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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 혼군(#6I) 후조(後趙)의 석호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5월01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3월06일 23시4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7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47) 석선의 석도 살해(AD348)

 

석호는 사냥과 궁궐 건축에 빠져 사리를 분별 할 수가 없었다. 간악한 사람들은 그런 석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더 큰 사역과 더 큰 사냥을 계속하여 부추겼다. 석호는 태자 석선과 아들 석도를 데리고 호화스런 사냥을 그치지 않았는데 태자 석선은 아버지가 동생 석도를 태자인 자기와 똑같이 대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가득했다. 그런 석선의 마음을 잘 읽은 환관 조생이 석선에게 다가가 슬며시 제안했다.

 

“ 석도를 제거해야 태자의 자리가 안전할 것입니다.”

 

석선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로부터 석도를 제거하는 모의가 시작되었다.(AD347년 9월) 사실 조왕 석호는 진정으로 석선 대신 석도를 세울 계획이었으나 나이가 어린 동생이었으므로 결단을 미적거리고 있었다. 석선이 잘못된 행동을 할 때 마다 석도를 세우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이렇게 되니 교만해지고 방탕해지는 쪽은 석선이 아니라 오히려 석도 쪽이었다. 석도가 태위였으므로 태위부 건물의 대들보 길이를 9장으로 했는데 이는 태자부 대들보 보다 더 긴 것이었다. 화가 난 석선은 석도의 장인의 목을 치고 태위부 대들보를 잘라버렸다. 화가 난 석도는 대들보 길이를 10장으로 더 늘여 지었다. 석선은 측근 모신 양배와 모성과 조생을 불렀다.

 

“ 흉악한 석도가 감히 패역하여 태자인 나에게 이렇게 까지 나오다니.
  저 놈을 죽이는 자는 석도가 가진 국읍을 모두 나누어 주겠다.
  석도의 장례에 아버지는 반드시 올 것이므로 그 기회에
  큰일을 일으키면 성공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

 

양배 무리가 승낙했다. 8월 석도가 밤중에 친한 속료들을 불러 동명관에서 연회를 열고는 불정사에서 숙박했다. 석선이 명령하여 양배 등이 사다리를 타고 불정사에 들어가 석도를 죽이고 칼과 화살을 두고 가버렸다. 


(48) 충격에 빠진 석호의 복수(AD 348)

 

충격을 받은 석호는 며칠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석도의 장례일이 다가오자 석호가 참례하려 했으나 사공 이농이 말렸다.

 

“ 진범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가벼이 나가시면 안 됩니다.”

 

석호는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석선은 석도의 장례식에 찾아와 곡을 하지도 않았으며 시체를 보고 크게 웃고는 돌아갔다. 그리고는 기실참군 정정과 윤무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계획이었다. 석호는 석선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석선을 부르려 했지만 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석호와 석선의 대결국면으로 발전하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석호는 다른 계략을 썼다. 즉 석도의 생모가 너무 충격을 받아서 일어나지 못하고 생명이 위독하다고 석선에게 알렸다. 석도의 모후 두씨는 석선에게도 생모였다. 석선은 자신의 소행인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태연히 모후 병문안을 왔다가 체포되었다. 조생을 제외한 모든 자객이 숨어버렸으나 조생은 모든 것을 다 토해 내었다.

 

격노한 석호는 석선의 목에 쇠고리를 걸어 창고에 가두었다. 그리고는 석도를 죽인 칼과 화살의 피를 직접 맛을 본 다음 슬피 울었는데 궁궐이 울릴 정도라고 했다. 대화상 불도징이 나서서 말했다.

 

“ 석도나 석선이나 모두 폐하의 자식 아닙니까.
  지금 석도 때문에 석선을 죽이시면 이야말로 화가 거듭되는 것입니다.
  만약 석선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면 복록이 길어질 것이지만
  만약 그를 죽이신다면 석선은 혜성이 되어 업궁을 쓸어버릴 것입니다.“

 

석호는 듣지 않았다. 업성 북쪽에 장작을 쌓아놓고 그 위에 표지를 세우고 사다리를 놓은 다음에 석도가 가까이 했던 환관 학치와 유패에게 석선의 머리털을 다 뽑게 하고 혀를 뽑고 그를 사다리로 장작위로 끌어올렸다. 그 다음 유패는 석선의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파고 창자를 터뜨려서 석도가 입은 것과 똑같이 상처를 입도록 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장작에 불을 놓아 시체를 태웠다. 석호는 이 모든 것을 직접 참관했으며 나중에 재를 가져다가 도로에 나누어 뿌렸다. 석호는 평소 귀여워 한 석선의 어린 아들까지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대신들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 꼭 죽여야 한다며 빼앗아 죽였다. 어린 아이들이 죽지 않으려고 석호의 허리띠를 잡고 놓지 않아 결국 허리띠가 끊어지고 말았다. 석호는 이 일로 크게 병을 얻었다. 동궁에 있던 호위부대 400명을 전원 참살했으며 환관 50명도 차열형으로 죽인 다음 장수(漳水) 강물에 던져 버렸다. 동궁 휘하의10만 군사들은 모두 량주(감숙성)으로서 귀양보냈으며 동궁은 폐허로 만들어 돼지우리로 사용했다.


(49) 석호의 열 살짜리 석세 후계 책봉(AD348)

 

태자 석선이 비명에 가자 석호는 당장 후계자를 세우고자 했다. 태위 장거는 연공 석빈과 팽성공 석준 중에서 선택하자고 추천했다. 석호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융소장군 장시가 나서서 반대했다.

 

“ 연공 석빈의 어머니는 비천한 출신인데다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고  
  팽성공의 어머니 정씨는 태자 석수의 친모로써 석수 폐위 때 쫓겨난 일이 있으니
  적절하지 못합니다.“

 

장시는 석호가 늦게 얻은 애첩 유요의 딸 안정공주에게서 낳은 석세를 후계로 세울 생각이 있음을 알았고 그렇게 되면 유씨가 태후가 되니까 실권을 장악할 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장시가 적극 나서서 석세를 옹호하며 말했다.

 

“ 폐하께서 두 번이나 태자를 세우셨으나
  그 모후가 다 비천한 출신이었으므로 이런 화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땅히 어머니가 귀한 사람이고 효자인 사람을 후계로 세우셔야합니다.“

 

석호가 호령했다.

 

“ 경은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내가 태자가 있는 곳을 알고 있소.“

 

갑론을박 끝에 석호는 석세를 후계자로 세웠다. 나이가 열 살이었다.

 

(50) 석호의 황위 등극과 요익중의 석호 질책(AD349)

 

조왕 석호는 이제야 황제로 등극했다. 섭조천왕이 된지 12년 만의 일이다. 동궁의 휘하에 있다가 량주(감숙성)로 귀양가던 10만여 병사들은 모두 무력과 체격이 뛰어난 장사들이었는데 감숙성으로 가던 도중 책임인솔자 양독의 지휘아래 반란을 일으켜 가던 길을 돌아왔다. 그들의 실력이 너무나 뛰어나서 갑옷과 무기가 없이도 한 명이 열 명 이상을 감당하였다. 양독은 스스로를 진의 정동대장군이라 칭하면서 장안으로 진격해왔다. 장안을 지키던 낙평왕 석포가 모든 정예병을 가지고 막았으나 한 번 만에 격파되었다. 양독의 군사는 동쪽으로 나아가 동관을 함락하고 낙양으로 들어갔다. 석호가 이농을 대도독으로 삼아 10만 기병으로 토벌하게 했으나 이농 또한 신안에서 크게 패하여 막아내지 못하고 성고로 퇴각했다.
  
양독은 더욱 동쪽으로 나아가 형양, 진류의 여러 군을 노략질했다. 석호는 무공이 뛰어난 아들 연왕 석빈에게 전권을 주고 관군대장군 요익중과 거기장군 포홍과 더불어 방어토록 했다.
요익중은 자신의 휘하 8천 기병을 이끌고 업에 도착하여 알현을 요청했다. 석호는 병중 이었으므로 직접 나오지 않고 음식만 하사했다. 화가 난 요익중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 주상이 나를 불러서 도적을 처치하라고 불렀으니
  마땅히 만나 보고서 방략을 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나보고 밥만 먹고 가라는 것인데 내가 어떻게 밥을 먹으러 왔단 말입니까?
  또 내가 직접 주상을 보지 못하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안 단 말입니까?“

 

석호가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접견했다. 요익중은 석호를 크게 나무랐다.

 

“ 어린애가 죽어서 근심하는가?
  병 때문에 근심인가?
  자식이 어렸을 때 좋은 스승을 붙여 가르치지 않아서 반역에 이르기까지 했고
  또 그런 아들을 죽였으면 또한 어찌 근심하는가?
  너는 오랫동안 병이 들었는데
  세워 놓은 사람이 어린아이이니 네가 쾌유되지 않으면
  세상은 반드시 혼란에 빠질 것 아닌가. 그것을 먼저 걱정해야지
  어떻게 도적 떼 들을 걱정한단 말이냐.
  양독이란 놈은 궁색하고 고단하여 고향에 돌아갈 생각으로 저러는 것이니
  잔폭한 짓을 하고 어디까지 갈 수 있겠는가.
  이 늙은 강족 요익중이 너를 위하여 한 번에 처리하고 올 것이다.“

 

요익중은 강직하고 사나워서 누구한테든 너라고 불렀으므로 석호도 책망하지 않았다. 앉은 자리에서 사지절과 정서대장군 직책을 내렸고 갑옷과 말을 하사했다. 요익중은 인사도 하지 않고 말을 달려 나갔다. 석빈과 힘을 합해 양독을 형양에서 격파하고 머리를 벤 다음 나머지 무리들을 모두 처단했다. 석호는 요익중에게 서평군공과 함께 칼을 차고 전작에 오를 수 있도록 허락하고 포홍에게는 거기대장군 약양군 및 옹주자사를 내렸다. 
 

(51) 석호의 와병과 혼란(AD349)

 

4월 석호의 병이 심해졌다. 석호는 팽성왕 석준에게 대장군 직을 주어서 관중의 오른쪽을 방어하게 하고 연왕 석빈을 승상으로 삼아서 상서업무를 총괄하게 했다. 그리고 장시는 진위대장군 및 영군장군 이부상서로 삼아서 석빈과 함께 정사를 나누어 보도록 했다. 태자의어머니 유후는 석빈의 정치보좌를 싫어하여 장시를 꾀어서 석빈을 도모하게 하였다. 장시는 사냥으로 양국에 가있던 석빈에게 거짓 편지를 보냈다.

 

“ 주상의 병이 이미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사냥을 좀 더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석빈은 정말로 그런 줄 알고 사냥과 음주를 계속했다. 유황후와 장시는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조서를 고쳐서 불충하고 불효한 석빈을 관직에서 몰아내고 귀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는 장시 동생 장의에게 무사 500명으로 석빈의 집을 지키게 하였다.(AD349년4월9일)

 

4월 19일 석준은 유주에서 업성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를 뵐 수가 없었고 다만 금병 3만 명을 배속 받고 임지(관중의 오른 쪽)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의식을 차린 석호가 석준의 도착을 물었는데 이미 떠난 지 한참 뒤였다. 석호를 호위하는 군사들은 연왕 석빈을 근위병사의 책임을 맡게하고 황태자로 삼을 것을 간청했으나 연왕을 불러도 유황후와 장시가 가로막아 들어올 수가 없었다. 석호의 눈이 가물가물해지자 인새를 직접 가지고 연왕에게 주려고 했지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석호의 마음이 석빈에게 있음을 알아챈 유황후와 장시는 다시 조서를 고쳐서 석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장시를 태보⦁도독중외제군사로 삼았다. 최고의 군권이 장시에 쥐어진 것이다. 시중 서통은 절망에 빠져 음독자살하고 말았다.(4월22일) 그 다음날 석호가 55세의 나이로 죽었다. 열 살 태자 석세가 즉위하고 유씨가 유태후가 되어 황제를 대행했다. 장시는 태위 장거와 사공 이농을 죽이려고 모의했는데 장거가 사이가 좋았던 이농에게 미리 그 사실을 알려줬다. 이농은 즉시 식솔을 데리고 도망갔다.

 
(52) 석준의 무혈 쿠테타 집권(AD349)

 

팽성왕 석준이 하내에 이르렀을 즈음 아버지가 죽은 소식을 들었다. 요익중과 포홍과 석민이 양독을 정벌하고 돌아오다가 이성(하남성 온현)에서 석준을 만났다. 이들 노장들은 석준이 장자이고 도 무공이 혁혁한데다가 석호가 장차 후사로 생각했었으나 말년에 정신이 혼미해 지고 현혹되어 장시와 유후에게 휘둘렸다고 말하면서 장시를 토벌하는 것이야말로 쉽고도 바른 길이라고 설득했다. 석준도 동의했다. 군사를 돌이켜 이성을 출발해서 업성으로 들어가니 주변의 낙주자사 석준과 유국도 합류했다. 석준의 군사들은 탕음(하남성 탕음현)에 진을 쳤는데 융졸이 9만이었고 석민이 선봉에 섰다. 주변 성읍의 주민들은 물론 업성의 주민들도모두 다 석준에게 부응하여 왔다. 간사한 우복야 장리마저 마지막에는 장시에게 등을 돌리고 성문을 열어 석준의 군사를 영입했다. 다급한 유황후와 장시는 석준에게 있는 직책을 총동원하여 환심을 사려 했다. 승상, 영대사마, 대도고, 독중외제군사 녹상서사가 석준에게 내려진 직책이었고 덧붙여 황월과 구석(황제만 가질 수 있는 물건 아홉 가지) 내렸다. 
 
14일 석준이 업 부근에 도착하자 장시가 몸소 나아가 영접했는데 석준이 그를 잡아 가두었다가 다음날 평락시장에서 목을 베었고 삼족을 멸했다. 유씨(유태후 였다)의 명령을 빌어서 석준이 황위를 이어받도록 했다.(AD349년 4월 16일) 석세를 폐위하여 초왕으로 책봉하고 유씨도 태비로 책봉한 다음 얼마 후 모두 죽였다. 옛 연왕 석빈의 아들 석연을 태자로 삼았으며 석감을 시중 및 태부, 낙평공 석포를 대사마에 임명했다. 일등공신 선봉장 석민에게는 도독내외군사 및 보국대장군이라는 최고의 군사직을 수여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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