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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0 : 정통의 전량(前涼)을 실질적으로 무너뜨린 장조(a)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6월26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6월20일 12시12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4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장궤가 AD301년 세운 전량(前涼)은 5호16국 중에서 가장 먼저 선 나라이고 보기 드물게 한족의 나라이며 또 가장 오래 지속된 나라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50년을 넘게 지속되지 못했으나 전량의 경우에는 AD301년에 건국하여 AD376년 전진의 부견에게 멸망하기까지 76년이나 지속되었다.   

 

(1) 서진(西晉)의 몰락기와 하서회랑(감숙성 중부 무위와 돈황 사이 지역)의 양주(涼州)

 

AD300년 당시 통일 대국 서진(西晉)은 이미 10여년 지속된 팔 왕자의 난(AD291-AD306)으로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었다. 서진 조정은 희대의 어리석은 혼군 사마충을 등에 업은 가황후와 가황후 외가인 곽창이 정권을 농단하면서 태자 사마휼 마저 타살하는 혼란 상황이었다. 가황후 세력을 타도하려는 황가 종실은 결집했고 조왕 사마륜의 힘으로 가후가 독살되면서 태자 사마휼이 복권되었으나 스스로 황제가 되려는 야욕을 지닌 사마륜의 치하에서 정권이 혼란하기는 가황후 집권 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AD301년 장궤(AD255-AD314)는 46세로 서진 조정의 산기상시였다. 산기상시란 황제의 어가를 호위하는 무관이면서 동시에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바로잡는 비서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직책이다. 안정(감숙성 진원) 사람으로 후한시대 이래 대대로 효렴에 오르면서 유학의 가문을 이어온 집안이었으며 장궤 또한 명민하면서도 학문을 좋아해 소문이 널리 퍼져 있던 사람이었다. 당시 서진 조정의 실세 중 하나였던 중서감 장화가 장궤를 높이 평가하여 태자서인, 정서군사 등 중책을 맡기기도 하였다.

 

중앙 조정이 내분으로 언제 나라가 망할지 모르는 상황이 계속되자 장궤는 하서(감숙성 서북부) 만이라도 점거하여 보존할 생각을 품었다. 당시 양주에는 선비족과 흉노족으로 구성된 도적이 들끓었고 중앙조정은 혼란을 바로 잡을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고향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장궤는 장화에게 양주 자사가 되기를 요청해서 AD301년에 양주 자사가 되었다. 송배, 범원 등을 참모로 삼아 반란적도 척결하였으며 아홉 군 자제 5백여 명을 불러들여 학교를 세우고 숭문좨주, 별가 등을 두어 행정질서를 바로잡았으며 춘추에 향사의 예를 실시하는 등 전통적 유가통치의 틀을 다시 바로 잡으려고 노력했다.

 

(2) 쓰러지는 서진 조정의 마지막 보루 장궤(AD305)

 

장보가 진주자사가 되어서 천수 태수 봉상을 살해하려고 했다. 자신의 권위를 세울 목적이었다. 그리고 농상태수 한치도 진주 치소로 소환했다. 불안감을 느낀 한치의 아들 한박이 장보를 역공하고 장보를 죽였다. 장궤가 자사로 있는 양주의 사마 양윤이 한치를 토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장궤는 서진 조정의 황제 혜제에게 사자를 파견해 허가를 받은 다음에 한치를 토벌하자고 했다. 혜제는 사마모를 사자로 파견해 검을 하사하여 토벌을 허락했다.

 

장궤는 중독호 범원에게 2만 명 군사를 주어 한치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다. 얼마 후에 도적무리 약라발능이 양주로 침입하자 사마 송배를 파견해 그를 죽이고 10여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약라발능 토벌의 공을 세운 장궤에게 서진 조정은 안서 장군을 더해주고 식읍 1000호를 덧붙여 받았으며 안락향후로 봉했다. 이것을 계기로 장궤는 하서지역을 확실한 자신의 곳간으로 만들 수 있었다.

 

서진 조정에 반기를 든 왕미 등이 청주, 서주, 연주 및 예주를 공격해오자 장궤는 독호 북궁순을 파견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경사(낙양)을 호위하게 했으며, 조정에서는 그런 장궤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서평군공을 책봉했지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당시 여러 주, 군의 사신 중에서 경사까지 공물을 바치러 가는 사람이 없었지만 장궤만은 홀로 새해와 사계절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쳐 충성을 바쳤다. 

 

(3) 장궤의 중풍과 반란 기도(AD308)

 

AD308년 53세였던 장궤는 중풍 때문에 입으로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자 그의 아들인 장무가 주의 모든 정치군사 업무를 관장하였다. 양주지역 호족인 장월은 병든 장궤를 축출하기 위해 측근 장진과 조거 등을 불러 모아 음모를 꾸몄다. 먼저 장안의 실세 사마모에게 사신을 보내 진주자사 가감을 양주자사로 대신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양주자사 가감은 그 계획에 적극 찬동했다. 그러나 가감의 형은 그런 경거망동의 동생을 심하게 나무랐다.

 

  “  장 양주(장궤를 말함)는  한 시대의 인물인데  

     네가 무슨 덕을 가지고 그를 대신할 거냐? “

    

양주자사 가감이 동참하는 계획을 포기했다. 장진과 조거는 조정에 다시 양주자사 교체를  요청했지만 회답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장진이 주변 지방으로 격문을 내고 강제로 장궤폐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양주 군사 두탐이 양주 업무 관장하게 하면서 그에게 조정에 편지를 띄워 장월을 자사로 요청하게 하였다. 

양주자사 자리를 놓고 주변이 혼란해지자 자사 장궤는 의양으로 자리를 비키겠다고 제의해왔다. 그 때 양주의 장사 왕융, 참군 맹창이 장진이 보낸 격문을 밟아 쪼개고 들어가서 말했다.

 

     “ 진의 황실에 많은 사고가 있었지만

       밝으신 장공께서 서하지역을 어루만지심으로

       서쪽이 편안했습니다.

       장진 형제가 방자하고 흉악하게 자리를 탐내고 있으니

       마땅히 북을 쳐서 그들을 죽여야 합니다.

       여기서 물러나시다니 그것이 말이나 되는 말입니까? “

 

장안으로 보냈던 장궤의 장자 장식이 경사에서 돌아오자 장궤는 그를 중독호로 임명하고 군사를 발동하여 장진 토벌에 나섰다. 동시에 장진의 생질 영호아를 보내 설득시켰다. 영호아의 말을 들은 장진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 못 된 사람이 나를 그르쳤구나!”

 

장식에게 가서 죄를 받겠다고 영호아에게 약속했다. 장식은 조거를 격퇴했다. 장진과 조거의 상소문을 받은 서진 조정에서는 시중 원유를 양주자사로 임명하기로 했다. 그 사이에 양주 치중(주 총무부서장) 양담이 말을 급히 달려 장안으로 가 자신의 귀를 잘라 쟁반 위에 놓고서 그동안 사정과 함께 장궤가 억울한 무고를 받은 것을 역설하였다. 남양왕 사마모는 급히 표문을 띄워 시중 원유의 양주자사 임명을 중단한다고 명령했다. 무위태수 장전 또한 표문을 올려 장궤의 신임을 요청했다.

 

서진 황제 회제 사마치가 조서를 이렇게 내렸다.

 

  “ 남양왕 사마모의 표문대로 시행하고

    역도 조거의 목을 베도록 하라.“

 

황명을 받은 장궤는 보병과 기병 3만의 군사로 조거를 토벌하여 사로 잡은 뒤 참수했다. 이로써 양주의 정치적 안정과 장궤의 지위가 확고해졌다.(AD308) 장궤SMS AD310년 진서장군 및 도독농우제군사로 지위가 올라갔으며 조정의 광록대부 부지와 태상 지우가 경사의 기근을 알려오자 말 500필과 담요 3만 장을 급히 보내 어려움을 도왔다. 다음해(AD311) 조정은 장궤의 충성심을 높이 받아들여 거기대장군에 임명하였다.

 

(4) 전조 유요의 낙양함락(AD311년 6월)

 

사마월이 병으로 죽자(AD311년3월19일) 이를 알아차린 석륵은 경무장한 기병을 풀어 동해로 돌아가는 사마월의 영구를 추격했다. 사마월의 10만 대군은 석륵에 패해 거의 멸절되었다. 석륵은 포로로 잡은 서진 조정의 태위 왕연과 사마범 등 모든 신료들을 칼을 더럽힐 수 없다고 하면서 담장에 세워놓은 뒤 담장을 무너뜨려 압살시켰다. 석륵은 영구에 안치된 사마월의 시체를 불태우며 이렇게 말했다.

 

“ 세상의 난적은 바로 이 사람이다.(亂天下者此人也) 

  내가 천하를 위하여 보복에 나섰으니(吾爲天下報之)

  따라서 이 자의 뼈를 불태움으로써(故焚其骨) 

  하늘과 땅에 이를 고하는 바이다.(以告天地)“

  

사마월의 죽음으로 8왕자의 난이 종결되기는 했으나 서진은 허울뿐인 나라에 불과했고 서진 황제 사마치는 다행히 목숨을 건지기는 했으나 떠돌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구희가 수도를 낙양에서 개봉으로 옮기자고 제안했지만 아무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전란과 흉작으로 곡식이 부족해서 수도 낙양에서는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형편이었고 황제가 타는 가마나 호위병조차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       

 

전조의 유총은 전군대장군 호연안에게 2만 7천의 군사를 주어 낙양을 점령하도록 했다. 5월 30일 호연안의 군사가 제일 먼저 낙양성에 도달하였으나 다른 원군이 도착하지 않자 낙양성 공략을 미루고 퇴각했다. 이어서 왕미와 유요의 군대가 낙양에 도착하고 나서 이들 삼군이 합하여 낙양성을 함락시켰다. 시안왕 유요는 왕미가 자신보다 먼저 낙양에 입성한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다. 왕미가 유요에게 이렇게 말했다.

 

“ 이제 낙양이 우리 손에 들어왔습니다.

  낙양은 천하의 중심지가 아니겠습니까.

  의당 주상께 말씀드려서 

  수도를 평양(임분)에서 낙양으로 옮기도록 하시지요.“

 

유요는 왕미의 말을 듣지 않고 낙양 궁성의 진귀한 보물들을 모두 약탈한 뒤 불을 질렀고 그것도 모자라 능묘를 파헤치고 역대 황제의 유골을 훼손시켰다. 이로써 AD265년부터 서진의 수도였던 낙양은 완벽하게 무너졌다.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황제 사마치는 잡혀 유폐되었다. 유요는 그 외 서진의 황족과 대소신료 3만여 명을 몰살시켰다. 

 

왕미는 시안왕 유요를 심하게 욕했다.

 

“ 저 따위 도각자(흉노족은 대부분 남몽고 도각마을 출신이어서 이들을 비하하는 말)들에게

  어디 제왕다운 면모가 있겠는가? “ 

 

그리고는 군대를 이끌고 동남쪽으로 물러나 항관(하남성 항성현)에 진을 쳤다. 유요와 왕미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틈이 벌어지고 말았다. 석륵은 군사를 끌고 개봉을 장악한 뒤 허창에 주둔했다. 유총은 유폐된 서진 황제 사마치를 특진좌광록대부 및 평아공에 책봉했고 유요는 갇혀있던 죽은 서진 혜제 사마충의 두 번째 부인 양황태후(양헌용)를 부인으로 취했다.(AD311년6월)


(5) 서진 황실과 장안 보호의 수호신 장궤(AD312) 

 

전조가 수도 낙양을 함락하면서 서진이 위태로워지자 양주 주부 마방이 장궤에게 이렇게 권했다.

 

   “ 의당 군사를 출정시켜 황실을 추대하고 보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낙양이 함락되고 나서 서진 부흥세력은 가필, 국특, 색침 등이 안정(감숙성 평량)과 부풍(섬서성 흥평), 그리고 예주자사 진왕 사마업이 전조에 대항하고 있었다. 마방의 생각에 찬동한 장궤는 주변에 격문을 관중에 띄워 포로가 된 회제 사마치 대신 그의 조카 진왕 예주자사사마업을 황제로 세우자고 제안하면서 이렇게 명령했다.

 

  “ 지금 전봉독호 송배와 보기2만을 지름길로 장안으로 가게하고    

    서중랑장 장식은 중군 3만을 인솔하고 

    무위태수 장전은 호기 2만을 이끌고 서로 연락하며 서둘러 출발하라.“ 

 

(6) 장궤의 유언과 아들 장식(AD314)

 

AD314년 5월 장궤가 병으로 누웠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장궤는 아들을 불러 놓고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문무장군이나 보좌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데 힘을 쓰고

   위로 나라에 보답하며 

   아래로 자기 집안을 평안하게 하라“

   

그리고 장궤가 5월 20일 사망했다. 시호는 서평무목공이다. 표문을 조정에 올려 아들 장식에게 자리 물려줄 것을 요청했다. 10월 조정은 장식을 도독양주제군사, 양주자사 및 서평공으로 임명했다.(AD314)

 

양주 군사 장빙이 도장을 어디서 얻어왔다. 그 도장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 황제행새(皇帝行璽)”

 

번역하자면 ‘황제역할 하는 사람의 도장’이란 뜻이다. 장빙은 이 도장을 장식에게 바쳤다. 장식은 도장을 보더니 근엄하게 이렇게 말했다.

 

  “ 이는 신하된 사람이 가질 것이 아니다”

 

도장을 장안으로 보냈다. 역사 비평가 호삼성은 이런 장식에 대해 이ᅟᅥᆶ게 평가했다.

  “ 당시 4진 4정 가운데 

    군신의 분수를 안 사람은 장식부자 밖에 없다.“

 

(7) 장식의 정치(AD316)

 

양주지역 통치자 장식은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 관리와 백성의 허물을 들추어 고발하는 사람에게 

    포와 비단과 양과 쌀을 상으로 주겠다.”

 

모든 일을 일일이 자신이 챙겨서 정치를 하겠다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죽고 정치를 이어 받은지 얼마 되아 의욕이 넘쳤던 장식으로서는 당연하게 여겼던 일이었다. 고창사람 외근이 말했다.

 

  “ 밝으신 서평공께서 정치를 하시는데 

   일이 크고 작건 간에 모두 스스로 이를 결정하시니

   혹 군사를 일으키고 명령을 내리시는 경우에도

   아래 부서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어긋나고 실패하면 

   비방 받는 것은 나눌 곳이 없습니다.

   아랫사람들은 권위를 무서워하여

   이미 이룩된 것, 즉 장식의 명령만 받을 뿐입니다.

   이같이 하면 비록 상을 천금으로 준다 하더라도 

   끝내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총명함을 조금은 덜어내시어 

   무릇 백가지일을 모두 아랫사람에게 찾아서 물으시고 

   각자 자기 생각을 다 말하게 하신 다음 

   이를 채택하시면 훌륭한 말이 스스로 많아 질것입니다.

   따로 상을 주실 일이 없도 것입니다.“

 

장식이 기뻐하며 외근의 지위를 세 등급이나 올려 주었다. 또 장군 왕해와 5천 보,기병을 보내 장안을 원조하고 공물과 장부를 겻들여 호송하게 했다. 조정에서는 그런 장식에게 도독섬서제군사라는 직책을 주었고 그의 동생 장무는 진주자사로 임명했다.(AD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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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6월26일 17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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