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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2 : 정통의 길을 걸어간 전량(E)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10월11일 18시00분
  • 최종수정 2018년10월11일 15시0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23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23) 전조의 멸망(AD329)

 

제1차 전후조 전쟁(호뢰관전투,AD325)에서 낙양을 점령했다가 제2차 전후조 전쟁(AD328년8월)점령했던 낙양을 다시 유요에게 뺏긴 석륵은 낙양을 다시 탈환할 생각이었다. 정하가 반대하고 나섰다.

 

  “ 유요가 군사를 천리 가까이 벌여 놓았으니

    가만 두어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대왕은 가만히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움직이시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석륵은 정하를 크게 꾸짖었다. 그리고 장수 서광에게 물었다.

 

  “ 유요는 분명히 지금 승리에 도취되어 있다.

    모두들 그가 승세를 타니 예봉을 피하자고 하는데

    갑옷 정병 10만을 가지고 포위하고서도

    100일이 지나도록 함락을 시키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 군사는 늘고 게으른 것이 분명하다.

    내가 정예병을 가지고 공략하면 한 번에 격퇴가 가능하다.

    지금 낙양을 지키지 못하면 반드시 양국(후조의 수도)이 위태로워 질 것이고 

    황하 북쪽에서부터 자리를 밀 듯 밀려 내려오면

    내 할 일은 구름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정하는 공격을 반대하고 있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 

 

서광이 웅크리며 말했다.

 

  “ 유요가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석륵이 서광을 칭찬하며 말했다.

 

  “ 자네의 말이 옳다.”

 

석륵은 전쟁에 반대하는 자들의 목을 즉각 베어 버리고 군대를 규합했다. 석감, 석총, 도표 등의 군사를 모두 형양 부근에 모았다. 중산공 석호에게 석문을 지키라고 하고 석륵 본인은 4만 군사를 이끌고 유요가 점령하고 있는 낙양 금용성으로 진격했다. 그러면서 부하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만약 유요가 성고관에 많은 군사를 집결시켜 놓았으면 우리로는 하책이고,

    낙수를 막고 있으면 중책이며,

    낙양을 지키고 있으면 상책이다. 들어가서 사로잡으면 끝이다.“

 

석륵의 후조군사가 성고관에 집결했다. 보병 6만에 기병 2만 7천의 대군이었다. 유요는 낙수에 집결해 있었다. 유요의 군대는 10만 이었다. 석륵은 웃음을 띠며 축하할 만 하다고 중얼거리며 낙양으로 진격했다. 석륵의 군사와 유요의 군사는 낙수를 가운데 두고 대치했다. 이 때 유요는 술에 취해 있었다. 젊어서도 술을 좋아 했지만 말년에 가서는 더욱 심해졌다. 전쟁을 앞두고도 몇 말씩 술을 들었다. 말에 올라타고도 술에 취해 고개를 숙이기 일쑤가 되자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말을 아예 조랑말로 바꾸어 버렸다. 석감의 공격을 받은 전조의 군사들이 퇴각하면서 술에 취한 유요는 달아나다 말이 구덩이에 빠지는 바람에 떨어졌고 10여군데 칼과 창을 맞은 뒤 석감에게 사로잡혔다. 전조의 군사는 대패했다. 석륵이 명령을 내렸다.

 

  “ 잡고자 하는 사람을 잡았으니 

    적군이 도망가게 내버려두라. “ 

 

사로잡힌 유요가 석륵을 보자 말했다.

 

  “ 석왕은 중문에서의 맹세(重門之盟, 하남성 휘현의 북문)를 기억하시오?”

 

중문에서의 맹세란 18년 전 유총과 유요와 석륵이 서진 태수 배정을 포위하면서 맺은 우호의 맹세를 말한다. 석륵은 서광을 시켜 유요에게 말 하였다.

 

  “ 오늘의 일은 하늘이 만든 것이오.

    다시 옛 일을 말해 무엇 하겠소.“

 

석륵은 유요를 다그쳐 빨리 항복하라는 편지를 아들 유희에게 띄울 것을 재촉했다. 유요는 유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와 사직을 바꿀 생각을 하지마라.”

   

석륵은 이마를 찌푸리며 화를 냈다. 한 참 지나서 유요를 처단했다.(AD328년12월) 낙양이 석륵에게 재점령되고 아버지 유요가 잡혀 죽자 태자 유희는 남양왕 유윤과 함께 당장 서쪽, 즉 지금의 감숙성 방향으로 도망가려 했다. 거기는 정량의 땅이다. 상서 호훈이 말리며 나섰다.

 

  “ 비록 주군을 잃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국의 강토는 건재하고

    장수와 병사들 또한 배반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땅히 힘을 합하여 막을 생각을 않고 먼저 도망갈 생각부터 하십니까?

    힘으로 막아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 때 도망을 생각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   

 

남양왕 유윤은 호훈이 자신을 막아서는 것에 분함을 느끼고 목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전조의 백관을 이끌고 상규(감숙성 천수)로 달아났다. 조정이 떠나버린 전조의 도읍지 장안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몇 몇 잔당들이 장안을 점거하다가 결국 석륵에게 모두 투항하고 말았다. 

 

다음해 남양왕 유윤은 수 만 군사를 이끌고 천수를 나와 장안을 향해 진군했다.(AD329년8월) 장안으로 오는 도중에 살고 있던 여러 이민족들이 모두 유윤에게 호응했다. 군사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유윤군은 서안 북쪽 50KM 지점인 중교(섬서성 예천)까지 도달했다. 석륵 휘하 석생은 굳게 성문을 닫아걸고 방어에 치중했다. 석륵의 부하 중산공 석호가 2만 군사로 지원을 오고 있었다. 9월 석호의 군사가 의거(감숙성 영현)에서 유윤군사를 크게 깨뜨렸다. 일격을 당한 유윤군사는 황급히 상규(천수)로 도망쳤다. 석호는 끝까지 뒤를 쫓아 결국 태자 유희, 남양왕 유윤, 그리고 공경 이하 3천여 명을 체포하여 모두 살해하고 유민 9천 명을 수도 양국(산서성 임분)으로 압송했으며 여러 지역에 흩어 져 살고 있는 흉노무리 5천여 명을 낙양까지 끌고 와 거기서 산 채로 묻어 버렸다. 이로써 AD304년 선비족 유연에 의해 건국된 전조는 25년 만인 AD329년 9월 같은 선비족 석륵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24) 전량의 영토 확장과 후조에 칭번(AD330)

 

전조가 망하자 전량 장준은 전조가 장악하고 있던 황하 이남 땅을 모두 거두어들일 수가 있었다. 전량의 주력군은 적도(감숙성 임하)에 주둔하면서 후조와 경계를 삼았다. 후조는 AD330년 6월 맹의를 파견하여 장준에게 정서대장군과 양주목과 구석을 내렸다. 후조로써는 전량을 제거하고 싶었지만 망한 전조의 영토를 수습해야하고 또 강남 동진의 북벌정책을 막아야 했으므로 지금 전량과 전투를 벌일 형편은 되지 못했다. 따라서 전조 조정이 내렸던 것과 거의 같은 지위를 전량에게 내려서 일단은 안정시키자는 계획이었던 셈이다. 장준은 후조의 관작을 수치로 여겨 사신 맹의를 가두어버렸다.(AD330)

 

전조를 멸망시킨 석륵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AD330년9월) 휴도왕 석무는 AD322년 전조에 투항했었는데 그 아들 휴도왕 석강은 후조에 복속하지 않았다. 하동왕 석생이 석강을 공격하자 석강은 전량으로 도망갔다. 석강이 자신의 나라로 들어오자 장준은 당혹했다. 후조의비위를 건드리면 좋을 것이 없었다. 즉각 억류하고 있던 맹의를 후조로 돌려보냈고 동시에 장사 마선을 보내 신하를 자칭하고 조공을 보내기로 약속했다.

 

 

(25) 장준 칭왕 거부(AD332) 

 

자력은 아니었지만 전조의 멸망으로 잃었던 하남 땅의 대부분을 회복했고 또 후조와의 우호관계도 수립되었으며 석륵이 황제를 칭하는 상황이니 전량의 관료들은 장준에게 왕(양왕)을 칭하기를 권고했다. 그러나 장준은 겉으로 위무제(조조)나 진문제(사마의)의 예처럼 고사하면서 진주와 양주의 총수 대리라는 뜻을 가진 ‘영진양이주목’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 칭왕은 신하된 사람이 할 말이 아니다.

    감히 이 말을 다시 꺼내는 자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내에서는 모두 그를 양왕이라 불렀고 둘째 아들 장중화를 세자로 책봉했다.

 

 

(26) 포홍의 전량 귀부와 후조 석호 투항(AD333)

 

AD332년 석륵이 갑자기 병으로 죽게되자 저족 두목 포홍은 옹주자사를 칭하면서 후조에게서 나와 전량에 귀부했다. 당시 전량은 국세는 떨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서진 조정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하북의 가장 큰 나라였으므로 포홍도 야만스런 석호보다는 전량에게 몸을 당분간 의탁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후조의 석랑은 낙양에 주둔했고 하동왕 석생은 관중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쿠테타로 집권한 석호에게 모두 반발하고 있었다. 석랑과석새은 AD333년 10월 석호를 공격함과 동시에 동진에 귀부할 것을 선언했다.

 

화가 난 강력한 석호는 태자 석수를 업성에 두고서 직접 석생과 석랑을 공격했다. 낙양의 석랑을 체포하여 월형(발꿈치 자르는 형벌)한 다음 목을 베어버렸다. 관중의 석생은 처음에 선방하여 전투에서 이겼고 석호는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비족이 석호를 대대적으로 응원하여 석생에게 반격을 가했고 패한 석생은 산으로 도주했다. 석생의 무리인 장안수비군 장영을 석호가 격파하여 참수하고 또 장군 맞추를 파견하여 옹주의 포홍 토벌에 나섰다. 견디지 못한 포홍은 2만 호 거느리고 석호에게 항복했다.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석호는 포홍을 정중하게 영접했다. 포홍의 요구에 따라 저족과 강족 10만 무리를 관동(하남성)에 이주시켜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이 세력들이 20여년 뒤 전진을 건국하는 바탕이 된다.

 

 

 

(27) 장준의 동진 접촉(AD333)

 

관중의 새로운 패자 후조의 지도자 석호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중원을 장악해 나갔다.표면적으로는 관계가 나쁘지 않지만 언제 공격해 들어올지 모르는 나라가 후조였다. 그럴 경우 전량은 동진의 지원이 필요했다. 장준은 성나라 이웅에게 길을 빌려 건강에 표문 올리려 했지만 이웅이 거절했다. 장준은 이웅을 다독거리기 위해 장순을 보내 성에 번방을 지칭하면서까지 길을 빌려고 했다. 장준이 자세를 한껏 낮추고 부탁하자 이웅은 허락을 하는 척 하면서 장준이 보내는 배를 전복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웅이 장준의 계획을 반대한 이유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 계획에 대해 충분히 위협을 느낄만했다. 동진에 매우 충성적인 전량이 동진과 결합하여 양쪽에서 협공하면 성한은 버틸 수가 없는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촉 사람 교찬이 이웅의 계획을 장순에게 밀고해 왔다. 그 정보를 입수한 장순이 성의 이웅에게 간곡하게 말했다.

 

  “ 저의 주군(장준)이 저를 보내어 건강으로 가는 길을 허락받게 한 것은

    폐하께서 충성스럽고 의로우시며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룩하게 할 사람으로 보았던 때문입니다.

    만약에 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있다면

    저자에서 죽여야 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십시오.

    ‘양주에서는 옛 덕을 잊지 못하여 낭야(동진 설립자 낭야왕 사마예)와

    서신을 교환하려고 하니 주군은 성스럽고 신하는 총명하여 이를 죽인 것이다‘

    그러면 의롭다는 소리가 널리 퍼져 천하가 두려워할 것입니다.

    지금 강 물에 쳐 박아 죽이신다면

    위엄과 형벌이 드러나지 않으니 

    어찌 천하에 드러내기 충분하겠습니까?“  

 

이웅이 깜짝 놀라는 척 모르는 척 시침떼며 말했다.

 

  “어찌 그런 일이 있겠소?”

 

성한 사예교위 경건이 이웅에게 조용히 다가가 말했다.

 

   “장순을 머물러있게 하십시오.”

 

이웅이 물었다.

 

  “ 전량의 장사(장사란 한 나라의 총리격인 중책)인데 

    어찌 그를 억류할 수 있겠소.

    그대가 그를 좀 살펴보시오“

 

경건이 장순에게가서 이렇게 말했다.

 

   “ 서늘할 때 까지 좀 기다리시지요”

 

장순이 대답했다.

 

   “ 과군(자신의 주군을 낮추는 말)께서는 

     황여가 파천되고 재궁이 아직 돌아오지 아니하여

     살아있는 백성들도 도탄에 빠져있어도 아직 이를 구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 장순을 파견하여 정성이나마 상도(건강)에 전하려는 뜻일 뿐입니다.. 

     예기가 중대하여서 하급관리를 대신 보낼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급관리가 가도 좋을 것이라면 아예 제가 오지도 않았을 것 아닙니까.

     비록 화산이나 끓는 바다라도 직접 가야할 것인데

     어찌 날씨가 덥다고 거리끼겠습니까?

 

이웅이 장순에게 물었다.

 

   “ 귀주께서 영명하신 것은 세상을 덮고도 남으며 

     토지도 험하고 군사도 강한데 

     어찌 황제를 칭하며 즐기지 않으십니까?“

 

장순이 대답했다

 

   “ 과군은 조부 때부터 충성과 곧음이 돈독했습니다.

     원수와 수치를 아직도 갚지 못하였고 

     창을 베고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형편(침과대단,枕戈待旦)인데

     어찌 스스로 즐기는 일을 생각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이웅이 부끄러워하면서 말했다. 

 

  “ 나의 조부(이무) 또한 서진의 신하였다가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진 뒤 이리로 피난 오셨소.

    낭야가 위대한 진나라를 부흥할 수 있다면

    당연히 나아가 도와야지요.“

 

이웅이 후하게 장순을 대하고 건강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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