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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2 : 정통의 길을 걸어간 전량(D)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10월04일 17시42분
  • 최종수정 2018년10월04일 16시46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18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6) 장무 병사(AD324)

 

유요의 침공을 외교적으로 잘 막은 장무가 병환이 들었다. 국가가 위태로운 이 시점에 드러눕게 되자 장무는 조카이자 세자인 장준을 불러 눈물 흘리며 말했다.

 

  “ 우리 집안은 대대로 효성과 우애와 충성과 순종으로 

    세상의 칭찬을 받아왔다.

    오늘날 천하가 크게 혼란하여도 

    너는 이 전통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아라.“

 

그리고는 장무가 명령을 내렸다.

 

  “ 내 관직은 왕명을 따른 것이 아니고 

    진실로 사람을 모아 벌인 일이니 

    어찌 영광스럽다고 할 것이냐?

    죽는 날 흰 옷을 입혀서 관에 넣되 

    조복(지위에 맞는 관복)을 입히지 말고 묻어라.“

     

그 날로 장무는 죽었다.(AD324년 12월) 48세였다. 형 장식의 자리를 계승한 지 4년 만에 죽은 셈이다. 조카 장준이 그 자리를 계승하여 양주목, 양왕이 되었다. 이 때 장준의 나이는 열 일곱살 이었다.

 

 

 

(17) 신안의 반란(AD324년 12월) 

 

 

전량의 장수 신안이 부한(감숙 임하)을 점거하고 전량의 명령을 복종하고 따르지 않았다. 장준이 토벌계획을 세웠다. 전량 조정의 종사 유경이 말했다. 

 

  “ 패권을 가진 왕의 군대는 반드시 

    하늘의 때와 인간의 사정이 맞아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법입니다.

    신안은 흉악하고 미친 짓을 하므로 저절로 망할 것이 분명합니다.

    어찌 기근이 든 해에 군사를 일으키시고 

    추운 겨울에 성을 공격하시는 것입니까?“

 

장준이 출병계획을 중단시켰다. 

 

 

(18) 전량의 책사 왕즐(AD325)

 

장준은 전량의 참군 왕즐을 유요에게 보빙으로 보냈다. 보빙이란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을 담고 가는 사신이다. 사실상 복종의 뜻을 내포하기도 한 셈이다. 유요가 왕즐에게 물었다.

 

  “ 진실로 우호관계를 보장할 수 있소?”

 

왕즐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 없습니다.”

 

전조의 시중 서막이 물었다.

 

 “ 그대가 와서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면서 

   우호관계를 보장하지 못한다니 그것이 무슨 말이요?“

 

왕즐이 대답했다.

 

  “ 제 환공이 관택의 맹약을 할 때에는 

    걱정하는 마음에 전전긍긍했지만 

    모든 제후들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앞 다투어 달려왔소.  

    제 환공이 규구에서 모임을 할 때에는

    힘을 떨치고 자랑했지만 배반한 나라가 아홉 나라였소.

    전조 조정의 교화가 오늘 같다면야 약속할 수 있겠지만

    만약 정치와 교육이 허물어진다면 

    가까운(내부) 곳에서 부터 반란이 일어날 텐데

    어떻게 우리 주군이 우호를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즉, 전조와 전량의 우호관계란 전조 조정이 얼마나 바른 정치를 하느냐에 달린 것이지 전량에게 달린 것이 아니니 우호관계의 모든 것이 너희에게 달려 있지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말이었다. 유요가 이렇게 외쳤다.

 

   “ 이 사람은 양주의 군자다”

 

왕즐을 후히 대우하고 돌려보냈다.

 

 

(19) 장준의 성(成)과의  우호관계(AD327) 

 

아무리 우호관계를 수립했다고 하더라도 장준은 전조의 압박이 항상 두려웠다. 전조의 군사력이 막강한 반면 전량의 군사력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약했기 때문이다. 장준은 전조와의접경인 농서(감숙 농서)지역과 남안(농서 동북쪽)지역 주민 2천 가구를 고장(감숙 무위)로 이주시킴과 동시에 남쪽 익주(사천성 성도)지역에 웅거한 성(또는 성한)과 우호관계를 수립하면서 서로 황제라는 존호를 사용하지 말고 동진에 충성하자고 권고했다. 성은 한족인 이웅이 AD306년 파촉지역에 세운 나라다. 성의 창업자 이웅이 이렇게 말했다.

 

   “ 저는 본래 제왕이 되는 것에 전혀 관심 없습니다.

     진 황실의 공신이 되어 더러운 먼지를 소제하고 싶지만

     진 황실이 지지부진하고 은덕을 베풀지 못하여 

     목을 뽑아 동쪽을 바라본지 몇 년이 됨

     마침 편지를 보내오셔서 부탁하시니 어찌 그리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성한과 전량의 우호관계는 시작되었다.

 

 

(20) 유요의 성고관(호뢰관) 전투(제1차 전-후조 전쟁) 패배와 와병(AD325)

 

AD320년대 초 유요가 동쪽의 강력한 석륵의 후조에 막혀 오로지 서쪽 전량(지금의 감숙성)으로 영토를 확장하려고 하는 동안 석륵은 무서운 기세로 중원의 영토를 넓혀 나갔다. 남쪽으로는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수선한 동진의 서주(안휘성)지역 영토를 침략했고 북쪽으로는 요동지역을 놓고 우문걸득귀 및 모용외와 다투었다. 이제 전조와 후조의 마찰은 불가피해졌다. 두 나라 군대의 접촉점은 지금의 낙양 부근인 호뢰관이었다. 당시 낙양은 석륵의 부하 석생이 주둔하고 있었다. 전조 유요는 유악과 1만5천 군사를 보내 동쪽으로 진군시켜 맹진(하남성 맹진현. 낙양 북쪽)에 도달한 뒤 석생의 낙양을 포위했다. 

 

석호는 4만 군사를 보내 석생을 지원했다. 석호의 군대는 압도적인 우세를 바탕으로 유악의군대를 성고관(하남성 호뢰관)에서 유악의 군대를 대파시켰다. 유요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구원에 나섰으나 군사들이 야략(夜掠,알 수없는 야간공포감)에 휩싸여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석호는 의기양양 낙양을 점령하였으며 사로잡힌 전조 장수 유악 등 80여 명은 형태로 압송 되었다. 석륵은 장안 지역을 제외한 황하 이북의 거의 모두를 장악하게 되었다. 전조 내부에서도 후조에게 귀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장안으로 돌아 온 유요는 소복을 입고 교외에 나가 7일 동안 곡을 하다가 돌아왔다. 그의 분노가 병이 되었다.

 

유요는 영안왕 유윤을 대사마, 대선우 남양왕으로 고쳐 책봉하고 모든 관직은 호족, 갈족, 선비족, 저족, 및 강족의 이민족 만 임명했다. 그것은 아마도 호뢰관 전투에서의 패전이 한족 관리들의 무능함과 나태함, 그리고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움직임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1) 장준의 전조 배반과 하남 실지(AD327)

 

유요가 후조의 석륵에게 호뢰관에서 패배하자 장준은 전조가 AD323년 내려 준 작위를 버리고 대신 동진의 작위인 대장군과 양주목을 채택했다. 그리고 무위태수 두도, 금성(감숙 난주)태수 장랑, 무흥(무위부근)태수 신암 및 양열장군 송집을 보내 금성에 있는 한박과 만나서 유요를 공격했다.(AD325년 5월) 전조 장수 유요의 아들 유윤은 적도(감숙 임조)에서 주둔하며 전량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가을) 부한에 있던 호군 신안이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급보를 보내왔다. 장준은 급히 한박과 신암에게 구원을 명령했다. 신암은 공격을 미루는 한박에게 공격을 재촉하자 한박이 이렇게 말했다.

 

  “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해와 별자리에 자주 변화가 있어서

    가볍게 움직일 수 없소. 

    또 전조는 석륵과 대치하는 형편이니 

    오래 우리와 대치할 수 없을 것이요.“

 

한박과 전량 군사는 유윤과 70여일 대치했다. AD327년 10월 한박은 신암을 보내 금성의 곡식을 운반시켰다. 전량이 대규모 군량을 이동시킨다는 정보를 입수한 유윤이 이렇게 말했다.

 

  “ 한박의 무리는 우리 열 배다.

    양식이 달리는 우리는 오래 버틸 수가 없다.  

    지금 저들이 옮기려는 곡식은 하늘이 우리에게 준 기회다.

    신암만 물리치면 한박은 자연히 궤멸될 것이다.“

 

기병 3천을 이끌고 옥천령에서 신암을 습격했다. 신암을 격파한 다음에는 한박을 압박하여 패퇴시켰다. 유윤의 군대는 이긴 기세를 몰아 황하를 건너 영거(감숙성 영등)를 공격하여 탈취하고 2만여급을 참수한 뒤 진무(감숙성 영등부근)에 주둔했다. 전량의 장수 장랑과 신안 등은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전조에 항복했다. 이로써 장준이 하남 땅을 크게 잃었다. 

 

 

(22) 장준의 엉뚱한 장안공격 계획(AD328) 

 

유요가 석호의 4만 대군을 고후(산서성 안읍)에서 격파하고 이어 동쪽 낙양으로 진군했다. 지난번 호뢰관 전투에서 뺏긴 낙양을 탈환하자는 전쟁이다. 장준은 이 틈을 타 텅빈 장안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삼년 전 빼앗긴 하남 땅도 이 기회에 수복할 생각이었다. 이조낭중 색순이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 유요가 동쪽 정벌을 떠났다고는 하지만

    장안은 유능한 아들 유윤이 방어하고 있습니다.

    쉽거나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설혹 조금 얻는 것이 있다손 친들 

    그들이 다시 동쪽을 수습하거나 아니면 포기하고 돌아온다면

    어떤 경우든 우리로써는 화란의 크기를 계산할 수가 없습니다.,“

 

장준이 장안 공격계획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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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18년10월04일 16시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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