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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2 : 정통의 길을 걸어간 전량(F)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10월18일 12시00분
  • 최종수정 2018년10월25일 19시08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20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28) 동진의 전량 존중(AD335)

 

서진이 장안을 함락당하고 패망했을 때(AD316년) 돈황 계리 경방은 강동으로 내려와 여러 차례 양주를 포용하여 연합작전을 펴야 한다고 간청을 올렸었다. 전량 장준이 보낸 장순이 도착하여 전량의 충성심을 읽게 된 동진 조정은 오래 전부터 전량과의 연합을 강조해 왔던  경방을 수시서어사로 삼아 장준에게 정서대장군을 임명하는 조서를 보내기로 하고 가릉 등 12명을 배속시켜 같이 동행하도록 해주었다. 건강에서 전량으로 가는 길은 장강을 거슬러 무한에서한수를 따라 북쪽으로 한중을 거쳐 내지로 들어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동진 사신 경방이 장준에게로 가는 도중 양주(梁州, 지금의 섬서성 한중)에서 길이 막혔다. 경방은 가릉에게 조서를 넘겨주고 거짓으로 상인이라 하여 고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준은 부곡독 왕풍을 보내 감사의 회보를 올렸다. 이로써 전량과 동진의 우호는 확립되었다. 

 

(29) 장준과 전량의 전성기(AD335-AD339)

 

장준이 집권(AD324)한 이후 전쟁은 그치고 전국이 평온해졌다. 장준이 직접 정치를 잘 챙겼으며 문무업무를 전체 통솔하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잘 등용했다. 따라서 백성들은 부요했고 군사는 강했다. 똑똑한 군주라는 칭송이 천하에 자자했다. 장준은 장수 양선을 서쪽으로 파견하여 구자(신강성 고차)와 선선(신강성 선선)지역을 정벌했고 언기(신강성 언기)와 우전(신강성 화전)이 고장의 전량에게 조공을 바쳐왔다. 장준이 진주와 옹주를 겸병할 생각으로 국호에게 상소문 올리라 지시했다.(AD335)

 

    “ 석륵과 이웅이 죽었고

      석호와 이기는 계속 반역하니

      많은 사람들이 점점 쇠약해지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먼저 난 사람들은 늙어가고

      나중 난 사람들은 알지를 못하니

      주군(동진황실)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날로 식어가고 있읍니다.

      청컨대 사공 치감과 정서장군 유량에게 칙령을 내리시어

      장강과 면수(한수)에 배를 띄워 위아래가 일제히 거병하게 하십시오.“ 

 

모용황의 전연이 갑자기 부상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동진과 전량의 연합군은 결성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용황이 북쪽 유주지방에서 급격하게 세력을 확대해 가면서 강력한 후조와 연대하여 동진을 위협하고 있었으므로 장준의 거병계획은 성사되지는 못했다. 

 

(30) 장준이 후조 석호에게 공물을 바침(AD340)

 

AD329년 전조를 멸망시키고 잠깐 동안 황실 조정 내부가 혼란했으나 석호가 잘 수습한 뒤 후조는 AD335년 경 부터 무서운 속도로 국력을 팽창시켰다. 동진과의 연대를 통해 관중을 도모하려했던 장준으로써는 오히려 후조와 우호관계 수립이 더 시급해졌다. 장준은 마선을 후조에 보내 우호관계 수립을 요청하고자 했다. 그러나 장준이 보낸 표문과 말씨가 매우 거만하고 거칠었으므로 석호는 마선을 죽이려 했다. 시중 석박이 그런 석호를 말렸다.

 

  “ 지금 황제께서는 동진을 없애는 일이 급하십니다. 

    하서지역은 치우쳐있고 또 보잘 것 없는 땅이니

    마음속에 두기에 모자랍니다.                          

    지금 마선의 목을 베면 장준을 정벌해야 하는데

    병력이 나뉘어 두 개가 되고 

    건강은 다시 몇 년이나 수명을 연장하게 됩니다.“

 

석호는 결국 마선을 건드리지 않았다.

 

(31) 동진 유익의 중원 경략(AD343) 

 

동진의 북쪽에는 석륵의 후조가 세력을 크게 확장하고 있었고 서쪽에는 성한의 이웅이 죽은 뒤(AD334) 이반, 이기, 이수의 뒤를 이어 이세(혹은 이시)가 계승하면서 국력이 급격히 쇠락하고 있었다. 당시 동진조정의 군권 실세는 안서장군 형주자사 유익(庾翼)이었다. 유익은 유량의 동생으로써 유역과 함께 삼형제가 동진 성제 사마연과 강제 사마악 형제의 외숙이었다. 그러니까 동진 명제 사마소의 아내 유문군(庾文君AD297–AD328)가 유익 삼형제의 누이였다. 

 

AD340년 36세 유익의 직책은 도독강형사옹양익육주제군사 및 안서장군 형주자사로 무창(지금의 무한)에 진수하고 있었다. 나이가 젊어서 사람들이 가볍게 보았으나 직무를 수행하는데 정성을 다하고 엄정하게 군기를 다스려 잡았기 때문에 공사가 분명하고 재주가 크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나 울분을 참지 못하는 성격에 공명을 세우기 좋아하는 약점이 있었다. 유익은 20대 약관 환온을 성제 사마연에게 추천했다. 환온은 호방하고 상쾌한 성격을 지녔고 기풀과 기개가 남달랐다고 기록되어있다. 명제 사마소의 사위이기도 했다. 

 

유익의 계획은 전연의 군주 모용황과 양왕 장준과 연대하여 성한 이수와 후조 석륵을 공격하는 것이었다.(AD343년 7월) 유익의 이런 북벌계획에 대해 친척 유빙과 친구 환온과 종실사마무기만 지지했고 나머지 군신들은 대부분 반대했다. 동진 조정은 환선을 도독사옹양삼주형주지사군제군사 및 양주(梁州)자사로 삼아 단(丹)수(장강의 지류인 한수의 양번 지역 지류)로 진격시키고 환온은 전봉도독으로 임회(강소성 우태)방면으로 진출했다. 유익의 북벌군을 위한 대대적인 마소징발과 노복 수레 동원으로 백성들이 깊이 한탄했다.

 

북벌준비를 대충 마친 AD344년 정서장군 유익은 환선에게 단수를 타고 올라가 후조 장안의 이비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수, 육 양로를 통해 먼길을 올라 온 환선이 이비에게 크게패배하자 유익은 환선을 건위장군으로 강등해 버렸다. 환선은 그것이 치욕이 되어 화병으로 죽었다. 환선이 죽자 유익은 아들 유방지를 환선의 군대를 관장시켰다.

 

(32) 동진 성제의 죽음과 정치혼란(AD344-AD345)

 

이즈음 강제 사마악이 죽었다.(AD344년9월) 그가 죽기 직전 하충이 지지한 사마담이 태자가 되었으므로 황위를 계승했는데 이 사람이 동진 목제다. 이 때 겨우 두 살이었다. 유익 유빙 형제는 나이가 지긋이 든 사마욱을 태자로 세울 생각이었다. 사마욱(AD320-AD372)은 동진 조정의 창업자 사마예의 둘째 아들로 이미 스물두 살이나 된 성인이었다. 유빙과 유익은 나라의 앞 날이 크게 걱정되었다. 목제의 생모 저씨가 칭제하면서 정치를 농단할 것이 너무나 뻔했다. 

 

유익의 형 유빙도 두 달 뒤 병사했다. 혼자 남은 유익은 군사를 모으고 곡식을 저장하면서 저태후 일당이 농단하는 건강 조정을 바로 잡을 계획을 꾸몄지만 그 또한 병으로 죽었다.(AD345년 7월) 유익은 죽기 직전 동진 조정에 편지를 띄워 아들 유원지에게 형주자사를 맡겨 줄 것을 부탁했으나 실세였던 양주자사 및 녹상서사 하충은 불온한 생각을 지닌 유씨 대신 환온에게 형주방면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충의 생각대로 조정은 환온을 안서장군, 도독형사옹익양영육주제군사 및 형주자사로 삼아 하구(지금의 무한)에 주둔시키고 유익의 아들 유방지와 유원지는 예장으로 옮겨 임명했다.

 

[그림] 동진 유익의 북벌계획(AD343년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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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전량 장준의 국가조직 구축(AD345) 

 

장준은 통치지역을 정비하고 국토의 확장계획을 세웠다. 먼저 11개 군을 나누어 양주(涼州)로 만들고 세자 장중화를 자사에 임명했다. 그리고 흥진 등 8개 군을 나누어 하주(河州)로 이름하고 장관을 자사에 임명했다. 마지막으로 돈황 등 서역지역 3개 군을 사주(沙州)로 명명하고는 양선을 자사로 보냈다. 이제 전량은 양주 1주로 된 미니국에서 3주로 구성된 국가

다운 국가의 혁식을 갖춘 셈이었다. 장준 스스로는 대도독, 대장군, 가양왕, 독섭삼주의 직책을 떠안았으며 최초로 국가의 관직을 동진과 대등하게 갖추었다.

 

(34) 장준사망과 후조의 침략(AD346-AD347) 

 

열일곱 살에 즉위해서 거의 이십년 훌륭히 나라를 통치해왔던 장준이 39세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19세 세자 장중화가 사지절, 대도독, 태위, 호강교위, 양주목, 서평공 및 가양왕으로 아버지 장준의지위를 그대로 계승했다. 그리고 생모 마씨를 왕태후, 적모 엄씨를 대왕태후로 책봉했다. 

 

장준 사망의 소식을 들은 후조가 전방위적으로 전량을 공격해 들어왔다. 왕탁은 전량의 무가(감숙성 임조 남쪽)방면을 침입해 들어와 7천호를 관중 옹주로 이주시켰다. 후조의 양주자사 마추와 손복도는 금성(감숙성 난주)방면을 치고 들어왔다. 전량의 금성태수 장충은 전투도 하지 않고 후조에 항복해버리고 말았다. 전량 전국이 공포에 떨었다.

 

전량 주군 장중화는 전군을 소집하고 배항에게 후조방어를 맡겼다. 배항은 광무(감숙성 영등)에 진을 치고 방어에 집중했다. 양주사마 장탐이 말했다.

 

  “ 나라 존망은 군대에 달려있고 

    군사 승패는 장수의 용맹에 달려있습니다.

    지금 비상시를 맞이하여 모두들 예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을 장수로 추천하고 있사오나

    한신이 천거된 것은 예로부터의 덕을 가지고 된 것이 아닙니다.

    밝으신 명공이 사람을 등용할 때에는

    보통이 아닌 사람을 천거하지만 

    재주가 감당할 만하면 큰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지금 강한 도적이 쳐들어오니 여러 장수들이 전진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떨고 있습니다.

    주부 사애야말로 문무를 모두 겸비하고 있으니

    후조를 막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

  

장중화는 급히 사애를 불러 후조대군을 막을 방법을 물었다. 사애는 7천 기병을 요구했다. 장중화가 사애를 중견장군으로 삼고 진무(내몽고 화림각이)출발했다. 밤중에 효조(올빼미) 두 마리가 아문에서 우는 것을 들은 사애가 말했다.

 

  “ 육박에서 효패를 잡은 사람이 이기는데

    지금 효조가 울었으니 승리할 징조임에 틀림없다.“

 

사애의 7천 특공대는 후조군대를 대파하고 5천 급을 참수하는 성과를 올렸다.

 

후조의 양주자사 마추가 또 부한(감숙성 임하)을 공격해 들어왔다. 전량 진창(감숙성 안서)태수 낭탄이 외성을 포기하려 하자 무성(감숙성 청수현)태수 장전이 이렇게 외쳤다.

 

  “ 외성을 포기하면 사람들이 불안해져 

    내성마저 지키기 어려울 것이요.”

 

낭탄이 옳다고 생각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방어하기로 했다. 마추가 여러 겹을 쌓아 필사적으로 공격했지만 성 안에서 훌륭히 방어한 까닭에 마추군 수 만 명이 전사했다. 오랜 공격에도 성이 떨어지지 않고 전세가 기울어지지 않자 후조 주군 석호는 보,기병 2만을 추가로 유혼에게 보냈다. 성을 지키다 지친 낭탄이 후조군사 1만 명을 성안으로 영입했지만 전량장수 장거가 결사대로 방어하여 격퇴시켰다. 석호는 중서감 석녕에게 2만 군사를 추가로 보내 마추를 지원했다. 그 사이 장중화의 장수 송진이 2만호를 가지고 후조에 항복하고 말았다. 

 

장중화는 사애에게 보,기병 3만명을 주어 임하에서 대치했다. 사애는 우스꽝스럽게 흰 모자를 쓰고 나팔을 불고 북치면서 행진했다. 마추를 놀리는 행보였다. 격노한 마추가 외쳤다.

 

  “ 나이어린 서생에 불과한 놈이

    흰 모자에 북을 치고 나서면서 감히 나를 조롱하다니!“

 

[그림] 후조 마추의 전량 임하 공격실패(AD34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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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바로 용양부대 3천을 보내 격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사애 주변이 놀라서 말을 타고 도망가자고 권유했다. 사애는 태연히 수레에서 내려 호상에 걸터앉아 부채를 부칠 뿐이었다. 후조 용양부대 병사는 함부로 덤벼들지 않았다. 분명히 매복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용양부대가 머뭇거리는 그 사이에 전량장수 장모는 샛길로 후조군대의 후미를 습격했다. 후조의 수급과 포로는 1만 3천을 넘었고 마추는 홀로 대하로 도망갔다.(AD347년 4월) 

 

한 달 위 마추와 석녕이 다시 12만 군사로 하남에 주둔하면서 유녕, 왕탁이 진흥(민화), 광무(영등), 및 무가(임조) 방면으로 침공 하면서 무위까지 진격해왔다. 장중화는 우선을 보내 방어하는 한편 부한(감숙성 임하)을 수비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상황이 위태롭자 장중화는 친정을 고려했다. 사애가 적극 말렸다.

 

  “ 임금이란 한 국가의 기둥이니 가볍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애를 도독정토제군사로 삼고 색하에게 보,기병 2만을 주어 방어하게 했다. 전량 별장 양강이 후조의 유녕을 사부(섬서성 대협)에서 대패시켰다. 유녕은 금성(감숙성 난주)을 지켰다.(AD347년 5월) 마추가 9월 전량의 장모를 습격하여 3천여 급을 참수했고 부한 호군 이규는 7천 무리를 이끌고 마추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황하 이남 강족 저족이 모두 후조에 항복하게 되었고 전량의 영토는 후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림] 전량(AD314-AD376) 왕실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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