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 혼군(#6F) 후조(後趙)의 석호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4월10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3월06일 23시4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4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29) 석륵이 대조천왕(大趙天王)이 되고 석호가 불만을 품다. (AD330)

 

건국한지 25년 된 전조를 멸망시킨 석륵은 스스로 대조천왕(大趙天王) 및 행황제사(行皇帝事)라고 불렀다. 아직 황제라고 부르지는 않았으나 황제라고 자칭한 전조를 멸망시켰으므로 황제직을 임시(영)로 대행한다는 듯을 품고 있는 직책이다. 열 여섯살 된 큰아들 석홍(石弘:AD314-AD335)을 세자에 책봉했다. 둘째 아들 석굉에게는 대선우,  표기대장군 및 도독 중외제군사, 셋째 아들 석빈에게는 좌위장군 및 태원왕, 그리고 막내아들 석회에게는 보국장군과 남양왕을 책봉했다. 그리고 입양한 동생 석호는 태위 및 상서령으로 임명했고 석호의 아들 석수와 석감에게도 제왕 및 팽성왕을 책봉했다.(AD330년2월)

 

중산왕 석호는 이번 인사에 매우 불만이었다.

 

“ 대선우라는 자리를 자신에게 주어야 하는데
 ‘노란 주둥이 비첩의 아들(석홍을 말함)’에게 주다니
 기가 막혀서 잠도 못자고 먹을 수도 없다.
 주상이 안가(사망)하기까지 기다리다가는 종족이 남아있지를 못하겠네.”

 

석륵의 신하들은 계속해서 천자의 자리에 오를 것을 재촉했다. 석륵은 결국 9월 황제를 칭하고 제위에 올랐다. 부인 유씨를 황후, 아들 석홍은 황태자로 올려 책봉했다.


(30) 충간의 기개를 살려라 : 궁궐 건축을 반대한 속함을 살림(AD331)

 

황제가 된 석륵은 도읍지 업에 거대한 궁궐을 지을 생각이었다. 정위인 속함이라는 자가 극렬하게 반대하며 나서자 석륵은 그의 목을 벨 참이었다. 중서령 서광이 나서서 석륵에게 말했다.

 

“ 속함의 말을 채용할 수 없으면 채용안 하시더라도
  신하의 말 하는 것은 용납하셔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어느 날 아침에 바른 말을 했다고
  경이라는 높은 자리에 오른 신하의 목을 자르신단 말입니까?“

 

뜨끔해진 석륵은 탄식하며 말했다.  

 

“ 임금이 되어서 스스로 이런 일도 제대로 못하는구나.
  필부가 비단 100필만 있어도 집을 구하려고 난리일 텐데
  사해를 소유한 임금이 무엇을 못 하겠느냐.
  궁궐을 꼭 지어야 할 것이지만
  임금의 처사에 반대하는 신하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니
  궁궐 짓는 명령을 거부한 신하의 기개를 높이 평가하도록 하라.“

 

속함에게 비단 100필과 벼 100곡을 하사하였다. 또 해마다 현량과 방정을 추천하도록 조서를 내렸으며 등용된 현량방정도 새로운 인사를 널리 추천하도록 하였다.       
 

c43a7e76c86a8bbaab6bcc1e16600bbc_1582549

 

 

                                           

(31)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물은 석륵(AD332)

 

황제가 된 석륵이 정초에 신하들과 함께 연회를 열면서 물었다.

 

“ 나를 옛날과 비교한다면
  어떤 황제와 견줄 만하오?“


중서령 서광이 대답했다.

 

“ 신과 같은 폐하의 무공과 모략은 한 고조(유방)을 지나치시니
  후세에도 비교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석륵이 껄껄거리며 대답했다.

 

“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겠소. 경의 말은 좀 지나친 것 같소. 
  한 고조를 만나면 당연히 북면하고 신하로써 섬겨야 할 것이고
  한신과 팽월을 만난다면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고
  만약 후한 광무제를 만난다면야 서로 누구에게 죽을지 모를 것이요.
  대장부는 마땅히 공명정대하여 마치 해와 달같이 밝아야 할 것이지
  조맹덕(조조)이나 사마중달(사마의)처럼
  고아(유비의 아들을 의미)나 과부(손권의 부인)를 속여
  여우처럼 천하를 빼앗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요.“
                                     
석륵은 비록 배운 것은 없었지만 학생들에게 책을 많이 읽도록 권고하고 또 그들에게 책의내용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역사를 통해 성공과 실패의 사례를 귀담아 들었으며 그것을 논평하기를 좋아했으므로 괄료들 또한 석륵의 깊은 통찰과 이해력에 존경심을 보냈다.  

  

(32) 동생 석호를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AD332)

 

우복야 정하가 석륵에게 조용히 말했다.

 

“ 중산왕 석호는 용감하고 사나우며 권모술수와 지략을 모두 갖추어
 다른 사람들이 따라 잡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폐하 외에는 눈에 보이는 사람이 없는 듯 오만하게 행동하며
 또 내심 지난 해 인사에 대한 불만도 쌓여 있으니
 앞으로 어떤 못된 일을 할지 모릅니다.
 서둘러 그를 제거하셔서 커다란 계책을 편하게 이루셔야 합니다.“

 

석륵이 말리면서 말했다.

 

“ 아직 천하가 안정되지 않았다.     
  태자 석홍도 아직 어린아이다.
  중산왕은 골육지친으로 나의 천명을 진심으로 도운 공로를 가지고 있다.
  마땅히 이윤과 곽광의 역할을 해야 할 터인데
  어찌 경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요.
  태자의 외삼촌으로써 권력과 부귀를 멋대로 못할 것이 두려워 그런 것이요?
  내 죽을 때 마땅히 경을 고명대신으로 삼을 것이니
  지나치게 염려하지 마시오.“ 

 

정하가 문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 신이 염려하는 것은 국가의 공적인 일이지
  개인의 사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는 어떻게 충언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중산왕이 비록 황태후께서 직접 기르셨지만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며
  비록 작은 공로를 세우기는 했지만
  그의 생부와 친속들에게 충분히 은혜와 영광을 베푸셨습니다.
  불만에 가득한 그의 내심을 볼 때 만약 그를 일찍이 제거하지 않으신다면
  종묘에 따뜻한 제사가 올라오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

 

석륵은 끝내 석호를 미리 제거하라는 정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정하가 나오면서 서광에게 그것을 알리자 서광 또한 걱정하면서 말했다.

 

 “ 중산왕은 우리 두 사람에게 이를 갈고 있는데
   만약 변고라도 생긴다면
   나라는 물론 우리 두 집안에도 화가 미칠 것이요.“

 

서광이 수심이 가득한 석륵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 어찌 폐하께서는 뱃속의 질환(석호를 암시)은 걱정하지 않으시고
  나라를 통일하는 것에만 몰두하십니까?
  지금 석호를 그냥 두시면 반드시 황실을 기우릴 것입니다.
  최근에 보면 중산왕은 황태자마저 가볍게 여기는 듯한 기색을 보이고 있습니다.
  서둘러 대책을 세우십시오.“

 

그러나 석호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 대신 황태자 석홍에게 직접 정치를 보살피는데 참여하도록 했다. 중대한 정벌이나 사형집행 이외의 모든 정치는 석홍에게 위임하여 서둘러 황태자 권위를 세우도록 했다. 황태자를 돕는 일은 중상시 엄진이 도맡았다. 엄진이 아니면 황태자는 아무 것도 결정할 수가 없게 되자 엄진의 권한은 석호를 능가했다. 석호의 집에는 인적이 끊겨 참새 틀을 놓을 수 있을 정도(可投雀羅)로 한산해졌다.  

 

(33) 석륵의 죽음과 석호의 무혈쿠테타(AD333)

 

AD333년 여름 석륵이 병으로 눕게 되었다.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중산왕 석호는 금중에 들어와 직접 병수발을 들면서 모든 조서를 좌지우지하고 출입을 통제했다. 궁궐 밖에서는 석륵의 병환의 정도가 어떤지를 알 수가 없었다. 석호는 외지에 나가있는 진왕 석굉(석륵의 친 아들)과 팽성왕 석감(석호의 아들)을 수도 양국(형태)으로 불러 들였다. 병에 차도가 생겨 나아진 석륵이 곁에 있는 석굉을 보고 물었다.

 

“ 어찌하여 업성을 지키지 않고 이곳에 있냐.

  왕을 부른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냐 아니면 스스로 온 것이냐?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면 당장 목을 벨 것이다.“ 

 

석호가 두려워하며 말했다.

 

“ 폐하가 걱정이 되어 스스로 온 것입니다.

 당장 임지로 보내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석호는 즉시 석굉을 억류했다. 며칠 뒤 석를이 석굉이 어디 쯤 갔냐고 묻자 절반 정도는 것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석륵이 유언을 내렸다.

 

“ 석홍(석굉과 석회) 형제는 마땅히 서로를 잘 보호해야 하느니라.
  사마씨가 앞서 간 수레와 같으니라.
  중산왕은 주공 단과 곽광을 생각하며 처신에 조심하여
  사람의 입에 오르지 않도록 유념하라.“

 

그리고 석륵은 죽었다(AD333년 7월21일). 이 때 나이는 59세였다. 석호는 즉각 석홍을 통제한 뒤 정하와 서광을 감옥에 가두고 아들 석수를 불러 궁궐을 장악했다. 석홍이 두려워 자리를 양위하려고 하자 석호가 말했다.

 

“ 군주가 죽으면 당연히 아들이 즉위하는 법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석홍이 그래도 계속 사양하려하자 석호가 말했다.

 

“ 만약 무거운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면
  천하 사람들은 당연히 마땅하고 옳은 길을 찾을 것인데
  미리 겁을 먹고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석호의 종용에 따라 결국 석홍이 등극했다.(AD333년 7월 말) 석홍은 8월 중산왕 석호에게 승상⦁위왕⦁대선우로 삼고 백관을 통할하게 하였다. 정하와 서광에게는 사약을 내렸다.

 

<다음에 계속>  ​

4
  • 기사입력 2020년04월10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3월06일 23시41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