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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8 : 꺼져가는 등불, 모용덕의 남연(南燕) <K>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5월22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03월14일 13시36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60) 후연의 분할(AD397)

 

후연 모용보는 전에 정남장군 고녹관귀를 중산으로 보내 탈환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중산에서는 황제가 빠져 나간 뒤 사촌 동생 모용상이 지키고 있었다. 모용상은 고녹관귀와 그의 일족들을 다 죽였다. 탁발규는 양식이 제대로 공급되자 않자 중산의 압박을 풀고 곡식을 찾아서 이리저리 수습을 하고 다녔다. 모용상은 북위군대를 이길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라 백관을 설치하면서 인질로 잡혀 있던 탁발고를 죽여 버렸다. 사람들은 업에 있던 범양왕 모용덕에게도 존호를 사용하라고 권했지만 계로 도망간 황제가 모용보가 살아있었으므로 참람하게 황제를 칭하지 않았다.

 

(61) 모용린의 중산 장악과 칭제(AD397)

 

중산을 장악하고 칭제한 모용상은 거칠고 술을 좋아했으며 사치하고 또 난폭했다. 선비족의 가장 큰 씨족 종주 가족혼담을 죽인 것부터 시작하여 500여 명의 신하의 목을 날려버리자 모용상에게서 신하들의 마음이 떠났다. 성 안에서 계속 기근이 들어 궁핍했고 백성들이 들 판에 나가 야생풀을 뜯어 오는 것도 안보를 핑계로 금했다. 죽는 사람이 베개를 벨 정도로 많아지자 사람들은 숨어있는 모용린을 맞이하여 주군으로 모시자고 했다. 모용상이 5천 군사를 가지고 세금을 독려하고 있는 중에 모용린이 정령부락 군사를 이끌고 중산으로 들어 와 모용상의 목을 잘랐다. 모용린이 존호를 칭하고 백성들이 들판에 나가 야생 벼를 채취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중산 백성들은 모용린에게 서둘러 나아가 북위에 원수를 갚아달라고 졸랐는데 모용린이 들어 주지 않자 다시 불만에 쌓이게 되었다. 탁발규는 7천 군사 노구(하북성 요양)에 진을 쳤다가 곧 상산(하북성 정정)으로 들어왔는데 이 때 군사들 가운데 역병이 돌기 시작했다. 열 명 중 4-5명이 죽어 나갔다. 민심이 흉흉했지만 탁발규는 군사를 물리지 않고 버티었다.  

 

(62) 탁발규의 중산 점령(AD397)

 

중산에 기근이 계속되자 견디지 못한 모용린이 2만여 군대를 이끌고 나가 남쪽 신시(하북성 신낙시)를 점거하였다. 탁발규가 모용린을 크게 격파하고 9천여 명의목을 자르자 대패한 모용린은 다시 퇴각하여 서산(태행산)으로 숨었다가 업으로 도망갔다. 당시 업에는 범양왕 모묭덕이 지키고 있었다.  

 

모용린이 중산에서 나와서 업으로 도망치자 탁발규는 드디어 10월 20일 중산을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중산 성 안에서 항복한 사람만 2만 여명이 넘었다. 후연의 국새도 차지했고 갖은 보물이 다 북위 차지가 되었다. 탁발규는 이것을 모두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동생 탁발고를 죽인 모용상의 묘를 파헤쳐 그 시신을 베었으며 탁발고를 죽이는데 동참한 고패와 정동을 찾아내그 5족을 멸했다. 23일에는 탁발의에게 명하여 3만의 군사를 가지고 곧 업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용성에 있던 모용보 또한 모용덕이 업을 잘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격려하는 표문을 보냈다. 모용덕은 모용보에게 남쪽으로 돌아오실 준비를 하라고 권했다. 업은 우너래 전연의 고도였으므로 후연으로서도 정통성과 상징성이 큰 도읍이다. 모용보는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고 군사를 징발하여 남쪽 업으로 돌아 갈 계획을 깊이 품었다.(AD397년 12월) 

 

(63) 모용덕의 활 이주와 남연 건국(AD398)

 

모용린이 업에 도착하여 다시 조왕을 칭하고 삼촌 모용덕에게 유세하였다.

 

  “ 북위가 이미 중산을 점령하고 곧 업으로 내려올 것입니다.

    업에 비록 곡식이 많다고는 하나 성이 커서 오래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서둘러 활대(하북성 활)로 내려가셔서 

    황하를 기대고 기다리다가 틈을 살펴 역습하면 

    거의 옛 땅을 다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활에는 모용수의 조카 모양왕 모용화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용화 또한 사자를 보내 모용덕을 초빙하니 모용덕이 그리로 가기로 했다.  AD398년 정월 모용덕은 4만여 호를 이끌고 업에서 내려와 활로 들어갔다. 모용린이 제왕 칭호를 건의했지만 모용덕은 백관을 설치하고 형님 모용수의 예에 따라서 연왕이라고만 불렀다. 모용린에게는 사공 및 영상서령의 직책을 내렸다. 역사에서는 이 나라를 남연이라고 부른다. 모용린이 역모를 다시 꾸미자 모용덕이 그를 살해했다. 모용덕이 북위의 끈질긴 공격을 받은 업을 버리기로 결정하자 북위 탁발규는 그대로 입성하여 중산에 이어 두 번째로 행대(임시 행정본부)를 설치했다. 탁발규는 중산과 업 등 점령한 땅에 적당한 사람을 세워 진수하도록 하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64) 모용보의 남정 계획(AD398년 2월)

 

중산과 업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모용보는 낙담하면서 남침 계획을 포기했었는데 모용덕이 사람을 보내와 탁발규가 북쪽으로 떠났으며 중국이 텅 비어있다고 하자 모용보 본토를 수복할 생각을 다시 품었다. 군기를 엄하게 하고 군비와 물자를 꼼꼼이 챙기기 시작했다. 요서왕 모용농과 장락왕 모용성이 반대했다. 병사들이 너무 피곤하고 또 힘이 쇠약한데다가 북위가 새롭게 땅을 얻었으므로 기세가 강할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모용보가 생각을 접으려 하는 참에 무군장군 모여등이 모용보에게 말했다.   

   

  “ 백성과 함께 즐겁게 마칠 수는 있지만

    같이 무엇을 시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지금 장수와 군사들이 모여 있는데

    의당 폐하께서 홀로 결단을 내리셔야지 

    기운을 타고서 나아가 뺏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모로 같고 다른 것을 따지셔서 큰 계획을 그르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모용보가 크게 소리쳤다.

 

   “ 내 계획은 이미 섰다.

     다른 소리를 하는 사람은 목이 날아갈 것이다.“

 

2월 13일 모용보가 나서서 주둔지로 갔고 모용성에게 남아서 모든 뒷일을 부탁했다. 17일에는 용성을 출발했다. 모여등이 전군을 책임지고 모용농이 중군, 그리고 모용보 자신은 후군을 맡았다. 후연의 남정군 행렬이 백리에 걸쳐 있을 정도로 대군이었다. 

 

(65) 단속골의 반란(AD398)

 

비록 모용보의 전의는 어느 때보다 결연했지만 군사들의 마음은 그렇지가 못했다. 많은 군졸들은 모요농이 걱정한대로 피로하고 쇠약하고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병사들의 이런 불만 심정을 잘 알고 있던 장상, 즉 금위병 대장 단속골과 송적미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과거 모용륭의 부하들이었다. 다라서 모용륭의 아들 모용숭을 압박 추대하여 주군으로 삼고 모용주와 단의와 종실의 여러 왕들을 시해하였다. 하간왕 모용희는 원래 모용숭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그 덕택에 살아남았다.

 

모용보는 10 여 기병을 끌고 모용농의 중군 군영으로 도망쳤는데 모용농이 영접하러 나가려하자 주변 사람들이 허리를 붙잡고 중지시켰다.

 

  “ 가볍게 나설 때가 아닙니다.

   물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다음에 나서십시오.“

 

모용농이 그럴 수가 없다고 하면서 칼을 빼어 위협한 뒤에야 나와서 모용보를 영접할 수 있었다. 모용농은 병사를 이끌고 앞서 간 모여등과 합류한 다음 반란군 단속골을 토벌하고자 했다. 그러나 모용농의 군사나 모여등의 군사 모두 전장으로 나아가는 것을 싫어하였으므로 뿔뿔이 흩어지거나 도망을 가버리는 통에 모용보의 남정군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기댈 곳이 없어진 모용보와 모용농은 서둘러 용성으로 되돌아 왔다. 용성을 지키던 모용성이 반란의 소식을 듣고 군사를 보내 모용보와 모용성이 겨우 목숨을 건진 것이다. 

 

(66) 용성 난한의 반란(AD398)

 

후연 조정의 중신 상서 돈구왕 난한은 단씨와 가족혼씨와 함께 선비족의 3대 귀족가문인 난씨의 중심인물로써 모용황가와 겹겹 혼인으로 얽힌 척족이다. 난한은 반란을 일으킨 단속골 무리와 함께 내통하고 있었는데 용성 동성의 동쪽 밖에다 군영을 세우고 있었다. 용성 안에는 지키는 병사가 아주 적었으므로 모용성은 성 밖 사람들을 안으로 불러 들여서 약 1만 명의 만들어 수비를 맡겼다. 

 

단속골의 무리가 3월 2일 용성을 공격했다. 성을 지키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모용농은 난한이 들어와 자기에게로 오라 하자 그리로 갔다. 다음 날 새벽 단속골의 부대가 성을 넘어오자 성안의 모용성의 군대가 필사적으로 방어하여 단속골의 부대 100여 명이 전사했다. 성은 좀체 함락되지 않았다. 단속골은 평소 평판이 자자하던 모용농을 붙잡고 나와 성을 돌면서 이미 포로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끝까지 사력을 다해 버티던 성 안 수비대는 모용농이 포로로 잡힌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수비대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단속골은 군대를 풀어서 성 안을 돌면서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게 했으며 모용보와 모용성과모여등 그리고 장군 여숭 등은 서둘러 성 문을 빠져 나와 남쪽으로 도망갔다. 단속골은 모용농을 성 안에 가두었다. 단속골의 책사 아교라는 고양왕 모용숭(모용륭의 아들)이 너무 어리므로 대신 모용농을 세우자고 했다. 평소 모용숭과 가깝던 종양과 출력건이라는 사람이 그 소식을 듣고는 모용농을 살해했다. 대노한 단속골은 종양과 출력건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  

 

3월 8일 난한은 병사를 모아서 경비가 허술한 단속골 병영을 습격하여 단속골과 그 무리를 모조리 처단했다. 그리고 모용숭을 폐위하고 그 자리에 태자 모용책(모용보의 아들)을 세웠다. 그리고는 사신을 계(북경)까지 도망간 모용보에게 보내 용성으로 돌아오기를 권하였다. 난한의 속내를 전혀 모르는 모용보는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 때 장락왕 모용성이 말했다.

 

  “ 난한의 마음이 충심인지 역심인지 지금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가 역심을 가지고 있는데도 지금 홀로 말을 타고 가신다면 

    혹시 후회할 일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남쪽 범양왕(모용덕. 그는 활, 지금의 冀주에 있었음)에게로 가셔서

    무리를 합한 다음 기주 지역을 평정하신 다음에

    용성으로 들어가셔도 늦지 않습니다.“

 

모용보는 아들 모용성의 말을 따랐다. 

 

(67) 떠도는 후연 주군 모용보와 충신 조사(趙思)(AD398)

 

모용보가 무리와 함께 계(북경)를 떠나 남쪽 샛길을 따라 업을 지나자 주민들이 성으로 들어 오기를 바랐으나 받아들이지 않고 여양(하남성 준)에 도달했을 때 조사라는 환관을 북지왕 모용종에게 보내 알렸다.

 

  “ 지금 황상이 지난 2월 남정을 하시다가

   장상의 난(단속골의 반란)을 당하셔서 근거지를 잃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왕은 당장 승상(모용덕을 말함)에게 말씀드려서

   황제를 영접하십시오.“

 

모용종은 모용덕의 사촌이니까 모용보에게는 5촌 당숙인 셈이다. 모용종은 본인이 모용덕에게 존호를 받들고 독립을 하라고 권유한 사람이므로 조사를 못 가게 잡아두고는 남연왕 모용덕에게 모요보가 피난을 와 이 부근에 머무르면서 도움을 청한다고 말했다. 모용덕은 당황했다. 신하를 불러 모아 의논에 들어갔다.

 

  “  경들이 나에게 권고하여 내가 존호를 칭하며 정사를 보라 권하였는데

     지금 황상이 떠돌아다니시며 어려운 경지에 계시니

     백성들이 주군을 잃어버린 것이고  

     하늘이 재앙을 내린 것을 후회하시는 것이다.

     지금 내가 법가를 갖추고 황상을 영접하며

     행궐로 나가서 죄를 용서받고자 하는데 어떤가? “

 

황문시랑 장화가 나아와 말했다.

 

  “ 지금 천하는 뛰어난 사람이 아니면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뒤를 이으신 황제(모용보를 말함)는 어리석고 나약하여 

    선조의 법통을 계승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만일 보통 사람들의 절개를 좇아

    하늘이 내려주신 일을 버려서 위엄과 권세가 

    하루아침에 없어진다면 몸과 머리를 지키지 못 할 것입니다.

    하물며 사직이 제사를 받들 수 있겠습니까?“ 

 

명확한 반대였다. 모여호도 나서서 말했다.

 

  “ 뒤를 이을 황제는 적절한 시기에 도달하지도 못했고 

    국도(중산)를 지키지도 못 했습니다.

    스스로 패망한 것이며 여러 난관을 이겨 낼 힘이 없는 것이 명백해 졌습니다.

    옛 춘추에 위첩이 아버지 괴외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옳다고 했습니다. 

    자식이 아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틀리지 않은데

    삼촌(모용덕)이 조카(모용보)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조사의 말이 확실한지가 분명하지 않으니

    제가 가서 염탐하고 오겠습니다.“

 

모용덕이 눈물을 흘리며 모여호를 보냈다. 모여호가 염탐한다고 하긴 했지만 사실은 군사를 이끌고 가서 모용보 무리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용보가 조사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무꾼을 잡았는데 이미 모용덕이 칭제했다고 전해주자 놀란 모용보는 서둘러 다시 북쪽으로 도망갔다. 모용보가 떠난 뒤에 모여호 군사가 이르러 모용보가 없는 것을 보고 조사를 붙잡고 돌아왔다. 모용덕은 학식이 깊은 조사를 임용하고자 했지만 조사가 거절했다.

 

  “ 개나 말도 가히 주인을 그리워 할 줄 아는데

    하물며 인간으로서야 어떻겠습니까.

    저 조사가 비록 형신(刑臣,환관)이지만 황상에게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그래도 모용덕이 조사를 보내주지 않자 조사가 화를 내며 말했다.

 

  “ 주의 왕실이 동쪽으로 도망갈 때 진(晋)나라와 정나라에게 의지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친하기로는 삼촌이시며 지위로는 상공이십니다.

    앞에서 여러 신하들이 제실(제실)을 바로잡지 않고

    근본이 삐뚤어지는 것을 옳고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저 서진의 패역한 집권자 사마륜(황위를 찬탈한 삼촌)과 다름없습니다.   

    저 조사는 비록 신포서가 초나라에서 했던 일을 할 수는 없지만

    공군빈을 사모하여 왕망의 세상에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신포서는 춘추 초(楚) 소왕(昭王) 때의 대부였다. 오(吳)나라 침략을 받아 초의 운명이 위태롭자 신포서는 진(秦) 애공(哀公)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면서 7일 동안 음식을 절폐하고 울면서 초나라의 절박한 상황을 호소했다. 진 애공이 그의 정성에 감동하여 구원병을 보내어 초나라를 도와 안정시킨 일이 있었다. 역사를 들먹이며 모용덕을 모욕한 조사의 목을 베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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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5월22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03월14일 13시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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