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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 혼군(#6H) 후조(後趙)의 석호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4월24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3월06일 23시1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2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40) 석호의 남정(AD339)과 2차 요서 북벌 실패(AD339)   

 

동진의 정서대장군 유량이 북벌을 계획하는 동안 후조 석호 또한 남정을 고려하고 있었다. 유량이 북벌을 잠정 중단하고 모보와 번준에게 주성(호북성 황강)을 수비하라고 하는 동안 석호는 기안을 대도독으로 하여 석감, 석민 및 이농 등을 주축으로 5만 군사를 내어 형주(호북성 형주)와 양주(강소성 양주)호북성 쪽을 치고 내려 왔으며 2만 군사는 따로 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모보 등 수비군은 유량에게 지원군 급파를 요청했으나 유량은 방비능력이 충분하다고 여기고 즉각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석민의 기동대는 한수 이남으로 건너와 동진군대를 크게 격파했으며 장학도 주성을 함락시켰다. 모보와 번준은 도망가다가 장강에 빠져 죽었다. 즉시 군대를 지원하지 않은 유량은 표문을 올려 사죄하고 스스로 3등급을 낮추어 행안서장군으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조정에서는 그를 용서하고 원래 직위를 유지시켰다. 유량은 다음해 정월에 사망했다.


(41) 석호가 이수에 연대 제의 (AD340) - 공장의 반대

 

석호는 동진을 차지하기 위해 성한의 주군 이수에게 연대할 것을 제의했다. 동진을 함락시킨 뒤 양분하여 나누어 갖자는 것이었다. 이수는 기쁜 마음으로 수용했고 왕하와 왕광을 수락하는 사신으로 보냈다. 마당이라는 사람을 6군 도독으로 삼아 7만 군사를 파병하기로 했다. 성한의 대신 공장은 결연히 반대했다. 해사명도 극구 말렸다.

 

“ 우리 군데는 작고 약하며
  회계와 오나라는 정말로 먼 곳입니다.“

 

이수는 신하들에게 동진 토벌의 득실을 논하게 했다. 공장이 나섰다.

 

“ 흉노(후조)와 동진 중에서 어느 나라와 교류하는 것이 낫습니까?
  흉노는 승냥이와 같아서 동진이 멸망하게 되면
  곧바로 얼굴을 이리로 돌릴 것 아닙니까.
  옛날 춘추시대 진 헌공의 우국과 괵국의 고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수는 결국 후조와 연대하려던 생각을 바꾸었다. 그러나 공장은 이수의 지도력에 회의를 느껴 거짓으로 귀가 먹고 사지를 쓰지 못한다고 하면서 사직하여 성도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42) 석호와 모용황의 요동 전투(AD340)

 

지난 해(AD339)부터 석호는 무군장군 이농을 영지(하북성 천안현:북경 동쪽 200KM)에 주둔시키고 모용황을 토벌할 준비를 진행했다. 하북 7주의 백성들에게 대대적으로 동원령을 내려 장정 5명 집은 세명, 네 명인 집은 두 명씩 징집했다. 이렇게 해서 모은 50만 대군과 배 1만 척과 곡식 1천1백만 곡을 동원해서 낙안(하북성 낙정현)에 모았다. 요서지방의 주민은 모두 남쪽 연주, 예주 및 낙주 등으로 이주시켰으며 백성들의 말은 강제로 빼앗았다.

 

후조의 어마어마한 대군에도 불구하고 전연의 모용황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말했다.

 

“ 석호가 스스로 낙안성을 지키는데 총력을 기우리고 있지만
  계성(북경)을 방비하는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지금 당장 길을 속여서 계성의 석호의 배후를 습격하면 반드시 그들을 깨뜨릴 것이다.“

 

10월 모용황은 기습부대를 직접 인솔하고 석호의 배후인 거용관(북경시 서북 창평구)을 급습했다. 계성을 지키던 유주자사 석광은 문을 닫고 응전하지 않았다. 모용황은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고양(하북성 보정)까지 내려와 약탈하고는 북으로 돌아갔다. 석광은 나약하다는 판단에 따라 면직 당해 쫓겨났다. 석호의 요동 정벌은 이렇게 해서 패배로 막을 내렸다.


(43) 태자 석도와 석선의 무능함과 환관 신편(申扁)(AD340)

 

조왕 석호는 석도를 태위로 삼고 형이자 태자인 석선과 함께 정사를 교대로 나누어 보게 하였다. 사도 신종이 석호에게 간언을 올렸다.

 

“ 상벌을 주는 것은 임금의 중요하고 고유한 권한이라서
  남에게 빌려 주는 것이 아닌 것은 조금씩 권력이 누수가 되는 것을 막아서
  나중에 반란이나 혼란을 원초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태자의 직책이란 음식을 보살피는 것일 뿐 정치에 간여하는 것이 아닌 것은
  지난 번 석수의 경우와 같아서 넘어진 수레가 그리 멀지 않습니다.
  또 두 분이 권력을 나누게 되면 서로 다툼이 일어날 것이므로
  화가 닥치지 않는 것이 매우 드물게 될 것입니다. 
  아끼는 것이라도 도를 가지고 다루지 않으면 (爱之不以道)
  결국은 해악을 끼치는 것이 될 것입니다.(适所以害之也)“

 

석호는 신종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지혜있고 총명한 환관 신편이 석호의 총애를 받아 기밀을 관장했는데 그것을 잘 아는 석선과 석도는 모든 일을 신편에게만 맡기고 스스로는 술과 사냥에만 몰두하였다. 인사와 상벌 등 후조 조정의 모든 실권은 신편에게 있었으므로 공경대부들은 신편이 지나가는 먼지에 인사를 올릴 지경이었다.
   

(44) 석호의 폭정과 황실의 내분(AD342-AD344)

 

석호는 업성에 40여개의 누각과 고대를 건축하게 하였으며 장안과 낙양의 궁궐도 모두 수리하도록 명령했는데 동원된 인력이 40여 만 명이었다. 또 수도 양국(형태)과 업성 사이의 50여 KM 거리에 나무로 된 고가도로를 건축하도록 하였다. 석호는 황하 남쪽의 네 주에게는 동진을 토벌할 준비를 시키고 청주, 기주 및 유주는 요동 정벌을 준비시켰는데 갑옷을 만드는 사람만 50여 만 명이었고 사공이 17만 명 이었지만 물에 빠지거나 호랑이에게 먹힌 사람이 세 명중 한명이었다. 그 위에 지방관과 토호들은 백성을 착취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요역 동원이 그치지 않자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사십대 중반인 석호는 백성들의 원성에도 아랑곳없이 무절제하게 사냥에 몰두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몰래 미복을 하고는 밤중에 시가를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시킨 작업의 진척을 엿보았다. 시중 위소가 석호에게 충언을 올렸다.

 

“ 폐하께서는 천하의 소중함을 가볍게 여기시고
  도끼를 들고 야밤에 거리를 누비시니 만에 하나
  미친 녀석이 달려들면 비록 지혜와 용기가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는 일이란 때가 있는 법인데
  농사일이 바쁜데도 노역에 시달리다 보니 저렇게 원성이 자자하지 않습니까?
  어질고 성스러운 분이 하실 일은 차마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소의 간언을 가당하게 생각한 석호는 비단과 곡식을 후하게 상으로 내렸지만 제 버릇을 고치지는 못했다.
 
석호는 태자 석선보다도 나이가 더 어린 석도를 꽤나 총애하였는데 석선은 그런 동복동생 석도를 몹시 시기하였다. 석선에게 접근하려는 우복야 장리는 그런 석선의 심리를 꿰뚫고는 이렇게 말했다.

 

“ 제후들의 관리와 병사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당연히 점차 줄여서 근본(즉 황실)의 군사력을 증강시켜야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황실 병력을 늘인다는 명분으로 동생 진공 석도의 군사력을 줄이자는 심산이었다. 석선은 장리에게 그렇게 상주하도록 시켰다. 내용은 석호의 네 아들(진공 석도, 연공 석빈, 의양공 석감 및 낙평공 석포)의 관리와 5만 정도의 사병을 1/3로 줄이라는 것이었다. 석호는 그대로 실행했다. 군사력이 크게 줄어든 왕자들의 불만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이 때 청주에서 요상한 보고가 올라왔다. 제남의 평릉의 북쪽에 있던 돌호랑이가 하루 저녁에 성의 동남쪽으로 옮겨졌는데 늑대와 여우 천여마리가 옮겨진 돌을 따라 가느라고 길이 생겼다는 보고였다. 석호는 돌호랑이가 자신을 의미하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옮겨진 것은 자신이 반드시 장강 이남을 평정할 것이라는 하늘의 암시라고 확신했다. 칙령을 이렇게 내렸다.

 

“ 여러 주의 군사를 동원하라.
  내가 친히 6사(모든 군사)를 관장하여 하늘의 명령을 이룰 것이다.“
 
석호의 명령에 따라 다섯 집이 수레 한 대와 소 두 마리와 쌀 15곡 비단 열 필을 조달하도록 했으며 명을 어기는 자는 즉시에 목을 벤다고 했다. 많은 집에서는 아들을 팔았고 그래도 모자라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한 사람들이 길에서 서로 보일 정도라고 했다. 


일 년 여의 파병 준비가 거의 끝날 무렵인 AD344년 정월 석호는 태무전에서 백관 신료를 모아 신년하례를 올리고 있었는데 때마침 흰 기러기 100여 마리가 큰 길 옆에 모여들었다. 석호는 신하들에게 횐 기러기를 쏘라고 지시했으나 아무도 잡는 사람이 없었다. 태사령 조람이 석호에게 다가와 이렇게 속삭였다.

 

“ 흰기러기가 들에 모인 것은
  바로 이곳이 장차 텅 빌 것이라는 것은 암시하는 것입니다.
  남쪽 정벌을 아무래도 불길합니다.“

 

석호도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선무관으로 가서 크게 열병식을 올린 뒤 100만 대군을 해산했다.(AD344년 1월)


(45) 소환된 석감과 계속되는 폭정(AD345)

 

관중(장안지역)에 진수하여 관할하던 석호의 아들 의양공 석감(石鑒)이 아버지 못지않게 폭정을 자행했다. 노역을 과도하게 부리고 부세를 무겁게 올렸으며 문무관료들의 머리털을 뽑아 갓끈을 만들고 남는 머리카락을 궁녀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장사가 조왕 석호에게 그 일을 고해바치자 석호는 즉각 석감을 업으로 소환하고 그 자리에 다른 아들 낙평공 석포를 임명 배치했다. 그리고 옹주(장안지역), 낙주(낙양지역), 진주(섬서중남부) 및 병주(산서성 태원지역)의 군사 16만을 징발하여 장안의 미앙궁을 수리하도록 했고 낙양궁을 수리하는 데에는 26만 명이 동원 되었다.


사냥을 좋아하는 석호는 나이가 들고 몸이 무거워 말을 타고 좇기가 힘들자 수레 1천여 대를 사냥터 둘레에 늘어놓고는 사냥을 즐겼다. 동네마다 미녀와 좋은 말과 소를 징발했는데 없다고 보고하면 석호의 사냥터에서 불법으로 사냥했다고 무고하여 100여 명 이상을 죽였다. 미녀를 구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처를 강제로 빼앗기도 하고 그 남편을 죽이기도 했으며 지아비가 자살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죽은 사람이 3천여 명이 넘었다고 했다. 석호의 이런 난폭함과 잘못을 금자광록대부 녹명이 간절하게 지적했는데 석호는 녹명을 납살(拉殺,늑골을 부러뜨려 죽임)시켰다.

 

석호의 관군대장군 겸 십군육이대도독인 요익중은 청렴하고 강직하며 검소하고 위엄이 있어서 석호 또한 매우 존중하는 인물이었다. 조정 중대사를 결정할 때에는 항상 요익중의 의견을 들었으며 매번 그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다. 당연히 조정의 공경대부들도 요익중을 존경하여 따랐다.

 

요익중의 영채 안에는 석호의 총애하는 비첩의 동생이 금위로 있었는데 이 사람이 누나의 위세를 믿고서 군영 안에서 큰 소란을 피웠다. 요익중이 당장 그를 잡아들이고 이렇게 꾸짖었다.

 

“ 너는 금위가 되어서 힘없는 백성을 위협하는데
  나는 대신이 되어서 그것을 내 눈으로 똑바로 보았으니  
  절대로 묵과할 수가 없다. “
 
주위에 명을 내려서 목을 베게 하였는데 금위가 땅에 머리를 대고 피가 철철 흐르기까지 사죄했다. 주위에서 굳게 말리므로 요익중이 그를 용서해 주었다.(AD345)


(46) 환관 엄생의 전횡과 포홍의 충간(AD346)

 

석호의 총애하는 환관 엄생이 위세를 업고서 상서 주궤를 몹시 증오하였다. 마침 오랫동안 장마가 지자 엄생은 도로를 제대로 수리하지 않아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으며 게다가 조정 정치를 비방했다고 주궤를 참소했다. 석호는 즉각 주궤를 가두었다. 포홍이 나서서 주궤를 옹호했다.

 

“ 폐하께서 양국과 업궁을 가지고 계신데 장안이나 낙양궁은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사냥하는 수레만 1천 대이고 둘레만 해도 수 백리 울타리에서 금수를 기르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의 처를 10여 만 명을 탈취하셔서 후궁에다 채워놓으시니
  성스러운 황제와 밝은 임금이 정녕 이렇게 하겠습니까?
  오늘은 길을 제대로 닦지 않았다고 상서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폐하께서 올바른 덕치를 하지 않으시니 하늘이 노하여 비를 70여 일이나 내린 것입니다.
  귀신같은 100만 군사라 하더라도 비가 개이고 이틀 만에
  진흙구덩이를 제거할 수 없을 텐데 어찌 한 사람에게 그것을 기대한 단 말입니까.
  정치와 형벌이 이런 모양이니 사해는 어떨 것이며 후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디 작업을 즉각 중단하시고 원유는 없애시며 궁녀들을 풀어서 내보내고       
  주궤를 용서하시옵소서.“

 

석호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평소 존경하는 열 살 연상의 어른이었으므로 포홍에게 죄를 주지는 않았다. 장안과 낙양 공사는 중단했으나 주궤는 죽였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고발하는 것을 허용했으나 조정정치를 비방하면 엄벌에 처하는 법을 만들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군주와 언론과 소통의 길이 꽉 막혀버렸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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