해서 1차 대전 후에 영국의 통치령에 속하게 된 팔레스타인으로 유태인들이 대거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많은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어차피 자신의 고향이 없이 살아온 이들은 정착하여 살면 그곳이 고향이었으니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팔레스타인이나 미국으로 이민을 나간 유태인들은 각자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됐다. 그러나 나치 독일은 물론이고 나치가 점령한 오스트리아, 프랑스, 베네룩스 3국, 그리고 폴란드 등 동유럽에 살던 유태인 600만 명은 수용소 가스실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1차 대전 후 나치가 집권하기 전에 불안한 정세를 알아차리고 미국으로 건너온 유태인들은 유럽에 남아 있던 그들의 가족 친척 친지가 가스실에서 죽어 나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인류사에 유례가 없던 유태인 대학살이란 비극은 2차 대전 후에 유태인에 대한 동정을 확산시키는데 역할을 했다. 1948년에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언하는데, 미국이 가장 먼저 이를 승인했다. 미국 내 유태인들은 대개 민주당을 지지했고, 이들의 지지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장 먼저 지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1953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끄는 공화당 행정부가 들어서자 상황은 급반전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을 이끌어 갔던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유태인을 싫어했고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절대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유태인들이 미국 공화당을 지지하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한편 1차 대전이 끝나고 나치가 집권하기 전에 미국으로 건너온 유태인 중에는 나중에 시카고 대학 교수가 되어 미국의 철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와 나중에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차관을 담당하게 되는 폴 월포위츠(Paul Wolfowitz)의 부친도 있었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정치철학으로서 신보수주의의 뿌리라고 평가되며, 폴 월포위츠는 조지 W. 부시의 전쟁정책을 직접 기안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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