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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 혼군(#6B) 후조(後趙)의 석호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3월13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3월06일 23시47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6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7) 유연의 대대적 남침과 석륵이 장빈을 얻음(AD309)

 

AD308년 황제에 오른(10월 3일) 전조의 유연이 도읍을 여양(산서성 이석)에서 포자(산서성 습현)을 거쳐 AD309년 평양(산서성 임분)으로 옮긴 의도는 분명했다. 세력을 더 남쪽으로 확장하여 장안의 서진을 멸망시키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들 무군장군 유총을 남쪽으로 태행산(하북성과 산서성 경계를 이루는 산맥)을 향해 나아가게 하고 보한장군 석륵은 유령 등 10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동쪽방면으로 옛 조나라와 위나라 지역이었던 위군(하남성 임장현), 급군(하남성 급현), 돈구(하남성 청풍현) 방면으로 보냈다. 지역의 방위군들은 풍문만 듣고도 저항없이 석륵에게 귀항했다.  

 

AD309년 석륵은 10만의 대군사로 거록(하북성 평향, 형태부근)과 상산(하북성 정정현)지역으로 내려왔다. 이 때 석륵은 혼자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음을 통감하고 지역 인사를 적극 영입하고 우대했다. 이 때 등용된 사람 중에 장빈은 보좌역의 책임자인 모사로 앉히고 조응은 고굉으로 삼았으며 기안, 공장, 지웅, 도표, 녹명 등을 조아(爪牙,최측근 보좌)로 임명했다.

 

조군(하북성 고읍현) 사람인 장빈은 책을 많이 읽고 책략이 뛰어나서 스스로를 장자방(전한 창업공신 장량)으로 비유하였는데 마침 석륵이 고향지역을 지나가게 되자 친한 사람들에게 석륵과 같이 일하면 대업을 이룰 것이라고 하며 석륵에게로 찾아가 큰 소리로 뵙기를 청하였으나 석륵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장빈이 여러 번 계책을 올렸지만 석륵은 시큰둥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매번 그의 말대로 상황이 전개되자 장빈의 뛰어남을 깨닫게 되어 군공조로 삼고서 인사와 전략 모든 것을 그에게 자문하여 결정하였다.  

 

유연이 유총과 왕미를 보내 태행산의 서쪽을 다라 내려와 남쪽의 낙양을 공략하는 동안 석륵은 동쪽으로 나아가 기주(하북성 형수 남쪽)를 공격하여 자사 왕빈을 죽이고 남쪽으로 내려와 여양(하남성 준현)에 기착하였다.


(8) 하남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석륵과 유연의 병사와 유총의 등극(AD310)

 

하남 준현을 장악한 석륵은 더 남쪽에 있는 백마(하남성 활현)를 함락시키고 왕미와 함께 서주, 예주, 및 연주로 세력을 확장시켰다.(AD310년 1월) 이 때 석륵 무리의 세력범위는 하북성 남부와 하남성 북부 그리고 산동성 서부 등으로써 유연이나 서진 정부가 무시할 수 없는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 당시 유연이 7월에 와병하게 되면서 전조 조정은 큰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유연은 신임하는 이희와 태재 유환락에게 태자 유화를 잘 보필해 줄 것을 부탁하고 죽었다.(7월 18일)
문제는 평소 유연에게 대우와 승진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유예와 호연유였다. 호연유는 태자 유화의 외삼촌이었다. 호연유는 지금의 형국이 말이 황제이지 실권은 군권을 가지고 있는 유총이나 조정을 책임 맡고 있는 대사도 유유와 상서령 유륭, 그리고 사예교위 유차의 세 왕이 가지고 있으므로 황제 유화는 사실상 허수아비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어리석은 황제 유화는 외삼촌 호연유의 말을 믿고 군사를 일으켰다. 조정안에서 아무 낌새도 못 차리던 유유와 유융은 유예와 호연유에게 무참히 죽었으나 유차는 평양(산서성 임분)에 있던 유총에게로 도망가서 살았다.(7월 23일)

 

유총은 즉각 군사를 발동하여 임분에서 장안으로 진격했다. 큰 어려움 없이 황궁 내 유예의 반란세력을 진압한 유총은 호연유와 유예는 물론 유화마저 처형했다. 그리고 자신은 유연의 서자였으므로 적자인 유예에게 자리를 양보했으나 유예는 나이를 들어 양보했다. 결국 나중에 유예가 나이가 들면 다시 양위를 한다는 조건으로 유총이 황위에 올랐다.(AD310년7-8월) 그러나 얼마 뒤 유총은 약속을 어기고 황태제 유예와 유연의 적자 유공을 모두 죽였다.
     

(9) 석륵이 왕미와 구희 처단(AD311)

 

전에 진나라 사예교위였던 책사 유돈이 왕미에게 이렇게 권했다.

 

“ 진나라 안동장군 조억과 힘을 합해서
  석륵을 도모해야 합니다.“

 

왕미가 유돈의 계략을 받아들여 편지를 써서 유돈에게 주면서 조억을 부르고 동시에 석륵도 초청하여 함께 청주로 가자고 꾀었다. 유돈이 항관에서 나와 조억에게로 가다가 석륵의 군사들에게 사로 잡혔다. 석륵은 왕미가 조억에게 보내려 했던 편지를 읽고 계략을 알아내고는 즉시 유돈을 죽였다. 물론 왕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구희가 석륵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왕미는 내심으로는 매우 불쾌했지만 겉으로는 축하하는 편지를 보내 말했다.

 

“ 공께서 구희를  사로잡은 것도 대단하지만
  그를 죽이지 않고 채용하신다니 더욱 대단하십니다.
  구희를 공의 왼쪽에 두시고 저를 오른 쪽에 두신다면
  천하는 평정이라는 말할 거리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석륵이 장빈에게 말했다.

 

“ 저 흉악한 놈이 속내를 감추고 나를 치켜세우는 것을 보면
  나를 도모할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장빈이 석륵에게 왕미를 유인하는 계책을 내놓았다. 때마침 왕미가 북쪽의 유랑민들과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므로 석륵에게 지원군을 요청하는 형편이었다. 왕미의 구원 요청에 대해 석륵이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상황이었는데 장빈이 이렇게 말했다.

 

“ 오늘이야말로 공이 왕미를 잡도록 하늘이 내려 준 날입니다.
 
장빈은 석륵이 나서서 왕미를 위협하는 유랑민들을 쳐부숴 의심을 제거한 다음 왕미를 잔치에 초청하자는 계략을 내놓은 것이다. 석륵은 장빈의 말대로 군사를 일으켜 유서 등 유랑민들을 격파했고 왕미는 더 이상 자신을 구원해 준 석륵을 의심하지 않았다. 겨울에 석륵은 하남성 영릉현에서 작은 잔치를 베풀고 왕미를 초대했다. 왕미의 측근 보자 장숭이 의심하며 가지 말 것을 권했으나 왕미는 듣지 않았다. 모두들 한껏 술에 취하자 석륵이 손수 왕미의 목을 베었고 왕미의 군사를 합병하고서 주군 유총에게는 반란을 꾀했다고 보고했다.(AD311년10월)   

 

유총은 자신의 유력한 강력한 부하였던 왕미를 자신의 허락도 없이 죽인 것에 대해 매우 분노하고 꾸짖었으나 다독거릴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석륵이 자신에게 반기를 든다면 자신의 위치조차 위태로울 것이 분명했다. 유총은 석륵에게 진동대장군, 독병유이주제군사 및 영병주자사의 직책을 내려 위로했다. 석륵은 구희와 왕찬 등 과거 서진의 막료였던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들을 모두 죽였다.
   

(10) 석륵의 생모를 보내온 유곤과 절교(AD312)

 

당시 하남 일대를 돌며 노략질 하다가 갈피(하남성 신채현)에 머물던 석륵은 뜻밖에 큰 선물을 받았다. 서진의 병주자사 유곤이 약 4년 전 서진군사에게 붙잡히면서 헤어진 석륵의 생모와 친척 동생 석호를 찾아서 사신과 함께 보내온 것이다. 유곤은 서한에세 이렇게 석륵에게 말했다.  
 
“ 백전백승 하더라도
  주군을 만나면 의병이 되는 것이고
  역적에게 붙으면 도적이 되는 것입니다.
  성패의 운수는 마치 호흡과도 같아서
  불면 차가워지고
  마시면 따뜻하게 되는 법입니다.
  이제 황제께서 시중, 거기대장군, 영호흉노중랑장 및 양성공의 직함을 내리셨으니
  장군께서는 이를 받으시고
  역적 유총의 휘하에서 벗어나십시오.“
 
석륵이 이렇게 회답했다.

 

“ 공을 세우는 길은 여럿으로 다르니
  썪어 빠진 유자들이 왈가왈부 할 것이 아니요.
  그대는 마땅히 본래 조정에 정절을 다 바치시고
  나는 나대로 스스로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본을 보이겠소.“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유곤에게 매우 후한 보배와 진기한 물건을 보내 예의를 갖춘 뒤 절교를 선언했다.


(11) 골칫거리 입양 동생 석호(AD311)

 

생모와 함께 돌아온 석호(AD295-AD349)는 당시 17세였는데 매우 난폭하고 잔인하여 군영 안에서 골칫거리였다. 석륵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 아무래도 이 아이가 흉포한 것이 걱정입니다.
  남에게 죽이라고 하면 애석하다고 할 것이니
  제가 스스로 이 아이를 죽이는 것만 못할 것 같습니다.“


석륵의 생모가 말했다.

 

“ 빠른 송아지는 어릴 적부터 수레를 부수는 법이니라.
  조금만 참아 보아라.“


그가 더욱 성장하자 말도 잘 쏘고 활 또한 신궁이어서 당시에 석호를 따라갈 자가 없었다. 장하게 여긴 석륵이 석호에게 정로장군의 직함을 주었는데 무리를 간략하면서도 엄격하게 통제하였고 가는 곳 마다 승리하여 감히 범접하거나 대적하는 자가 없게 되자 석륵은 석호를 매우 총애하게 되었다.   
 

(12) 석륵의 남방공략 실패(AD312)

 

갈피에 머물던 석륵은 장차 남경을 공략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생각을 알고 있던 남경의 낭야왕 사마예(나중에 동진을 세움)는 군사를 수춘(안휘성 수현)에 집결시켜 대비했다. 신채와 수현 사이의 거리는 약 200KM이므로 군사들이 열흘 정도면 도달하는 거리였다. 그러나 음력 2월 봄 장맛비가 석 달 가까이 내리면서 군사들이 역질로 절반가량이 죽어 나갔다.
사마예의 군사가 가까이 집결된다고 하자 참모 조응이 나서서 석륵에게 사마예에게 정성을 보이면서 속죄의 뜻을 보이자고 권했다. 중견장군 기안은 물을 피해 서둘러 고지대로 도망가야 한다고 재촉했다. 석륵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 장군들은 어찌 그리 하나같이 겁쟁이들이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공장 등 30여명의 장수들이 나서서 주창했다. 여러 갈래 길로 나누어 밤중으로 수춘을 습격한 뒤 여세를 몰아 남경을 공략하면 강남은 일거에 평정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석륵이 웃으면서 말 한필 씩을 상으로 내리면서 말했다.

 

“ 이런 것이 용감한 장수들의 생각이요.”

 

석륵은 가만히 있는 장빈에게 고개를 돌리면서 생각을 물었다. 장빈이 답했다.

 

“ 공께서 낙양을 공격하고 서진 황실 왕공을 처참하게 죽이고
  왕비와 공주를 사로잡아 첩으로 삼았으니
  머리 털 숫자보다도 더 죄가 더 많다고 여길 사람들에게
  어찌 머리를 조아리며 속죄한다고 하겠습니까.
  또 작년에 왕미를 이미 죽였으니 이곳으로 오지 말았어야 합니다.
  날씨는 수백 리에 걸쳐 장맛비가 내리고 역질이 퍼지는 것은
  하늘이 장군께서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함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업성이야 말로 천하의 요지로 서쪽으로 전조의 임분과 닿아있고
  사방이 산으로 막혀있으며 천하의 강 들을 끼고 있으니
  서둘러 그 곳으로 가셔서 점거하면서 황하 이북을 장악하시면
  더 이상 공의 오른쪽(동쪽)에는 경쟁자가 없게 될 것입니다.
  진나라 사마예가 수춘에 군사를 집결시키는 것은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니
  절대로 공격해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북쪽으로 옮겨가면 반드시 기뻐하며 되돌아 갈 것입니다.
  먼저 치중(군사기계)를 북쪽으로 돌려 시간을 번 뒤
   군사를 수춘 쪽으로 가는 듯 하다가 뒤로 물리시면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석륵이 무릎을 치며 환호했다.

 

“ 장군의 계책이 바로 그것이요.”

 

조응을 바라보며 말했다.

 

“ 그대가 나를 보좌하면서 큰 공을 세워야 할 것이거늘
  항복하라고 권고했으니 마땅히 죽음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 겁이 많은 것을 내가 알고 있었으니
  특별히 이번에는 용서할 것이다.“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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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3월13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3월06일 23시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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