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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6 고구려의 천적 전연(H)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8월22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8월22일 17시0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41) 이적(AD350)

 

전연의 군사들이 남으로 진격하면서 범양(하북성 탁현)에 다다랐을 때 범양태수 이산은 도저히 방어할 능력이 되지 않음을 알고 관내의 여덟 개 성과 모든 부하들을 대동하고 모용준에게 투항했다. 모용준은 이산을 그대로 범양태수로 재임용했다. 그러나 이산의 아들 이적은 유주별가로 있다가 공격을 당하자 아버지와는 달리 주군 유주자사 왕오를 따라 남하했다. 정동장군 등항이 왕오에게 조용하게 말했다.

 

“ 이적의 아버지는 전연에 투항했소.

  지금 이적이 우리에게 와 있으나 

  언제 우리를 배반하고 전연으로 갈지 모르오.   

  지금 해치우는 것이 좋겠소.“

 

왕오가 등항을 나무라며 말했다.

 

“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지금과 같은 전쟁의시기에 

  이적은 국가의 대의를 위하여 가사를 버렸으니

  그의 정절은 옛날의 열사라도 이보다 지나친 사람이 드물 것이요.

  마침내 그를 시기하고 혐의를 가지고 덮어씌우다니 

  만약 후조의 병사들이 들으면

  스스로 도적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겠냐고 하지 않겠소?

  무리들의 마음이 한 번 흐트러지면 

  다시 주워 담기 어려운 법이니 스스로 무너지는 첩경이요.“

 

등항은 자신의 생각을 거두었다. 그러나 왕오는 다른 사람들이 등항과 같은 생각을 할까 두려워 이적을 북쪽으로 돌려보냈다. 이적은 작별하고 전연으로 들어와 연왕 모용준을 만났다.

 

“그대는 천명이 뭔지 알지 못하고 

 아버지를 버리고 명성을 좇다가 

 이제야 제자리를 찾았군.“

이적이 대답했다.

 

“ 신은 옛 주인을 사모하였고

  뜻은 작은 절개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관직에 있는 자가 어찌 주군 아닌 사람을 모시겠습니까.

  전하께서 바야흐로 의를 가지고 천하를 얻으시려하는 것을

  이제 알았으니 신이 전하를 만나본 것을 늦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용준이 기뻐하며 그를 잘 대우했다. 이 해에 모용준의 전연 국경은 북경을 지나 하북성 중부까지 펼져 졌다. 

 

(42) 국가이름을 위로 바꾼 석민(AD350)

 

황제 석준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석민은 ‘계조이(繼趙李)’ 라는 도참설, 즉 ‘조씨를 잇는 사람은 이씨‘를 신봉하여 성을 이씨로 바꾸고 나라도 위(衛)로 고쳤다. 석준 밑에 있던 신료들은 뿔뿔이 지방으로 흩어져 할거하였다. 예를 들어 요익중은 섭두(하남성 조강현), 단감은 진류(하남성 진류현), 포홍은 반두(하남성 준현), 장침은 부구(하북성 자현) 등지를 장악하고 웅거하였다. 결국 후조는 석민이 장악하고 있는 업성 부근과 석지가 장악하고 있는 형태 부근, 그리고 군웅이 할거하고 있는 여러 지방으로 갈기갈기 찢긴 셈이었다.

 

기주로 달아났던 여음왕 석곤은 7만 무리를 이끌고 석민을 공격하다가 참패당했다. 갇혀있던 석감은 몰래 환관을 바깥으로 장침에게 보내 석민을 습격하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교활한 환관은 그 사실을 석민과 이농에게 고해 바쳤다. 석민과 이농은 결국 석감과 그 식솔들을 모두 죽이고 남아있는 석호의 손자 28명을 죽였다. 석씨 성을 가지고 살아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석민은 주변의 강권에 따라 국호를 다시 대위(大魏)라고 고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역사에서는 이 나라를 염씨의 위나라 즉 염위(冉魏)라고 부른다.   

 

(43) 석지가 후조를 계승(AD350)

 

석호의 친아들인 양국(하북성 형태)의 신흥왕 석지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연호를 영녕이라고 하면서 여음왕 석곤을 상국으로 삼았다. 주변에 흩어져 웅거하는 모든 이민족은 석지에게 지지를 표명하였다. 석지는 요익중에게 우승상, 친조왕이라고 칭하면서 특별히 우대하였다. 요익중의 아들 요양이 배포도 크고 용감하며 지략이 뛰어났으므로 주변 모두가 그를 세자로 책봉하라고 권했지만 요익중은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석지는 요양을 예주자사 신창공에 책봉했고 부건에게는 도독하남제군사 및 연주목과 약양군공에 봉하였다. 

 

AD350년 4월 석지는 10만 군사를 석곤에게 붙여서 왕랑과 장거 등과 함께 남쪽 염민의 위나라를 공격했다. 6월에 석곤의 군사는 한단을 점거하고 번양(하남성 내황현)에서 유국과 협공하기로 했다. 그러나 염위의 장군 왕태가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석곤의 군대는 크게 깨졌다. 유국은 군대를 돌려 돌아가고 말았다.

  

(44) 부건의 관중 장악과 장안입성(AD350)

 

석지의 거기장군 왕랑이 석곤과 함께 업을 공격하러 떠난 사이 왕랑의 사마 두홍은 장안을 점거하고서 스스로 동진의 정북장군 및 옹주자사라고 부르면서 장거를 자신의 사마로 삼았는데 부홍의 아들 부건이 장안을 탐내어 뺏을 생각이 있었다. 따라서 두홍이 그 생각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겉으로는 석지가 내린 후조의 관작(도독하남제군사 및 연주목과 약양군공)을 받는 척하면서 부하들을 하남 요지에 임명하여 서쪽(즉 장안)에 뜻이 전혀 없는 것 같이 위장했다.

 

이렇게 위장하여 두홍을 안심시킨 뒤 부홍은 스스로 동진이 내린 직책, 즉 정서대장군 및 도독관중제군사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전격적으로 군대를 몰아서 두홍을 쳐들어갔다. 동생 부웅은 5천 군사로 동관으로 들어가고, 부청은 7천 무리로 지관(하남성 제원)으로 들어갔다.

부웅이 동생 부청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 성공하지 못한다면

  너는 하북에서 죽을 것이고 

  나는 하남에서 죽을 것이다.“  

 

두홍은 장수 장선과 1만 3천의 군사를 보내 동관의 북쪽에서 부웅과 부청의 군사를 맞아 싸웠으나 장선은 참패하고 말았다. 두홍은 관중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장안에서 부웅 부청의 군사를 대적했으나 두홍의 아우 두욱이 부건에게 항복함으로써 거의 모든 전투에서 지고 말았다. 주변의모든 성읍들은 부건에게 귀부하였지만 두홍은 장안성을 닫아걸고 대치하면서 항복하지 않고 버티었다.(AD350년8월)

 

부청은 위수 북쪽에서 장선의 나머지 군사를 격파하고 그를 사로잡았다. 장선이 잡히자 삼보(장안을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눈 지역)의 모든 성과 보루들이 부청에게 항복했다. 10월 부건이 장안으로 급히 들어오자 석 달간이나 버티던 두홍과 장거도 성을 버리고 서쪽의 사죽(섬서성 주지)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부건은 11월 27일 장안성에 입성했다. 당시 백성들은 진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살아있었으므로 부건은 참군 두산백을 건강에 보내 형식적으로 장안이 진나라 소유의 땅이 된 것처럼 승리를 바쳤다. 다음해(AD351년 1월) 부건은 장안에서 대진(大秦:역사에서는 전진前秦)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천왕자리에 오른다. 

 

(45) 염민의 충신 상위(AD351)

 

염위 주군 염민은 석지가 장악하고 있는 양국(하북성 형태)을 포위하고 100여일이나 공격하였다. 다급해진 석지는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태위 장거를 급히 전연의 모용준에게 보내 전국새를 주면서 구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하북성 조강에 있는 요익중에게도 손을 벌렸다. 요익중은 아들 요양에게 2만 8천 정예기병을 파견하면서 말했다.

 

“ 너의 재주가 염민의 열 배이니 

  잡아서 효수하지 못하면 날 볼 생각을 말아라.“

 

요익중은 동시에 전연의 모용준에게 편지를 보내 지원군의 필요함을 역설했다. 모용준은 3만 군사를 열관과 함께 파병했다. 염민은 모용준이 석지를 지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대사마부 종사중랑 상위를 모용준에게 사신으로 보냈다. 석지는 장거를, 염민은 상위를 전연에 보내 서로 전연의 도움을 청한 것이다. 모용준은 봉유를 시켜 상위에게 물어보도록 했다.

 

“ 염민은 석씨가 양아들로 키워 준 사람인데

  어찌 은혜를 배반하고 역적질을 하면서 외람되이 

  황제 칭호를 일컫는 것인가?“

 

상위가 역사를 들먹이며 항변했다.

 

“ 탕 임금은 걸 임금을 추방했으며

  무왕은 주왕을 정벌하여 상나라와 주나라 대업을 열었습니다.

  조맹덕(조조)은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환관에게 

  키워줬지만 위나라 기업을 세웠습니다.

  진실로 하늘의 명령이 아니면 어떻게 성공했겠습니까?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하의 질문은 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봉유가 여러 가지 염민에 대한 나쁜 풍문을 말하자 상위는 이렇게 변명했다.

 

“ 간사하고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천명을 고쳐서 다른 사람을 현혹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부서(상서로운 물건)를 만들고 시귀(거북이 점괘)를 조작하여

   자신의 주장을 내세웁니다만

   염위 주군께서 후조의 옥새를 지니시고 

   이미 중주를 점거하신 상황에

   무슨 다른 증거가 필요해서 나쁜 풍문처럼 조작하겠습니까?

   

봉유가 물었다.

 

“ 그렇다면 그 옥새는 어디에 있소?”

 

상위가 말했다.

 

“업에 있습니다.”

 

봉유가 말했다.

 

“ 장거(석지가 보낸 사신)는 양국(형태)에 있다고 말하고 있소.”

 

상위가 다시 대답했다.

 

“ 호족(석씨를 말함)을 죽이던 날 업에 있던 사람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다 죽었는데 

  어찌 빠져나간 사람이 있을 것이며

  혹 있다한 들 어찌 옥새의 위치를 알겠습니까?

  그들이야 당장 목숨을 구해야 하는 지경이니

  어떤 거짓말인들 못하겠습니까? 믿으시면 안 됩니다.“  

 

모용준은 그러나 장거의 말을 믿고서 봉유에게 명하여 장작불을 피운 다음 상위를 위협하게 했다. 봉유가 상위에게 말했다.

 

“ 그대는 깊이 생각하시여 

  헛되이 불에 타 죽고서 재 덩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오.“

    

상위가 얼굴빛이 바뀌며 말했다.

 

“ 내가 듣건대 죽은 사람은 뼈와 살은 흙속에 묻혀도

  정갈한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대의 은혜를 입어서 속히 땔감을 더하고 불을 붙여서

  나에게 하늘로 올라가 천제에게 호소할 기회를 준다면 

  만족하겠습니다.“

 

모용준은 상위의 기개에 놀라며 말했다.

 

“ 저 사람은 그 자신이 죽는 것을 꺼리지 않고

  자신의 주군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 하니 진정으로 충신이라 할 만하다.

  또한 염민이 죄가 있다한 들 어찌 사신에게 연결시킬 것인가?“

 

상위를 감옥에 가두고 상위의 고향출신 사람 조첨을 보내 위로하면서 이렇게 말하게 했다 

 

“ 그대는 어찌 사실대로 예기를 하지 않았소.

  왕(모용준)이 화가 나서 요해나 갈석과 같은 변두리로 

  귀양을 보내버리면 어쩔 셈이요?“

 

상위가 대답했다.

 

“ 내가 머리를 묶은 이래로 지금까지

  포의 한 사람을 속이지 않았는데

  하물며 임금을 속이겠습니까?

  뜻을 구부려 억지로 합치시킬 바에는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은 들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상위는 몸을 돌려 다시는 조첨과 대화하지 않았다. 모용준은 조첨의 말을 듣고 상위를 용성에 가두었다. 얼마 뒤 석지에게로 간 사신 열관이 돌아 와 석지에게 옥새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모용준은 사신 장거가 거짓말을 한 것을 알고는 죽였다. 반면 상위는 구금에서 풀어주고 자녀들이 있는 상산(최근에 빼앗은 땅)으로 가서 만나게 해주었다.

 

상위가 상소문을 올려서 모용준에게 감사를 표하자 모용준이 말했다.

 

“ 경은 원래가 살려고 꾀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소만

  나와 고향이 같은 사람이니 내가 살려 준 것이요.

  지금 세상이 혼란한데 마침 그대의 자녀가 있는 곳이 수복이 되었소.

  이 또한 어찌 하늘이 마련해 준 일이 아니겠소?

  하늘이 경을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 내가 그것을 버릴 수 있겠소?“

 

모용준은 상위에게 곡식 300복을 내리고 범성(하북성 평천)에 살도록 조처했다.

 

염민은 양국을 포위한 채 석지의 지원군 요양, 여음왕 석곤 및 모용준이 보낸 열관과 치열한 전투를 펼쳤다. 그러나 수십만 석지-요익중-모용준의 연합군을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염민은 수만의 군사를 잃은 채로 10명의 기병과 함께 겨우 숨어서 업성으로 돌아왔다. 모용준은 염민의 군사 중에서 사로잡힌 대선우 염윤과 좌복야 유기는 물론 포로 약 10만을 모두 묻어 죽였다. 요익중은 염민을 생포해 오지 못한 요양을 곤장 100대를 때려 질책했다.(AD351년 3월) 

 

[그림] 전연 및 후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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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8월22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8월21일 13시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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