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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완종 사태’가 말하는 것들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5년04월27일 20시51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1시11분

작성자

  • 윤평중
  • 한신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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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완종 사태’가 말하는 것들

 

 자고로 정치의 근본은 공공성을 실현하는 데 있다. 우리사회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성완종 사태’는 21세기 한국정치의 핵심이 그 정반대 지점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그림처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막대한 선거자금이 들어가는 대중민주주의의 불가피한 현실을 부인하는 위선적 당위론이 아니다. ‘성완종 사태’가 의미심장한 것은 한국사회에서 정치의 작동방식과 정치인의 기능이 거의 마피아 조직과 흡사하거나 마적단 비슷한 것 아닌가라는 의심을 불가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성완종 사태’가 고발하는 한국정치의 문제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고질적 정경유착과 금권정치의 유산, 만성화된 부정부패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성완종이 무차별적 로비 대상으로 삼은 여야 정치엘리트와 관료엘리트가 자신들에게 부여된 공적 권력을 철저히 사유화(私有化)했다는 사실이다. ‘성완종 사태’의 핵심은 정치의 근본인 공공성의 원칙은 이름에 지나지 않을 뿐 정작 막후에서는 권력 카르텔 집단이 이리떼처럼 달려들어 각종 이권을 뜯어먹는 데 여념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 권력 카르텔 안에서는 서로 형님 동생하면서 ‘신뢰와 의리’를 말하고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것이다. 카르텔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평생 몸부림쳤건만 막상 유일한 자산이었던 돈이 떨어지자마자 폐기처분되고만 자의 르상티망(원한)이 담긴 메모가 ‘성완종 사태’의 발화지점이었을 터이다. 결국 ‘성완종 사태’의 핵심은 공공성의 사유화로 압축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공후사(先公後私)는 훌륭한 정치지도자의 변함없는 덕목으로 여겨졌다. 직접민주제를 꽃피웠던 고대 희랍인들은 사적인 것에만 골몰하는 사람들을 사회적 금치산자(idiotes) 비슷한 존재로 간주했다. 오늘날 바보(idiot)와 어원을 같이하는 이 단어에서 공공성의 중요성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확신을 읽을 수 있다. 개인적 이해관계의 일, 즉 경제활동만 중시하는 자는 인간으로서의 본질적 가치를 결여한 자(privatus)로 치부되었다. 인간의 자격가운데 핵심을 박탈당한 자라는 부정적 함의가 전이된 단어인 영어 단어 private가 긍정적 함축까지 포함하게 된 것은 서양 근대에 이르러서였다.  

 

 희랍인들이 보기에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시민이라고 할 수 없으며 시민이 아닌 사람은 제대로 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바, 사적인 것으로 간주된 생산 활동에만 전념하는 ‘노예에게 폴리스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현대의 다원적 민주사회를 고대 아테네의 엘리트 민주제 사회와 평면 비교할 수는 없다. 성숙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사적인 것의 지평으로 국한되는 것도 결코 아니다. 하지만 시민의 기본적 덕목을 공적인 것에 대한 감수성으로 특징짓고, 지도자의 의무를 공공성에 대한 헌신으로 규정한 것은 시공을 초월한 희랍문명의 탁견이었다. 

 

 봉건시대의 사상가였던 공자조차도 정치란 세상의 모든 일을 공익을 위해 처리하는 것(天下爲公)으로 정의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행위의 요체가 공공성에 있으며, 정치의 본질은 자격을 갖춘 지도자가 공공 마인드를 가지고 모든 일을 바로 잡는 데 있다(政者正也)고 갈파한 것이다. 열국 순행가운데 맹자가 만난 어느 왕이 ‘선생이 내 나라에 어떤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왜 정치공동체의 최고지도자가 공적 정의에 대해 묻지 않고 사적 이익만을 앞세우느냐고 맹자가 반문한 것도 같은 문맥이다. 무릇 리더십의 존재 이유는 공공성의 실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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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의 본질로서 공동선을 강조하고 지도자의 본분을 공익 추구에서 찾은 고대 중국의 통찰은 동아시아적 리더십의 원형인 군자론으로 집약된다. 공자가 강조한 바, 진짜 지도자인 ‘군자는 덕에 전념하고’, 사이비 지도자인 ‘소인은 땅의 확보같은 눈앞의 이익에 골몰한다’는 것이다(君子懷德, 小人懷土). 희랍인들의 생각과 비슷하게 군자의 덕은 사사로운 유덕함이 아니라 정치공동체에의 참여를 통해 비로소 구현되는 공적 덕목이다. 심지어 공자는 지배계급에도 얼마든지 소인배들이 넘쳐나고, 하층계층에 진정한 군자가 있을 수 있다고 까지 함으로써 공공성과 리더십의 상관성을 강조하였다. 

 

 봉건시대의 국정철학이었던 유학을 현대의 다원적 이익사회에 대입하려하거나 직접민주제가 가능했던 아테네 황금시대의 원칙을 대중민주주의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못하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러나 공공성과 정치 리더십의 본성에 관한 고대 중국인과 희랍인들의 통찰은 단순한 의고(擬古) 취향을 넘어서는 보편적 호소력을 지닌다. 특히 서양의 경우, 좋은 나라의 이념과 그것을 다스릴 정치적 리더십의 본질에 관한 통찰은 로마와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다양한 실험을 거쳐 근대에 민주공화국의 이상으로 개화하게 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라는 표현도 공동체적 삶의 양식을 관류하는 기본 원리에 대한 평이한 진술이다. 공동선의 강조, 공동체에의 헌신, 공익의 추구는 모두 공공성의 구현으로서의 나라와 리더십의 됨됨이를 측정하는 불변의 잣대다. 헌법 1조 1항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구절도 공공성의 이념과 직결된다. 공화국(republic)이라는 용어 자체가 ‘공적인 것, 또는 공공의 지평’(res publica)의 소산이다. 공화정의 역사에서 모범을 보인 로마가 의미심장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지도층인 상원, 민중을 대변한 호민관, 그리고 시민의 세 주체는 상호균형과 견제 속에서 자신의 권리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로마 공동체 전체를 위한 의무에 헌신하였다. 공화정에서 제정(帝政)으로 바뀐 다음에도 공공성은 나라 운영의 기본 원칙이었다. 로마제국의 전성기에는 황제조차도 탈법적 특권을 향유할 수 없었으며 ‘뛰어난 자들’의 일원으로만 여겨졌다. 명망있는 정치가나 장군들이 사재(私財)를 털어 시민을 위한 공공시설을 짓는 것이 관례였으며 전쟁이 나면 지도층은 최전선에서 싸웠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박근혜정부를 떠받치는 권력카르텔의 최대 문제점은 공공성의 결여로 집약된다. 집권 초기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해 ‘성완종 사태’까지 이른 박근혜정부의 난맥상은 사실 공공 마인드의 부족에서 유래된 것이 대부분이다. 리더십의 요체는 인사정책인 바 인수위 시절부터 오늘까지 박근혜정부의 인사를 특징짓는 것은 대통령과의 사적 친소관계가 공적 영역을 식민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개인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만을 중용하고 특정지역과 특정집단 출신만을 신임하는 대통령의 리더십아래서는 천하의 인재를 널리 구해 나라를 이롭게 한다는 국정의 근본이 망각된다. 이런 권력 시스템 하에서는 눈치 보기와 줄서기의 달인들이 능력과 도덕성을 갖춘 이들을 제치고 출세가도를 질주하게 된다. 그것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속성이다. 베버가 전근대적 정치형태라고 비판한 가산제(家産制, patrimonialism) 정치가 시대착오적 형태로 부활하는 꼴이다. 가산제 아래서는 정치지도자가 국가권력을 사사화(私事化)하고 관료를 사적인 부하 비슷한 존재로 부리게 된다. 그 결과 권력행사에서의 공공성 원칙이 파괴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조선 초기 지도계층의 공공 마인드가 왕성할 때 왕조가 전성기를 누렸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육조, 의정부, 3사(司), 그리고 재야사림(在野士林) 등으로 구성된 조선의 공론영역은 왕권의 전횡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정치엘리트들 사이의 통합 통치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정조의 개혁 실패 이후에는 정치권력이 일개 붕당과 척족(戚族)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국가 시스템 전체가 사사화하고 마는 것이다. 조선 말기 삼정(三政)의 문란이 야기한 민란과 소요의 연속 앞에서도 철저히 반민중적이었던 정치권력의 행태는 나라와 정치의 존재 이유인 공공성의 완전한 부재를 입증한다. 공공적이지 않은 국가에 대해 민중이 소속감은커녕 공포와 분노를 느낄 때 체제가 붕괴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단지 지나가버린 과거지사만은 아니다. ‘영혼이 없는’ 관료들에게 공복이란 말에 내재한 공공성은 사치로 들리게 된다. 민주공화국에서 정치지도자들의 공공 마인드를 시민들이 의심하기 시작할 때 공화국의 앞길은 불투명해진다. 그것이 ‘성완종 사태’가 웅변하는 21세기 한국사회의 어두운 현실이다. 공공성을 존재의 요건으로 삼는 국가의 운영을 위임받은 권력주체가 오히려 공공성의 토대를 침식하는 정책을 위임민주주의의 형식을 빌려 밀어 붙인다면 그것은 자기배반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제 길을 벗어난 국가가 공화정의 존재 자체를 위기에 빠뜨릴 때 우리는 ‘좋은 나라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의문을 떠 올리게 된다.  

 

 일탈한 국가와 함께 신자유주의시대에 과대팽창한 시장이 공화정을 위협하는 또 다른 주체다. 우리가 삼성 사태에서 확인한 것처럼 민주질서에 의해 견제되지 않은 시장은 모든 걸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되기 쉽다. 생산력과 개인의 창조력을 극대화하는 시장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지만 그것이 너무 커진 나머지 오히려 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형해화한 공공성이 경제적 효율성에 의해 잠식되는 정도에 비례해, 자본이 국가와 민주질서를 식민화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의 운영과 회사 경영을 차별화시키는 궁극적 준별점은 나라와 정치의 공공성이다. 아무리 큰 회사일지라도 기업의 궁극적 존재 이유는 사적 이윤의 극대화에 있는데 비해 국가는 공공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완종 사태’는 정치와 경제를 섞어버릴 때 어떤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예증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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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결과는 참혹하다. 공공성의 축소와 망실(亡失)은 정치적 리더십의 왜소화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했던 다수의 국민들조차 그의 리더십에 자신을 동일시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적 리더십에 걸 맞는 시민들의 주체적 팔로워십(followership)이 전혀 가동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정부가 내세우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도 지도자와 정부에 대한 신뢰가 선행해야 한다.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신뢰는 공공 마인드의 배양과 뗄 수 없는 상관성을 갖는다. 박근혜정부가 특정계층의 이해관계만을 대변한다는 인식이 일반화될수록 대한민국이 과연 민주공화국인가라는 핵심적 의문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세계사와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보아도 공공성의 원칙이 국가와 리더십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화두임이 명약관화하다. 현대대중민주주의의 시대에도 리더십의 기본은 변하지 않았다. 독주하는 대통령과 무책임한 정치인들이 합작해서 공공성의 원칙을 저버리는 상황이 계속될 때 위기는 심화된다. 국가와 리더십의 위기는 나라 운영을 한시적으로 책임진 지도자가 위기 상황임을 깨닫지 못하고 헛발질을 거듭할 때 더욱 악화된다. 

 

 당당한 리더십과 주체적인 폴로우어십이 민주적으로 어우러질 때 진정한 공화국이 가까워진다. 공동선에 몸을 바치는 지도자만이 국민과 역사 앞에 의연할 수 있다. 공공 마인드를 갖춘 리더십은 대화와 타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악한 권력게임이 아니라 공공성의 실현이 정치의 존재 이유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정치적 리더십을 우리 시대는 요구한다. 공공성의 정신으로 무장한 섬김과 통합의 리더십이야말로 좋은 나라의 요체라는 통찰은 언제나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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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5년04월27일 20시51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1시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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