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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 혼군(#6D) 후조(後趙)의 석호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3월27일 17시11분
  • 최종수정 2020년03월25일 16시36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16) 산동의 청주자사 조억

 

산동의 청주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청주자사 조억은 왕미의 부하 장수였다. 따라서 왕미를 죽인 석륵과는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조억은 야금야금 서쪽으로 영토를 늘여서 치박까지 나아왔고 군대는 10만을 능가했다. 등 뒤에 칼을 겨누고 있는 조억을 두고는 석륵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석륵은 유총에게 표문을 올렸다.

 

“ 조억의 본심은 영토 확장에만 있습니다.
  토벌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나 유총은 허락할 수가 없었다. 만약 석륵이 조억마저 병탄한다면 하북의 최강자는 자신이 아니라 석륵이 될 것이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AD315년 3월) 석륵도 유총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 만약  유총과 대적한다면 서쪽의 유총과 동쪽의 조적을 동시에 대적해야 할 형국이 될 것이고 북쪽의 단필제와 남쪽의 사마예에게 완전히 포위되는 꼴이 될 것이었다. 그 대신 석륵은 석호를 시켜 서진의 연주자사 유연(劉演)이 있는 늠구를 공략했다. 유주자사 단필제는 즉각 동생 단문앙을 보내 유연을 지원했다. 석륵가 늠구를 함락시키자 유연은 단문앙의 군영으로 도망갔다. 석호는 유연의 동생 유계를 인질로 잡고 돌아왔다.(AD316) 
    

(17) 석륵의 병주 공략

 

병주(산서성 태원)는 석륵의 고향이자 뿌리였다. AD316년 가을에 하동과 평양에 큰 황충이 일어나 굶어 죽는 사람이 열에 5-6명이나 되었다. 석륵은 장수 석월과 2만 기병을 보내어 거의 20만에 달하는 유민들을 위로하고 받아들였다. 유총은 사자를 보내 석륵을 꾸짖었다. 남의 영토와 주민을 뺏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러나 석륵의 생각은 따로 있었다. 몰래 조억과 유대관계를 맺은 것을 보면 석륵의 의도는 분명했다. 배후 청주를 든든히 한 뒤 병주를 병탄하자는 것이었다.(AD316년7월) 당시 병주자사는 서진의 유곤이었는데 석륵은 병주의 동남쪽 속현 낙평(산서성 석양)을 전격적으로 포위했다. 낙평태수 한거는 급히 유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유곤은 탁발의로와 사이가 좋았으므로 그의 병력을 빌어 석륵을 토벌하려고 했다. 유곤의 측근 기담과 위웅은 반대했다. 탁발의로의 군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유곤의 말을 듣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였다. 유곤은 듣지 않고 보병와 기병 2만 군사로 출병했다. 기담의 2만 군사가 몰려온다고 하자 석륵의 부장 중에서 이렇게 말하는 자가 있었다.

 

“ 기담의 병력은 매우 예리합니다.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보루를 크게 높이고 해자를 깊이 파서
  예봉을 꺾은 다음에 공격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석륵이 화를 내며 말했다.

 

“ 기담의 보병과 기병이 숫자도 많고 강력한 것도 사실이다.
  하나 먼 길을 오느라고 지쳐있고
  또 호령과 규율이 가지런하지 못하니 어찌 정예군이라고 하겠는가?   
  또 막 도착하려는 적군을 두고 도망가는 모습을 보여서야 되겠느냐.
  퇴각하는 우리 후미부분을 공격하면 무너지는 것도 틈이 없을 정도가 되지 않겠느냐.
  언제 보루를 쌓고 해자를 판단 말이야?“

 

즉각 말한 사람을 베어버렸다. 공장을 선봉장으로 삼고 명령을 내렸다.

 

“ 뒤에 쳐지는 사람은 즉각 목을 벨 것이다.”

 

석륵은 곧바로 험한 요새를 점거하고 산 위에다 가짜 군사를 늘어놓았다. 길목마다 군사를 매복시켜 놓은 뒤 경기병을 보내 전투를 일으키고는 바로 퇴각하여 적군을 유인하였다. 기담의 병사들은 퇴각하는 공장의 선봉을 쫓아가다가 매복군의 공격을 받고 대패했다. 한거도 낙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렇게 되자 사공이면서 병주자사 유곤의 오른팔이던 이홍이 유곤을 배반하고 석륵에게 투항했다. 유곤도 근거지를 잃은 셈이어서 갈 곳이 없었다. 유주자사 단필제가 유곤을 불러 의형제를 맺고 혼인으로 결속을 다졌다. 석륵은 낙평과 양곡의 주민들을 양국으로 옮겼다. (AD316년 11월) 바로 이 때 유총은 장안을 포위하여 서진황제 민제로 부터 항복을 받아서 서진을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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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거듭되는 혼란과 근준의 쿠테타(AD318)

 

AD317년과 AD318년에는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서진이 멸망하면서 황제 민제는 진나라를 계승하라는 유지를 몰래 송철을 통해 남경의 사마예에게 전달했다. 사마예는 즉각 동진을 건국했다.(AD317년 4월4일) 유곤과 단필제는 진 조정에 충성을 바치기로 삽혈하며 맹세했다. 기주자사 단필제와 그 동생 단말배가 권력을 두고 심한 갈등을 하면서 그 틈바구니에 걸린 유주자사 유곤은 단필제에게 피살되었다.(AD318년) 민심은 유곤을 죽인 단필제에 등을 돌렸다. 유곤의 부하들은 일부는 단말배에게 붙었고 일부는 석륵에게 투항했다. 민심을 업은 단말배는 단필제를 공격하여 계성(북경)에서 몰아내고 스스로 유주자사를 칭하였다.
 
유총의 상국 유찬은 황태제 유예마저 모함으로 숙청하였으며(AD317년 4월) 근준을 시켜 죽여버렸다. 또 서진의 후환을 뿌리 뽑는다는 이유로 폐위된 민제 사마업마저 죽였다(AD317년11월). 유총이 그 다음해 AD318년에 죽자 유찬이 황제가 되었다.(AD318년 7월) 그러나 유총의 전조 조정은 외척 근씨의 수괴 근준의 농간에 휩싸이게 된다. 근준은 유총의 두 부인 근월광, 근월화의 아버지였고 동시에 유찬 부인의 아버지였다. 근준은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사위 유찬을 이용했다. 여러 훈구대신들이 자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으려 한다고 모함했다. 유찬이 믿으려하지 않자 근준은 딸들을 동원해서 유찬의 마음을 돌리게 하였다. 결국 대부분의 황실 종친들이 죽었다.(AD318년 7월) 정권을 잡은 근준은 자신의 친척 근명과 근강을 을 핵심 군사요직에 앉히고 금자광록대부 왕연을 움직여 유찬을 몰아내는 쿠테타를 모의했다. 왕연이 거부하자 근강이 가두었으며 곧바로 유찬을 잡아 죽이고 모든 유씨도 함께 처형했을 뿐만 아니라 유연과 유총의 능묘마저 다 파헤쳐 훼손시켰다. 스스로 대장군, 한천왕이라고 하면서 백관을 거느리며 칭제했다.

      

장안에 주둔하고 있던 상국 유요는 즉각 군사를 일으켜 수도 평양(임분)으로 진군했다. 석륵도 5만 군사를 거느리고 형태부근에서 출병을 준비했다. 10월에 유요가 적벽(산서성 영제현)에 당도하자 무리들이 다투어 항복하였으며 주변의 권고를 받아들여 제위에 올랐다. 근준은 시중 복태를 보내 석륵에게 화의를 요청했으나 석륵은 복태를 잡아 유요에게 보냈다. 유요는 복태를 근준에게 보내 설득시켰다. 그러나 근준은 복태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평양에 거처하던 유요의 어머니와 형제를 모두 죽였다. 더 이상 저항할 능력도 없는데다가 근준의 포학함에 놀란 근준의 측근 교태와 왕등과 위장군 근강은 근준을 죽이고 근명을 주군으로 받들면서 유요에게 항복했다. 왕등과 근강 등이 자신이 아닌 유요에게 항복하자 화가 난 석륵은 곧바로 평양의 근명을 공격했다. 석륵은 석호와 더불어 유주 및 기주의 군사를 몰아 평양을 공격했다(AD318년12월). 다급한 근명은 유요에게 구원을 청했지만 유요 또한 석륵의 예봉을 감당하기 어려워 서쪽 속읍(산서성 백수)으로 군영을 피해 옮겼다. 석륵은 평양성을 모두 불태우고 주민들을 대거 양국(형태)로 이주시켰다. 수도 평양(임분)에서 밀려난 유요는 도읍을 장안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AD319년)


(19) 배신자 조평락의 삼족을 멸함 : 유요와의 결별과 후조 건국(AD319)

 

근준의 난을 평정하고 평양을 괴멸시킨 석륵이 승리의 소식을 사신 왕수를 통해 유요에게 올렸다. 유요는 석륵에게 태재 및 영대장군, 그리고 조왕을 내렸다. 이 때 왕수를 수행하여전조에 온 조평락은 공직을 받고 그대로 눌러 앉아 있었는데 유요에게 석륵의 진의는 전조의 속국으로 충성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배반하고 공격해 올 것이라고 귀띔했다. 유요는 격분한 나머지 왕수를 잡아 죽였는데 같이 수행 온 유무는 몰래 도망을 쳐서 석륵에게 돌아와 일어난 일을 모두 고해 바쳤다. 석륵이 분개해하며 말했다.
 
“ 나는 유씨를 섬기면서
  신하로써 해야 할 직분 이상으로 충성했다.
  저 사람의 기초는 모두 내가 이룬 것인데
  지금에 와서 나를 도모하려 들다니 가소롭기 짝이 없다.
  조왕이든 조황제든 나 스스로 하는 것이지
  어찌 사람이 시켜 주기를 기다릴 것이냐?(赵王、赵帝,孤自为之,何待于彼邪)“

 

석륵은 조평락의 삼족을 멸했다. 이때부터 석륵은 전조의 유씨 조정과의 주종관계를 청산하고 확연하게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장안으로 수도를 옮긴 유요는 국호를 한에서 조(역사에서는 前趙 혹은 漢趙라 칭함)로 변경하였다. 주변의 강권에 따라 석륵도 조나라(後趙)를 건국하였다.(AD319년 11월)

 

석륵은 석호를 보내 북쪽 삭방지역의 단필제를 공략하였다. 단필제는 북경 쪽으로 도망갔으나 탁발울률이 추격해오자 산동의 낙릉(산동성 덕주 낙릉시)으로 도피하여 기주자사 소속에게 의탁하였다. 이로써 석륵은 사실상 태원과 북경의 거의 지역을 손에 넣게 되었다. 석륵이 북방경략을 거의 마치게 되자 다음은 산동방면이 될 것이 확실했다. 초조해진 예주자사 조적은 석륵에게 사신과 함께 거대한 예물을 보내면서 황하를 경계로 서로 침범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자고 제안했다. 석륵의 생각은 산동성 조적이 아니라 먼저 유요의 장안의 숨통을 끊는 것이었으므로 흔쾌히 동의했다.


(20) 석륵의 낙양 함락(AD320) 

 

AD319년 유요는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서 종묘, 사직단, 남교 북교를 건립하고 국호를 조라고 명명했다. 석륵은 석호를 시켜 단필제가 도망가 있는 기주자사 소속을 습격했다. 쉽게 소속을 사로잡은 석호는 그를 수도 양국으로 송환했다. 석륵은 소속이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평가하면서 극진한 대우를 펴고 종사중랑으로 등용하면서 명령했다.

 

“ 앞으로는 선비를 붙잡으면 죽이지 말고
  반드시 산 채로 데리고 오라.“

 

낙양에 주둔하고 있던 전조의 장수 윤안, 송시, 송서 및 조신의 네 장수가 후조에게 항복해 왔다. 석생이 기쁜 마음으로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가는 동안 이들 네 장수는 후조를 배반하고 사주자사 이구에게 투항해 버렸다. 이구는 영천태수 곽문에게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화가 난 석생이 서둘러 낙양에 진입하여 전조의 군사와 주민을 모두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가버렸다. 이로부터 낙양은 텅 빈 유령도시가 되고 말았다.


(21) 석륵의 서감격파와 회북지역 장악(AD322)
 
전조의 연주(산동성 서부)자사 서감은 전조 조정이 흔들리자 곧바로 전조 조정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주변지역을 노략질하고 심지어는 남쪽으로 내려와 동진의 땅을 범하기도 하였다. 동진 황제 사마예는 양감을 보내 서감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AD319년8월) 그러나 양감은 하비(강소성 수녕)에 군사를 세워 놓고 서감을 공격하지 않았다. 답답하게 여긴 부장 서주자사 채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서감을 크게 깨뜨렸다. 당황한 서감은 석륵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석륵은 장수 왕복도를 보내고 장경을 그 뒤에서 지원하도록 했다. 서감은 난폭하기 그지없는 왕복도를 죽여 버리고 동진에게 항복의 뜻을 전달했다. 그러나 사마예는 서감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겨 항복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양감과 채표에게 재공격을 명령하였다. 여전히 양감이 머뭇거리자 상서령 조협이 양감을 탄핵했고 그 자리에 채표를 앉혔다. 양감을 추천했던 왕도도 자신의 잘못을 아뢰며 삭탈관직을 요청했으나 황제 사마예가 허락하지 않았다.(AD320년 4-7월)   
 
석륵은 중산공 석호와 보기병 4만을 파견하여 태안의 서감을 공격했다. 당황한 서감은 처자를 인질로 보내며 화의를 요청했다. 지난번에도 화의를 요청했다가 배반한 적이 있었지만 석륵은 이번에도 선의로 받아들여 항복을 받아줬다. 석호는 군사를 몰아 변성(강소성 사수)수녕)의 채표를 공략했다. 채표는 군사를 하비(강소성 수녕)로 물리고 수비에 치중했다. 그러나 서감에게 공격을 받아 크게 무너졌다. 채표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건강에서 참수되었다.(AD320년10월25일) 석호는 봉구(하남성 봉구)에 기지를 쌓고 돌아왔다.

 

다음해(AD321) 2월 서감은 다시 마음을 바꾸어 동진에 항복하겠다고 청하였다. 이해에 석륵은 석호를 보내 북쪽의 단필제를 공격하였으므로 서감을 쫓을 겨를이 없었다. 단문앙이 석호에게 사로잡히고 단필제를 비롯하여 소속과 그의 식솔들이 석호에게 항복하고 나서야 석륵은 동남쪽의 서감에게 눈을 돌릴 수가 있었다. 석호는 AD322년 2월 4만 정예군을 이끌고 산동성 태안의 서감을 공격했다. 서감은 몇 달 동안 잘 버텼으나 결국 그 해 7월에 태안이 함락되었다. 서감은 사로잡혀 양국으로 송환되었고 석륵은 서감을 자루에 넣어 매단 다음에 100척 누각에 매달아 놓고서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그런 다음에 서감에게 억울하게 죽은 장수 왕복도의 처자에게 서감의 인육을 씹어 먹게 하였으며 서감의 수하 3천명을 모조리 땅을 파고 묻어버렸다.(AD322년 7월) 석륵은 연주자사 치감이 합비(안휘성 합비)로 물러나자 그가 통치하던 추산(산동성 추현)땅을 병합했고 서주와 연주의 모든 땅은 석륵의 영토가 되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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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3월27일 17시11분
  • 최종수정 2020년03월25일 16시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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