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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극복 일등공신, 의료보험 (3) 통합주의와 조합주의의 대립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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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6월09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06월09일 19시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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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가 집필한 책 ‘한국의 사회보험, 그 험난한 역정’(코리안 미러클 5) <육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편찬위원회, 2019.3, (주)나남>을 토대로 작성된 것임을 밝혀둡니다.

 

의료보험제도가 전국민건강보험으로 정착하기까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특히 의료보험의 관리방식에 대한 논의는 학계 전문가들은 물론 보건사회부 등 관료사회에서까지 통합주의와 조합주의로 나뉘어 논리(論理)싸움과 세(勢) 대결이 지속돼왔다. 의료보험의 보편적 복지(통합)냐, 선택적 복지(조합)냐와 같은 맥락에서 갈등과 대립이었다고 설명하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다.

사실 1963년 의료보험법을 처음 제정할 당시부터 ‘당연(강제)적용이냐, 임의적용이냐’로 논란을 벌였지만 당시의 경제 여건상 당연적용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임의적용으로 결정됐던 것은 앞서 짚어본 바 있다. 

 

 그러나 1977년 의료보험제도를 당연 적용방식으로 전환하면서 관리방식을 민간조합방식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공영방식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국가공영보험 방식으로 할 경우 정부재정부담 가중, 의료공급의 국유화 내지 사회화에 따른 혼란, 보험료인상 및 진료비 지출  증가 등등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돼 공적(公的)성격의 민간기관이 주도하여 조합을 설립하고, 관리하도록 하는 조합주의 방식을 택하게 됐던 것이다. 그런데 민간의료보험의 원리를 살린 조합주의는 비교적 여건이 좋은 직장조합과 관리가 어려운 지역의료보험이 별도로 운영됨에 따라 사회보험 본래의 기능이 약화되고 계층 간 갈등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직장과 지역으로 나뉜 의료보험, 계층 간 갈등요소로 작용…통합론 고개 들어

 

게다가 직장조합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나 의료보험조합의 난립현상이 나타나고, 규모의 영세성으로 과도한 인건비 지출 등 비효율적 운영이 도처에서 제기됨에 따라 의료보험조합의 통합문제가 제기됐다. 말하자면 조합의 경제규모를 달성해 의보재정의 건실화를 도모하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5공 정부가 출범하고,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합 효율화가 아니라 아예 의료보험을 하나로 통합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을 실시하는 통합주의 방식으로 제도를 바꾸자는 논의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당시 국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의료보험 통합 일원화’를 지지하고 ‘정부가 통합 법안을 제출하라’고 여야 합의로 결의안을 의결하기까지 했다. 여론을 먹고사는 정치인들의 결정이었다. 특히 여당인 민정당 조차 의보통합을 주장했다.​그러나 정부의 생각은 달랐다. 정부여당은 어느 날 전두환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이에 관한 '담판회의'를 열었다. 여당 대표는 물론 국회 보건사회위원장 등 민정당 관계자들과 보건복지부장관, 그리고 청와대 관련 수석과 참모들이 참여한 연석회의에서 통합문제를 최종결정하기 위한 설명이 있었다.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당시 의보통합을 반대하는 청와대 참모들의 설명을 듣고 ‘통합 보류’를 결정해버렸다. 그 과정에서 통합을 지지했던 보건사회부 의료보험 담당 책임자와 실무자들이 공직에서 쫓겨나는 일까지 벌어졌다.

 

아마 앞서와 같은 옛날 얘기를 들으면​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이다​.

“여당과 야당이 모두 합의해 추진하는 정책을 정부가 어떻게 거부할 수 있나?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는 여당 총재를 대통령이 겸하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대통령의 한마디가 절대적인 명령이었던 시대였다.지금도 여전히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비판이 있기는 하지만 과거와 같은 그런 정도의 ​제왕적 권력은 아니라고 본다. 또 그렇게 까지는 국민들이 용납하지않을 것이다. 역시 민주화의 힘은 대단한 것 아닌가? 어쨌거나 통합주의와 조합주의의 ‘1차 대전’은 조합주의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임기를 1년여 앞두고 차기 대선까지를 생각해야 하는 전두환 대통령은 1986년 여름 하계기자회견에서 ‘3대 복지정책’을 발표한다. 1989년까지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실시하고, 1988까지 최저임금제 실시와 국민연금제도의 실시를 내걸었다. 경제기획원은 그해 9월에 “1988년 1월부터 농어촌 의료보험, 1989년 1월부터 도시지역 의료보험을 실시하고 보험료 일부를 국고에서 지원 한다”는 구체안을 내놓기에 이른다.

 

 전두환 대통령이 발표는 했지만 과연 추진될지는 의문이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수용 등을 담은 6.29선언이 발표되고, 이른바 ‘민주화 시대’가 열리면서 의보통합 ‘2차 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억압됐던 시민사회의 발호가 절규로 변했고, 노동운동의 활성화 등이 급진적으로 나타나면서 의료보험 통합도 이념논쟁으로 번지는 양상이었다. 1988년 4월에는 48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의보통합 일원화를 위한 ‘전국의료보험대책위원회’가 발족해 국회를 압박하는 등의 시민운동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1989년 3월 8일 임시국회에서 야당 주도로 ‘국민의료보험법’(의료보험통합법)이 본회의를 통과해 통합주의의 승리로 끝나는가 싶더니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이 법안에 대해 거부권(법안재의요구권)을 행사함으로써 입법이 무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의료보험법만 따져보면 ‘조합주의의 승리’라고나 할까? 그러나 당시의 이런 결정은 정책노선의 선택이라기보다 대통령 중간평가(대선공약)를 앞둔 정치적 판단에 기인했다는 게 많은 당시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DJ정부, ‘국민건강보험법’ 제정해 의보통합…2000.7.1. 의약분업과 동시 시행

 

그 후 건강보험통합 논의는 수년간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화산의 마그마처럼 분출되지 않은 채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97년 대선을 앞두고 통합주의가 되살아나 분출되기 시작했다. 민심은 이미 통합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민심을 읽은 당시 김대중 야당 대통령 후보는 물론 여당의 이회창 후보까지 의료보험 통합을 대선공약으로 내걸었다. 의보통합 논의는 여기서 사실상 마무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997년 말 국회에서 통과된 ‘국민의료보험법’은 우선 전국 227개 지역의료보험조합과 공교(공무원 및 사립교원)의료보험의 조직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직장의료보험조합은 별도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1999년 2월 8일 임시국회에서 정부와 야당 안을 하나로 묶은 ‘국민건강보험법’을 통과시켜 직장의료보험까지를 통합한 명실상부한 국민의료보험 통합이 제도적으로 이뤄졌던 것이다.

 어쨌거나 2000년 7월 1일 지금의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출범하면서 일단 건강보험 통합은 마무리됐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볼 대목이 따로 있다. 김대중 정부는  건강보험 통합뿐만 아니라 ‘의약분업’을 동시에 실시했다는 점이다.

 의보통합 하나만으로도 힘겨운 판에 의약분업까지 감당해야 했던 당시 보건복지부의 관료들은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었다. 의사와 약사들 간의 힘겨루기는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자세한 얘기는 여기서 생략하고자 한다. 다만 의보통합과 의약분업이 함께 실시됨으로 인해 국민건강보험재정에 미친 영향은 너무도 컸다. 훗날 건강보험 재정파탄의 책임을 지고 당시 보건복지부장관이 해임되는가 하면 국회에서는 국정조사가 진행됐고, 감사원 특별감사까지 실시되는 등 건강보험 담당 관료들의 수난시대가 닥쳐왔다. 어찌됐든 국민건강보험이 자리를 잡으면서 제도정착은 착실히 이뤄져 지금은 세계에 내놓을 만한 제도로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계속)

 

국민건강보험 진화일지 (進化日誌) <3>

 

1991. 5. 3 의료보장쟁취공동위원회, 국민의료보험법안 재의결 청원 국회제출

1995.11.18  피부양자 인정기준 범위 확대

     * 계부,계모,생부모,생자녀,외조부모,외손자녀,3촌이내 방계혈족 등

1996.11.30  국민회의·자민련 ‘국민건강보험법안’ 공동 발의

     * 의료보험조직 2단계 통합

1997.10.30. 신한국당 ‘국민의료보험법안’ 제출

     * 공교공단이 지역조합 흡수 합병

1997.11.18  ‘국민의료보험법안’ 국회본회의 통과

1997.12.31  국민의료보험법 제정,공포

     * 교직원의료보험조합과 지역의료보험 통합, 재정은 별도 구분

1998.12.3 복지부, 국민건강보험법안 국회 상정

1998.12.23  국회 보건복지위, 국민건강보험법안(대안) 단일안 마련

      * 정부와 각 정당이 제출한 안을 단일화 시켜 복지위 통과 

1999. 1.6   ‘국민건강보험법’ 국회본회의 통과 

     * 직장조합을 포함하여 의료보험 완전통합

1999. 2.8   국민건강보험법 제정, 공포

2000. 7.1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과 직장조합(139개 조합) 완전통합 

2000. 8.1 의약분업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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