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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8 : 꺼져가는 등불, 모용덕의 남연(南燕) <O,끝>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6월19일 17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4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89) 후진 요흥의 무리한 요구와 남연의 칭번(AD407년)    

 

모용초의 어머와 처는 모두 후진의 도읍인 장안에 인질로 잡혀있었다. 모용초는 어사중승 봉개를 보내 어머니와 처를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후진의 주군 요흥은 인질을 돌려보내는 조건을 내걸었다. 즉, 번국을 칭하기로 약속하고 동시에 오나라(동진을 말함) 음악기예인 천명을 보내라는 조건이었다. 모용초는 대신들을 모아놓고 의논했다. 좌복야 단위가 말했다.

 

  “ 사사로운 가족의 일로 말미암아서 

    후진에게 복속의 존호를 올린다는 것은 가당하지 앖습니다.“

    

그러나 상서 장화는 모용초의 마음을 일고고서 이렇게 말했다.

 

  “ 폐하의 모처가 남의 손에 잡혀있는데  

    어찌 실속없는 명분에 사로잡혀 굽히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한범이라는 사람이 요흥과 함께 부견의 태자사인이었으니

    친분이 매우 깊습니다. 그를 보내십시오.“

 

장화의 말대로 모용초는 칭번하기로 하고 한범을 후진 요흥에게 사자로 보냈다.

 

(90) 불길한 징조가 일어나는 남연 조정(AD408) 

 

남연 주군 모용초는 돌아 온 생모 단씨를 황태후, 그리고 처인 호연씨를 황후로 삼았다. 그리고 종묘사직에 제사를 올렸는데 제사를 지내는 도중에 쥐 같기도 하고 붉은 말과 같은 것이 제단 옆에 나타났다. 갑자기 큰 바람이 불고 낮이 어두워지면서 장막의 휘장이 찢어지기도 하였다. 모용초가 몹시 무려워하자 태사령 성공수가 이렇게 말했다.

 

  “ 폐하께서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을 믿고 등용하시고

    훌륭한 선비들을 죽이시며

    세금을 너무 많이 거두시고 번잡하며 모역이 너무 많아서 나타난 것입니다.“

  

모용초는 즉각 대사면령을 내리고 간신 공손오루를 내쫓는 시늉을 보였지만 곧바로 다시 드용했다. 공손오루가 없으면 모용초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능력한 사람이었다.

  

(91) 여수가 마르다(AD408) 

 

산동성 치박시 동남쪽을 흐르는 여수(女水)가 자주 말랐고 겨울에는 여러 지류 강물이 얼어붙었지만 치박의 동쪽을 흐르는 승수는 한 겨울에도 얼어붙지를 않았다. 모용초는 이런 기괴한 현상을 매우 싫어했다. 여수는 작년에 말라붙어서 모용덕이 걱정하다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강이었다. 간신 이선은 모용초에게 모용초에게 이런 달콤한 말을 해 올렸다. 

 

  “ 승수는 서울에 가깝고 황제가 가까워 얼지 않은 것입니다.”

 

어리석은 남연 주군 모용초는 이런 교언영색에 매우 흡족하여 조복 한 벌을 새로 내려주었다.     

 

(92) 모용초의 동진 도발(AD409) 

 

AD409년 새해가 밝았다. 남연 조정에서는 조정대신과 함께 신년조회를 열었는데 악공이 없어서 예악(태악)을 준비할 수가 없었다. 삼년 전 새로 집권한 모용초가 후진의 요청을 받고태악기예인을 모두 후진에게 바쳤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는 동진을 노략질하여 거기에서 음악기예인을 납치해 오자고 의논했다. 영군장군이 한작이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  돌아가신 선제(모용덕)께서는 옛 조정(후연)을 잃고나서

     제(산동)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시면서 전전긍긍 매사를 조심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선제의유업을 이어받으셨으니

     백성을 쉬게 하시고 군사를 훈련하셔서

     북위의 위협을 견제하고 대비하셔야 항 계제에

     남으로 동진을 공격하셔서 원수를 넓히려고 하오니 

     이게 옳은 일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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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초가 이렇게 대꾸했다.

 

  “ 내 계획은 이미 정해졌으니 더 이상 경과 이 문제를 의논하지 않을 것이오.”

 

다음 달에 남연 장수 모용흥종, 공손귀(공손오루의 형) 등이 군대를 이끌고 강소성 숙예(숙천)을 침략해서 음악기예인 2천 5백여 명을 노략질해 태악을 가르쳤다. 당시 남연 조정은 공손오루가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공손오루의 친척들이 두루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였고 공손오루를 통하지 않고서는 출세를 할 수가 없었다. 모용초는 숙예를 노략질하고 돌아온 장수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는데 특히 공손귀 등을 공작(공)에 봉하려고 하였다. 공작이면 왕 다음으로 높은 직책이었다. 계림왕 모용진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 이 중 몇몇은 백성을 수고스럽게 부리고

    군사를 무디게 한 죄를 지었는데 어찌 공작을 내리려 하십니까?“ 

 

모용초는 계림왕 모용진에게 화를 내며 대꾸하지 않고 그의 건의를 묵살해버렸다. 모용초는 이번 숙예 공격이 성공한 것을 보고 매우 고무되었다. 계속해서 동진 땅을 침략하고 사람과 물자를 노략질했다. 팽성(강소성 서주)서부터 안휘성 수현 일대 동진 지역 사람들은 남연의공격에 대비하여 철저히 방어벽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93) 유유의 남연 정벌 (AD409) 

 

당시 동진은 오랜 국정농단의 실세 환현이 죽고(AD404) 유유가 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비록 유유가 동진 내부의 여러 지역을 차례로 장악해 가는 어려운 과정에 있었지만 하찮은 남연이 북쪽 국경을 자주 노략질하고 침략하는 상황을 두고 바라 볼 수만은 없었다. 유유가 남연을 정벌하기로 마음먹었다. 동진조정에서는 격렬한 반대가 일어났다.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유유는 광대한 동진 영역에 퍼져있는 반대세력들을 무력으로 장악해 나가는 과정에 있었으므로 새로이 북쪽의 남연을 공략하는 것이 버겁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다만 좌복야 맹창과 사유 등 소수의 인사들만이 성공 가능성을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유유는 맹창을 감중군유사로 삼고 왕진악이라는 사람을 등용하여 남연 정벌에 나섰다. 왕진악은 그 유명한 부견의 참모 왕맹의 친손자로써 말도 잘 못타고 활힘도 약했지만 모의와지략이 뛰어나고 결단력이 매우 훌륭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유유가 말했다.   

 

  “ 장군 가문에서 훌륭한 장수가 난다는 말이 있었는데

    왕진악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유유는 4월 11일 수군을 이끌고 건강(남경)을 출발하여 장강을 타고 내려가다가 회하로 들어간 다음 사수(泗水)로 들어갔다. 5월에 하비(강소성 수녕부근)에 도착하여 선함과 치중을 남겨두고 육로를 따라 낭야(산동성 임이 부근)에 도착했다. 유유는 지나는 곳마다 성을 쌓고 군대를 남겨두어 남연의 후방역공을 대비시켰다. 

 

어떤 사람이 유유에게 이렇게 물었다.

 

  “ 만약 남연 군대가 험한 곳을 막고 방어에 치중하거나

    성벽을 높이 쌓고 들판을 깨끗이 치워버리면

    깊이 들어 간다한들 공로를 세우지 못할뿐더러 

    장차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유유가 이렇게 대답했다.

 

  “ 나도 그것을 깊이 생각해봤소,

    그러나 선비족들은 탐욕심이 많아서

    원대한 계획을 잘 알지도 못하는데다가

    빼앗은 물건들을 이롭게 여기고 좀체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오.

    그러니 들을 싸 쓸어버리지도 않을 것이고

    또 수군중심의 우리가 깊이 들어와

    오래 버티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오.

    따라서 그들이 나온다 하더라도 대현(산동성 임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물러나 험난한 곳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광고(산동성 청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오,

    내가 이것은 장담할 수 있소.“

 

유유의 군대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남연의 영토 깊숙이 들어갈 수가 있었다.

 

(94) 모용초의 전략회의(AD409) 

 

유유의 대군이 몰려들어오자 남연 조정은 비상이 걸렸다. 공손오루가 말했다.

 

  “ 대현(산동성 임구)를 방비하여 일차로 그들의 예봉을 꺾은 뒤

    정예군을 바다로 보내 후방을 쳐서 양곡로를 차단하고 

    유유군의 후방을 치십시다.

    그리고 연주자사 단휘를 보내 동쪽으로 내려간 뒤

    유유의 측면을 공격하면 그것이 상책입니다.

    각 지방관에게 명령하여 험한 곳을 지키게 하고 저축할 것을 빼고는 

    들판을 모두 치워버리면 그것은 중책입니다.

    도적을 그대로 방치하고 대현까지 오게 한 다음 

    성안에서 방어하는 것은 하책입니다.  “ 

 

모용초가 이렇게 말했다.

 

  “ 올해 별자리를 보니 싸우지 않아도 저절로 이긴다고 했다.

    저들은 멀리서부터 와서 피폐하니 오래 갈 수가 없다.

    나는 다섯 주(청주, 연주, 유주, 서주, 병주) 땅을 갖고 있어서

    부유하기도 하고 갑병만 1만 명에다가

    벼 보리가 땅에 가득하니

    어찌 땅을 치우고 백성을 옮겨 들여서 번잡하게 할 까닭이 있겠는가.

    마음대로 대현으로 들어오게 한 다음 

    피로한 정예기병으로 유유군을 쳐부수면

    어찌 승리를 장담하지 못한다고 하겠는가?“

 

보국장군 하뢰노가 조용히 공손오루에게 속삭였다.

 

  “ 망하는데 까지 하루도 걸리지 않겠소.“

 

 태위 계림왕 모용진도 걱정스럽게 말했다.

 

  “ 폐하께서는 오로지 기병은 평지에서 유리하다는 것만을 믿으시고

    적군이 대현까지 들어오기를 기다리시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일단 나가서 적을 막은 다음에

    패하더라도 그 때 성 안으로 들어오시어 수비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적군들이 들어오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모용초는 듣지 않았다. 모용진이 한작에게 말했다.

 

  “ 백성을 옮기지도 않고

    들판을 께끗이 치워두지도 않고

    적을 그대로 뱃속 깊이 끌어들여 

    앉아서 포위를 기다린 다음 공격하겠다고 하니 

    후한 헌제가 한 것과 똑같습니다.

    나는 이제 반드시 곧 죽을 것이니

    그대는 중화의 선비로써 문신을 하시지요.“

 

후한 헌제는 유비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 백성을 옮기지 않다가 유비에게 땅과 백성을 많이 잃은 것을 빗댄 말이었다. 여기서 문신이란 당시 동진 사람들이 몸에 문신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화가 크게 난 주군 모용초는 모용진을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유유군이 지나가는 데도 남연군사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유유는 그런 남연의 전략을 보고서 하늘을 가리키며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띄었다. 좌우 사람들이 그 연유를 묻자 유유가 말했다.

 

  “ 군사들이 험한 지형을 이미 지났으니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났소.

    게다가 충분한 곡식과 보금자리와 가옥들이 파괴되지 않았으니

    앞으로 궁핍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넘쳐나고 있소.

    오랑캐는 이미 내 손 안에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소.“    

   

6월 12일에 유유군은 동완(산동성 기수현 동쪽)에 도달했다. 모용초는 공손오루와 모용하뢰노와 단휘에게 5만 군사를 주어 대현(임구 남쪽)에 주둔시켰다. 모용초도 스스로 4만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공손오루에게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동진의 선봉 매용부가 공손오루를 쳐서 크게 이기자 공손오루는 지키지 못하고 도망쳤다. 유유군대가 남연의 대군과 임구 남쪽에서 대전을 벌였는데 하루가 가도록 승부가 나지 않았다. 동진 장수 호번이 이렇게 제안했다.

 

  “ 남연이 우리 군대를 막기 위해 모든 병사를 도원했을 것이 뻔합니다.

    그렇다면 성 안은 텅 비어 있을 것입니다.. 

    적은 기습군사를 뒤로 보내 성을 공격하면 

    쉽게 탈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한신이 조를 깨뜨린 방법입니다.“

 

유유가 호번과 단소와 향미를 몰래 남연의 후방으로 보냈다. 호번의 무리들이 성 밑에서 크게 바다를 건너왔다고 소리치자 성 안에서는 동진의 대군이 바다를 건너 쳐들어온 줄 알고 크게 놀라 무너졌다. 성 안이 유유군에게 쉽게 무너져 함락되자 모용초와 그의 군대는 놀라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큼을 타고 유유군이 총공세를 펼쳐 남연군대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모용초는 광고로 도망쳐 들어갔다. 6월 19일 유유는 군대를 몰아서 광고의 외곽성을 함락시키고 내성을 포위했다. 다급해진 모용초는 후진에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장강을 장안으로 보냈다. 옥에 갇혀있다가 풀려난 계림왕 모용진은 최후의 결전을 하자고 간청했다.

 

  “ 백성들은 오직 한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친히 6사를 감독하시다가 패하여

    도망쳐 들어왔으니 여러 신하들의 마음은 이미 다치거나 떠난 상태이고

    백성과 군사들의 사기도 땅에 떨어졌습니다.

    후진 또한 내부에 유발발의 공격을 받고 있는 참이라 

    구원병을 보내지 못할 것입니다.

    흩어진 병사를 끌어 모으면 아직 수 만 명은 되오니

    의당 황금과 모든 황실 재산을 풀어서라도 

    그들의 마음을 붙잡아 최종 한 판 대전을 펼치심이 좋을 것입니다.

    만약 하늘이 우리를 돕는다면 이길 것이고 

    만약 그것이 아니라도 모두들 죽는 것을 아름답게 여길 것이니   

    문을 닫고 꼼짝없이 기다리다가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사고 낙랑왕 모용혜는 후진의 구원군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고 일단 버텨보자고 했다. 다만 장강에 이어서 후진 요흥이 믿는 한범을 다시 보내보자고 했다. 모용초는 모용혜의 의견을 따랐다. 

 

남연의 사태가 위태로와지자 남연 모용초의 측근 신하들 중에 몰래 유유에게 투항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그 중에 상서 원존과 그의 동생 원묘가 유유에게 말했다.

 

  “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장강을 붙잡고 

    후진의 지원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면 남연은 크게 흔들릴 것입니다.“

 

아마도 원존과 원묘는 장강이 돌아오는 날자와 길목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후진에 사신으로 갔던 장강은 광고로 돌아오던 중에 태산(산동성 태산)부근에서 태산태수에게 붙잡혔고 태산태수는 그를 유유에게 압송했다.

 

장강을 사로잡은 유유는 그를 수레에 태우고 광고의 내성을 돌면서 후진의 원조군이 없을 것이라고 소리치게 하였다. 남연의 군사나 백성들이 매일 수 천명씩 유유에게 투항해 들어왔다. 

 

다급한 모용초가 유유에게 대현 남쪽 땅을 떼어주고 칭번하는 조건으로 휴전을 제의해왔다. 유유가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95) 후진 요흥의 남연지원 실패(AD409)

 

동진이 남연을 차지하면 국경이 맡붙게 되는 후진의 요흥이 유유에게 사신을 보내어 말했다.

 

  “ 남연이 이웃으로 지내기를 원하는데

    지금 동진이 공격해 오므로 

    급하여 군사 10만을 보내 낙양으로 진군시키고 있소.

    철군하지 않으면 더 앞으로 나갈 것이니 알아서 하시오.“ 

 

유유가 유발발에게 공격을 당하여 궁지에 몰린 후진의 사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 남연을 이긴 다음에 군사를 한 삼년 쉬게 할 것이오,

    그런 다음에 관중과 낙양으로 갈 것이니

    지금 공격을 할 수 있으면 하시오.

    곧 내가 되받아칠 것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해 보시오.“

 

후진이 공격하려면 해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유유는 그 통보한 사실을 유목지에게 말려줬다. 유목지가 유유를 나무랐다.

 

  “ 이 문제는 좋게좋게 말해야하는 문젭입니다.

    어찌 그렇게 가볍고 경솔하게 대답하셨습니까.

    위협할 생각이라면 더 단호하고 따끔하게 하셨어야지요.

    저들이 듣고 화내기 딱 좋은 말로 대꾸하신겁니다.“

 

유유가 지지않고 대답했다.

 

  “ 군사작전은 시간이 생명인 법이오.

    저들이 정작 공격해 올 생각이었으면

    우리가 아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 아니오.

    우리에게 알리고 공격하니 마니 하는 것은 

    아예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요.

    스스로 보전할 겨를도 없는데 어찌 남을 구원할 수가 있겠소“

  

유유의 대꾸에 화가 난 요흥은 1만 군사를 요강에게 주어 한범의 원군요청을 들어주었다. 후진의 1만 군사가 낙양으로 향하는 사이에 요흥은 유발발에게 장안 부근 이성(섬서성 황릉)번 크게 패전하였다. 요강과 1만 지원군은 머리를 돌려 장안으로 돌아왔다. 한범이 크게한 쉼을 내쉬며 말했다.

 

  “ 하늘이 결국 연(남연)을 버리는구나.”

 

  (96) 한범이 동진에 항복–남연 멸망(AD409) 

 

해가 바뀌어 AD410년이 되었다. 새해 조례를 연 모용초는 동진 유유의 대군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한작이 모용초에게 나약함을 보이면 안 된다고 타일렀다. 모용초가 눈물을 닦으며 사과했다. 남연 조정 대신들과 백성들의 유유로의 투항이 이어졌다. 남연의 상서 장준은 유유에게 한범을 붙잡으면 남연은 스스로 무너질 것 권유했다. 유유는 한범을 산기상시로 초빙하겠다고 알려왔다. 주변에서는 한범에게 후진으로 망명할 것을 권유했다. 한범이 말했다.

 

  “ 유유는 평범한 포의로 일어나서 환현 무리를 물리치고   

    동진 황실을 바로 세운 사람이오.

    군사를 일으켜 남연을 정벌하는데 가는 곳마다 이기고 있으니

    하늘이 내린 것이지 사람의 힘이 아니오,

    남연이 멸망하면 그 다음은 후진이 될 것이 분명하오.

    나는 두 번 모욕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오.“ 

 

한범이 유유에게 투항했다. 모용초는 한범의 가족들이 모두 남연 조정에 충절을 보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동생 한작이나 한범의 다른 가족을 다치게 하지 않고 평소대로 대접을 했다. 남연의 대신 단굉 또한 북위를 거쳐 유유에게 망명했다. 다만 장강의 경우에는 유유를 위해 새로운 병기를 개발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므로 모용초는 장강의 어머니를 성벽 위에 올려놓고 사지를 절단하여 죽였고 계속해서 항복하자고 권유한 장광을 모용초는 죽였다. 

 

광고 내성이 포위된 채 해가 바뀌어 AD410년이 되었다. 성 밖에서는 끊임없이 백성들이 유유에게 투하하고 있었다. 모용하뢰노와 공손오루가 땅굴을 파고 나아가 동진을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남연의 상서 열수가 모용초에게 말했다

 

   “ 요순도 자리를 피했는데

     폐하께서는 어찌 변통의 계획을 세우지 않으십니까?“

 

항복하고 물러나라는 말이었다.  모용초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 칼을 물고 죽을지언정 옥을 물고 살지는 않을 것이다.”

 

투항의 생각이 전혀 없다는 말이었다. 유유의 총공세가 이어지자 드디어 상서 열수가 성문을 열어 유유군을 맞아들였다. 모용초는 황급히 도망가다가 잡혔다. 모용초는 생모를 유유의 참모 유경선에게 부탁했다. 유경선은 원래 남연의 신하였다가 동진으로 망명한 사람이었다.유유는 모용초를 건강까지 호송한 뒤 참수하였다. 당초에 유유는 남연이 일찍이 항복하지 않은 죄를 물어서 성내 모든 사람들을 땅을 파 묻어버릴 참이었다. 한범이 극구 간하였다.

 

  “ 동진이 옛날 건강으로 옮겨오면서

    천하가 가마솥같이 들끓었습니다.

    중원 사람들은 기댈 곳이 없어지자 

    힘이 강한 사람들에게 붙어서 목숨을 연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들은 모두 옛적에 서진 조정의 충실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모두 땅에 묻어버리신다면 

    원한이 하늘에 솟구쳐 후진과 함께 

    피의 복수를 다짐할 것이 두렵습니다.“

 

유유는 부그러움에 얼굴 빛을 고치고 한범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남연 조정의 왕공 신하들 약 3천명의 목을 베었고 그드르이 노비들 약 1만 여명을 몰수했다. 

 

자치통감의 사마광은 유유의 이런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혹평했다.

 

  “ 현자와 준걸을 예의로 대하고

    피폐한 백성을 위무하며

    화락하고 단아한 기풍을 널리 펼치고  

    잔혹하고 더러운 정치를 씻어서

    여러 선비들에게 아름다운 기풍을 흠모하도록 하여서

    유민들이 발꿈치를 들고 기대하도록 해야 했습니다만

    유유는 오히려 더욱 도륙질을 감행하고

    분통한 마음으로 복수하였으니

    그가 행한 일을 추적해보면

    일찍이 부견이나 요흥과도 같지 않고 

    의당 천하를 깨끗이 통일하여 아름답고 큰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니니

    비록 지혜나 용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인의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97) 남연 멸망의 원인

 

사실 남연은 건국하고자 해서 건국한 나라는 아니었다. 북쪽의 강력한 북위 탁발규 세력을 맞아 참합피 대전(AD395년)과 호타하전투(AD397년)에서 크게 패하면서 후연의 국력이 무너지는 가운데 파편처럼 생겨난 나라가 모용덕이 세운 남연과 모용홍이 세운 서연인 셈이었다. 남연은 AD398년 건국한 이래로 모용덕의 능력과 경륜에 의존하여 세력을 확장할 수가 있었지만 그는 건국 당시에 이미 62세 일정도로 노쇠한데다가 아들이 없이 딸만 둘을 두었다. 당연히 후계를 조카인 형 모용납의 아들 모용초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남연의 2대 주군 모용초는 비록 어려서부터 갖은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기는 했지만 용렬하기만 할 뿐 지략이나 용기가 없었고 사람을 활용할 줄 몰랐다. 당시 남연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 즉 북쪽의 북위와 서쪽의 후진과 남쪽의 동진 등의 위협을 생각했다면 가장 시급한 일은 인재를 모으고 민심을 쌓으면서 백성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강하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국들과 외교를 강화하여 시간을 충분히 버는 일이 시급했다. 그러나 모용초는 태악공을 보충하기 위해 동진을 노략질하면서 동진을 크게 자극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아무리 동진 조정이 오랫동안 난신에 의해 주도되어 국정이 농단되었다고는 하지만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또 무엇보다도 광활한 영토와 물자를 동원할 능력을 갖춘 강대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견도 공격에 성공하지 못했고 더 강한 북위마저도 쉽게 동진을 넘보지 못했던 것인데 모용초는 동진의 능력을 가볍게 생각하고 습격을 감행하다가 역공을 당해 결국 멸망한 것이다. 결국 남연의 멸망은 지도자 모용초의 사려 깊지 못한 경거망동으로 동진을 건드렸다가 건국 12년만에 동진의 공격 한 방으로 멸망당한 셈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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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6월19일 17시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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