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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5 자만심으로 멸망한 틈새왕국, 남량(C)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5월16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5월15일 19시17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19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1) 여광이 대량 천왕에 즉위(AD396)

 

AD396년 삼하왕 후량의 여광은 천왕에 즉위하면서 국호를 대량이라고 불렀으며 백관을 설치했다. 다음해 (AD397년)에는 여연과 여찬을 보내 수시로 배반하는 서진의 걸복건귀를 토벌했다. 걸복건귀의 무리들이 지난 번 빼앗은 동쪽지역을 포기하고 성기로 돌아가자고 권했다. 걸복건귀가 말했다.

 

  “ 군대에서 승패는 얼마만큼 교묘하냐에 있지

    군대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여광의 군대가 크기는 하지만 무법천지일 뿐이며

    그 동생 여연은 용맹하기는 하나 모략이 없으니 겁먹을 것이 없다.

    또 그의 정병이라는 것이 모두 여연 휘하에 있으니 

    여연이 패하면 여광도 결국 스스로 도망가고 말 것이다.“    

   

여광의 군대는 여찬의 기병 3만과 함께 합류하여 서진의 수도 금성(난주)를 공략했다. 걸복건귀가 2만 군사르 보내 구언했으나 도착하기도 전에 여찬에 의해 금성은 함락되었다. 여연은 기세를 몰아 임조, 무시, 하관을 모두 뽑았다. 걸복건귀가 사람을 보내 자신의 무리가 궤멸되어 성기를 포기한다고 말하게 했다. 여연은 걸복건귀를 사로잡고 싶어서 즉시시 경기병과 함께 걸복건귀를 추격했다. 사마 경치가 걸복건귀의 간계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으나 듣지 않고 추격하다가 매복에 걸려 여연은 전사했다.   

 

(12) 독발오고의 남량 건국(AD397년 1월)

 

독발오고는 스스로 대장군, 대선우, 서평왕이라고 자칭하면서 대사면을 하고 연호를 태초라고 불렀다. 사실상 남량이라는 나라가 이 때 건국된 셈이다. 군사를 광무에서 일으켜 후량이 서진에게서 빼앗은 금성을 공략했다. 후량왕 여광은 즉시 부장 두구를 보내 토벌했으나 가정에서 독발오고의 군대에게 참패했다.

 

남량이 건국했다고는 하나 사실상의 지위가 탄탄한 것은 아니었다. 북쪽으로는 막강한 여광의 후량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요장의 후진이 광대한 중원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후량과 후진이라는 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남량은 걸복국인의 서진과도 짱을 맞대고 있었으므로 끊임없는 주변과의 마찰과 갈등 속에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13) 호타하 대전과 북위 건국(AD397년)

 

참합피 대전에서 크게 패한 후연의 황제 모용수는 당연히 복수의 칼을 갈았다. AD396년 병들고 노쇠한 몸을 이끌고 모용수는 직접 북정에 나섰다. 곧바로 북쪽으로 나아간 후연군사는 준비가 태만했던 북위의 평성(산서성 대동) 방어군을 쉽게 격파하면서 내몽고 깊숙이 쳐들어갔다. 올라가는 도중에 모용수는 지난 해 참합피에서 전사한 수천, 수만의 시체더미를 목도하고는 넋을 잃고 말았다. 부끄럽고 분하여 목에서는 피가 나왔다고 기술되어있다. 수만 후연 군사는 통곡을 그칠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 모용수가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다. 후연군은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가 없었다. 모용수는 곧이어 71세의 나이로 저양(하북성 회래)에서 사망했고 후연 대군은 속도를 높여 후퇴하여 13일 만에 수도 중산으로 퇴군했다.태자 모용보가 자리를 계승했다. 모용수의 와병 및 병사 소식은 번개처럼 패전에 충격 받은 북위 조정으로 전달되었다.  

  

북위의 탁발규 또한 지난 번 대승의 기세를 몰아 남쪽으로 대거 침략할 심산이었다. 탁발규는 40만의 기병대군을 몰아서 내려왔다. 병주(산서성 태원 지역)를 격파하고 동쪽으로 군사를 몰아서 하북성 정주를 향해 나아갔다.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후연 군사는 제대로 된 항전도 못하고 북위군대에 무너졌다. 북위군대는 여러 갈래로 나누어 남진했는데 주된 타격은 

하북성 깊숙이 있는 기주(하북성 기현)였다. 말하자면 후연의 배후를 노리면서 포위된 수도 중산을 고립시키는 전략이었다. 모용보는 북위의 배후공략 작전에 대해 역으로 북위의 배후를 공략하는 전략을 택했다. 동생 모용린을 보내 북위군의 배후인 양성(하북성 순평)을 찌르도록 한 것이다. 북위의 주군 탁발규는 서둘러 군사를 물려 양성으로 돌아와 지켰다.

 

이미 후연의 땅을 상당히 차지한 탁발규는 후연에 화의의 뜻을 넌지시 보냈다. 동생을 인질로 보낼테니 전투를 중단하고 화해하자는 것이었다. 모용보는 그동안 베푼 호의에 대해 전쟁으로 갚은 탁발규를 심하게 질책하면서 기병 3만 7천과 보병 12만의 대군을 보내 곡양(하북성 곡양) 호타하 부근에 주둔시켰다. 호타하는 지금의 정정현과 석가장시의 중간을 관통하는 하천이다.  

 

약 16만의 후연군은 호타하를 사이에 두고 북쪽에 주둔하고 북위군은 호타하 남쪽에 진을 쳤다. 후연군은 야간에 1만 군사를 강 건너 보내 바람을 이용하여 북위 군영에 불을 질렀다. 잠을 자던 중에 화공을 당한 북위 군대는 몹시 혼란에 빠졌으나 탁발규는 이를 잘 수습한 뒤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후연의 1만 야습군은 거의 전멸했으며 북위군의 추격을 받은 후연 군대는 중산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북위군은  끝까지 후연군을 추격하여 결국 수도 중산을 완전히 포위하고 말았다. 겁에 질린 후연군은 주둔지 곡양에서 퇴각하면서 수십만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이 후 모용보는 중산성을 버리고 몰래 빠져나가서 용성(북경)을 거쳐 요녕성 건창까지 도망다니며 떠돌다가 AD398년 44세의 나이로 아버지 모용수의 비첩의 아버지인 난한에게 살해되었다.  이 호타하 전투에서 승리한 탁발규는 나라 이름을 황문시랑 최굉의 말대로 대(代)에서 위(魏)로 바꾸기로 하였다. 조비의 위나라와 구별하기 위해서 역사에서 북위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4) 저거라구의 피살과 북량 저거몽손의 발흥(AD397) 

 

흉노족장 저거(沮渠)씨는 대대로 장액(감숙성 장액시)을 장악하고 있었다. 후량의 여광이 저거라구를 상서로 등용하자 저거라구는 여광을 도와 걸복씨의 서진을 정벌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후량과 서진의 전쟁 와중 여광의 동생 여연이 걸복건귀에게 패사하자 저거국죽이 형 저거라구에게 말했다.

 

 “ 주상(여광)께서 어둡고 늙어서 참소를 쉽게 믿으시니

   군사들은 패하고 장수도 죽어 모두들 우리를 헐뜯고 시기하는 분위기입니다. 

   차라리 군사를 이끌고 서평(청해성 서녕시)로 가서

   세력을 과시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저거라구가 말했다.

 

  “ 진실로 네 말이 맞다.

    그러나 지금 우리 가문은 대대로 충성과 효도로 

    서역에서 이름을 높여 왔는데

    다른 사람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몰라도 

    내가 스스로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다.“ 

 

내막을 잘 모르는 여광은 주변에서 참소하는 말만 듣고 충신 저거라구를 죽였다. 저거라구의 조카 저거몽손은 삼촌의 장례를 후히 치렀다. 저거몽손은 책략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많은 역사책을 읽어 통달한 사람이었다. 장례에 모인 친척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여왕은 어둡고 거칠며 법도가 없어 

    허물없는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호랑이 같은 눈빛으로 하서지역을 돌보아 왔는데

    지금 두 분의 아버지의 치욕을 씻고 

    선조들의 위업을 다시 찾아야 하겠는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림] 독발오고의 남량 영토(AD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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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들은 저거몽손에게 만세를 불러 화답했다. 맹약을 맺은 뒤 바로 군사를 일으켜 후량의 임송군(감숙성 장액)을 장악하고 점령했다. 후량의 장수였던 저거몽손의 사촌 형 저거남성도 저거몽손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주천에서 군사를 모아 일어났다. 그리고 건강(감숙성 주천 부근)태수 단업에게 동참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단업이 거부했으나 부하 장수들이 권고하는 바람에 망설이던 단업은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저거남성은 단업을 대도독, 양주목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보국장군이 되었다. 저거몽손이 군사를 이끌고 단업에게 귀속하자 단업은 저거몽손을 진서장군으로 임명하고 연호를 신새(神璽)로 정했는데 사실상 북량이라는 새 나라를 세운 셈이다. 여광이 아들 여찬에게 군대를 보내 단업을 토벌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AD397) 

 

(15) 곽논과 왕상의 반란(AD397)

 

후량 산기상시인 곽논은 서평(청해성 서녕)사람이었는데 천문지식이 매우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랐다. 그 때 곽논이 이상한 별자리 움직임을 보게 되자 복야 왕상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 나라 안에 장차 큰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주군(여광)께서 연로(당시 60세)하시고 또 병까지 들어계시고

   태자(여소)는 어리석고 나약하며 태원공 여찬(여광의 장자)은 흉악하고 사나우니

   어느 날(주상이 죽는 날을 의미) 꺼리는 일이 없게 되면

   재앙과 난리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두 사람은 오랫동안 요직에 있었으니

   태상이 반드시 우리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왕걸기라는 사람이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으니 거사를 일으켜 그를 추대하여 

   주군으로 삼은 뒤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왕상도 그러자고 동의했다. 곽논이 수하 무리를 데리고 먼저 궁궐 문을 불사르고 들어가면 안에서 왕상이 호응하여 여광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들키는 바람에 왕상이 먼저 죽었다. 왕궁을 장악하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곽논은 거사계획을 돌이킬 수 없었다. 고장의 동원성(東苑城)을 장악 했는데 성 안에서는 이런 소문이 크게 퍼졌다.

 

 “ 성인이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곽논을 따르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병상에 있던 여광은 급히 아들 여찬을 불러 곽논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단업의 반란군을 진압하느라 바깥에 나가있던 여찬이 즉시 장액에서 수도 고장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수하 장수들이 붙잡고 말렸다.

 

 “ 장군께서 고장으로 군사를 돌리시면 

   반드시 단업이 후미를 공격하지 않겠습니까?

   의당 몸을 숨기셨다가 야밤에 움직이는 것이 좋습니다.“

 

여찬이 말했다.

 

 “ 단업은 영웅재질이 없는 하찮은 졸장부에 불과하오.

   내가 겁을 먹고 군사를 숨겨두고 야밤을 탄다고 하면 그의 기세만 높여 줄 뿐이요.“

 

그리고는 즉시 사람을 단업에게 보내 이렇게 제안했다. 

 

 “ 곽논이 반란을 일으켜 내가 지금 도읍으로 돌아가야 하오.

   경이 결정해 줘야 할 것은 

   즉시 나와서 나와 전투를 하는 것이요.“

 

(16) 양통의 반란과 양궤의 반란(AD397)

 

여찬이 전쟁을 서두르자고 조르자 북량의 단업은 겁에 질려 더욱 성문을 닫고 움직이지 않았다. 여찬의 사마 양통은 그의 사촌형 양환에게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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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곽논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절대로 무모한 것이 아닙니다.

   이 참에 제가 여찬을 죽일 테니 형님께서 주군이 되셔서

   서쪽으로 같이 가서 여홍(여찬의 동생)을 습격한 뒤 장액을 점령하면 

   여러 지역을 한꺼번에 차지하는 일로써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입니다.“ 

 

양환이 버럭 화를 내며 꾸짖었다.

 

 “ 나는 여씨의 신하가 되어서 

   여태껏 그가 준 녹봉으로 온 가족이 편안함을 누리며 살면서

   여러 번 그에게 위기가 닥쳐와도 구원하지 못했는데    

   어찌 그에게 어려움을 끼칠 수가 있겠느냐?

   만약 그가 죽는 다면 나는 차라리 홍연이 되고 말겠다.“

 

홍연은 춘추시대 위(衛)나라 대부였다. BC660년 북적이 위국 주군 의공을 살해하였는데 주군의 시체는 사지가 다 없어지고 단지 간장만 남아 있었다. 홍연은 자신의 신체에서 배를 갈라내고 주군 의공의 남은 간장을 집어넣고 순국한 사람이다. 양환이 동조하지 않자 양통은 혼자 반란을 일으킨 뒤 곽논에게로 갔다. 여찬은 서쪽에서 돌아와 석원량과 함께 곽논의 반란군을 격파했다. 

 

후량에게 복속했던 융족과 하족 무리 3천명도 장첩과 송생의 주도 아래 휴도성(감숙성 무위시)에서 후량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저족 출신 후량 장수 양궤를 맹주로 삼고서 곽곤과 연대하였다. 양궤의 참모 정조가 이렇게 간하였다.

 

 “ 경은 용의 머리를 버리고 

   뱀의 꼬리를 따라가고 있으니 참으로 잘못된 선택입니다.“

 

양궤는 정조의 말을 듣지 않고 반란에 합류했다. 여찬의 군대가 곽곤의 잔당 왕비를 깨뜨리면서 쫓아오자 다급한 곽곤은 급히 사람을 남쪽의 남량으로 보내 독발오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독발오고는 동생 독발이록고와 기병 5천을 고장(무위)지역으로 파송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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