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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11:바람처럼 사라진 혁련발발 하나라(F)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8월16일 17시47분
  • 최종수정 2018년08월16일 17시2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15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30) 요흥 와병과 후진의 내분 : 요홍과 요필의 대립(AD414) 

 

후진 주군 요흥에게 병이 났다. 이 때 요흥(AD366-AD416)의 나이는 48세였다. 병든 몸임에도 불구하고 반란을 일으킨 이홍과 구상을 토벌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몰고 황릉까지 가서 역적구상의 목을 베고 이홍은 사로잡아 돌아왔다. 

이 때 태자 요홍은 좌장군 요문종을 총애하였는데 요홍의 동생 요필이 요문종을 싫어하여 요흥에게 요문종을 요망하다고 무고했다. 셋째 아들 요필을 매우 아낀 요흥은 요문종에게 죽음을 내렸고 사람들은 모두 요필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요흥은 요필의 말이라면 듣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기밀을 취급하는 요흥의 핵심 측근은 모두 요필의 심복들로 교체되었다. 요흥의 우복야 양희와 시중 임겸과 경조윤 윤소 등 조정 대신들은 요흥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 부자지간의 일은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어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군신지간의 일은

    부자지간의 일에 비추어 가볍지 않으니    

    신들은 침묵하고 아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최근 광평공 요필이 적자의 자리를 뺏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길거리에서는 폐하께서 조만간 태자 폐립의 계획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그런 일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요흥은 깜짝 놀랐다.

 

  “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양희 등이 다시 말씀을 올렸다.

 

  “ 진실로 그런 일이 없으시다면

    폐하께서 요필을 아끼시는 것이 

    오히려 그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의 주변 사람을 쫓아내시고

    그의 권세와 위엄을 조금 줄이는 것이 

    사직을 위해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흥은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곧바로 대사농 보온과 좌장사 왕필 등이 요필을 태자로 교체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요흥은 들은 척 하지도 않았다. 요필은 요흥의 병세도 그렇고 또한 요흥의 총애를 확신한 나머지 군사 수천을 모아 결사대를 꾸렸다. 

 

요흥의 다른 아들 요유는 공공연한 요필의 반란 계획을 지방에 나가 있는 형님들에게 알렸다. 포판에 있던 요의(요흥의 둘째 아들), 낙양에 있는 요광(넷째), 봉상에 있는 요심(여섯째) 등이 군사를 훈련하며 장안의 요필 토벌계획을 세웠다. 요흥의 병문안을 온 정로장군 유강이 요흥에게 여러 황자들의 반란계획을 보고해 올렸다. 양희와 윤소는 거듭해서 요필을 죽여야 한다고 간청하면서 말했다.

 

  “ 진정으로 죽이지 못하시겠다면 

    그의 지위와 권세만이라도 박탈하셔야 합니다.“

 

마지못한 요흥이 요필의 상서령 직을 뺏고 평장군과 공작의 직위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요흥의 지시를 들은 요의 등 요흥의 여러 아들들은 군사를 풀고 토벌계획을 접었다. 강규와 양희는 요필과 반역무리를 더 멀리 쫓아내자고 권했지만 요흥은 대꾸하지 않았다.

 

 

(31) 요필과 요선의 갈등과 혁련발발의 침략(AD415)

 

광평공 요필이 지난 해 자신을 헐뜯은 동생 요선을 아버지 요흥에게 참소했다. 마침 요선의 사마(측근 신하) 권비가 장안에 들어오자 요흥은 요선을 잘 계도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죽이려고 하였다. 권비는 죽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주군 요선의 비행을 고자질하면서 형벌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요흥은 요선 등의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고 화가 나서 요선이 주둔하고 있는 황릉에 사람을 보내 그를 감옥에 가두라고 지시한 뒤 요필에게는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진주(감숙성 천수)에 주둔하라고 명령했다.   

 

윤소가 나서서 요흥을 말렸다.

 

  “ 지금 광평공 요필과 황태자 요홍이 사이가 좋지 않은데

    저렇게 많은 군사를 요필에게 주신다면

    만일 황제께서 편치 않게 되시는 날에는 

    천하가 위험하게 됩니다.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커다란 계책이 위태로워진다(小不忍,乱大谋)’고 했습니다.

    이는 바로 지금의 폐하를 위해 하는 말입니다.“

 

요흥은 윤소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왕 혁련발발은 후진의 행성(섬서성 황릉)을 뽑아 버리고 후진 병사 2만 명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요흥이 격분하여 북지(섬서성 요현)으로 진격하여 진주에 있는 요필과 염만외를 차출하여 신평(섬서성 빈현)으로 보냈다. 혁련발발은 북량의 저거몽손과 연대를 모색하면서 후진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32) 후진(後秦) 멸망(AD417)

 

AD417년 7월 동진 유유의 군대는 삼문협까지 도달했다. 유유의 남군 심전자와 부흥지는 청니(섬서성 남전)까지 올라왔다. 요홍은 먼저 심전자의 군대를 상대했으나 숫적으로 훨씬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하여 장안으로 도망갔다. 왕진악은 유유의 허락을 받고 수군으로 장안을 공격했다. 후진의 요강과 요난의 군사가 왕진악에게 패배했다. 왕진악은 수전을 이긴 뒤 군대를 이끌고 육지로 올라갔다. 그리고 후진의 방어군 요비와 요심을 격파했다. 요홍은 황궁 안으로 대피했다. 후진의 장수 호익도는 마침내 유유에게 항복했다. 궁지에 몰린 요홍이 항복하려하자 열 살 짜리 아들 요불념이 이렇게 말했다.

 

  “ 아버님, 자결하는 것만 못합니다.”      

 

말을 마친 요불념은 성벽에서 떨어져 자결했지만 요홍은 머뭇거리며 망설이다가 결국 처자를 모두 이끌고 왕진악에게 항복했다.(AD417년 8월24일) 9월 태위 유유가 장안에 도착해서 왕진악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나의 대업을 이루게 한 사람은 경이오!“ 

 

요박, 요찬 등 후진의 모든 황족과 장수들이 유유에게 항복했는데 유유는 그들을 모두 살해했다. 그리고 요홍도 건강까지 데리고 와서 목을 베었다. 유유는 건강에서 낙양으로 천도할 것을 생각했으나 측근 왕중덕이 반대하였으므로 그만 두었다. 

 

 

(33) 혁련발발의 관중과 장안 포위(AD417) 

 

유유가 후진을 멸망시킬 때 혁련발발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 요홍은 유유의 적수가 절대 못 된다. 

    게다가 안에서 내분이 일어났으니 어찌 외적을 막을 수가 있겠느냐.

    그러나 유유는 결단코 장안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을 것이다.

    장차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자제와 부하에게 장안을 맡길 터인데

    내가 그곳을 빼앗는 것은 검불 줍는 일 보다 쉬울 것이다.“

   

유유가 장안을 점령하는 사이 혁련발발은 후진의 옛 북쪽 땅을 거의 대부분 차지하였다. 유유는 혁련발발에게 사신에게 편지를 붙여 보내 형제서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더 이상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싶어서 였다. 혁련발발도 원하는 바였다. 혁련발발은 유유에게 보낼 답장 편지를 중서시랑 황보휘가 외우도록 한 뒤 유유의 사신에게 구술로 불러주어 받아 적게 하였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배려도 있었고 또 받아 적게 함으로써 높은 위엄을 보이기 위한 속셈이기도 하였다. 유유가 탄식하며 말했다.

 

  “ 내가 혁련발발 보다 못하구나.”  

 

혁련발발과 우호조약을 맺은 유유는 장안을 출발하여 낙양 방면으로 돌아갔다.(AD417년12월) 혁련발발은 장안 공략의 방도를 왕매덕에게 물었다. 왕매덕이 대답했다.

 

   “ 어린 유의진을 두고 허겁지겁 돌아갔으니 

     필시 동진 황위 찬탈에 뜻을 둔 것이지 

     중원에는 뜻이 없음이 분명합니다.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관중을 내린 것이니           

     먼저 유격부대를 보내 

     청니(섬서성 남전) 상락(섬서성 상락)을 점령하여 장안 남쪽을 끊고 동시에         

     동관을 장악하여 수로 육로를 끊은 다음 

     삼보지역(장안)에 격문을 띄워 위세와 은덕을 동시에 베풀면서 

     유의진을 타도한다면

     그것은 말할 거리조차 되지 않는 쉬운 일이 될 것입니다.“

  

혁련발발은 왕매덕 말대로 아들 혁련창을 보내 동관을 장악하게하고 왕매덕을 청니로 보내 장안 남쪽을 포위했다. 

 

 

(34) 장안 내부의 혼란(AD418)

 

장안의 사방을 틀어막은 혁련발발은 혁련귀를 시켜 장안을 장안 공격했다.(AD418) 혁련귀가 위수에 이르자 주변은 모두 혁련귀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동진장수 용양장군 신전자는 겁을 먹고 후퇴한 뒤 왕진악에게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급한 상황을 보고했다. 왕진악이 사자를 보내 심전자를 심하게 책망했다.

 

   “ 공(유유)께서 10살 어린 아이를 우리에게 맡기셨으니

     마땅히 죽기를 각오로 싸우셔야지 

     어찌 후퇴하고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평소 왕진악과 심전자는 서로 불화하던 사이였으므로 왕진악의 꾸중을 듣고  심전자는 이를 악물었다. 왕진악과 심전자가 다시 군대를 정리하여 북지(섬서성 요현)로 전투를 나갔다. 이때 장안 안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유의진을 볼모로 왕진악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소문이었다. 심전자 무리가 퍼뜨린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심전자는 왕진악을 유인했다.유유가 전달한 극비 상황을 알려 드릴게 있다는 이유로 측근을 모두 물리게 한 다음 왕진악을 살해했다.(1월15일) 그리고는 유의진에게는 거짓으로 태위(유유)의 명으로 죽인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살해 현장에 있었던 부홍지가 사실대로 심전자가 왕진악을 유인하여 살해한 것이라고 유의진에게 보고했다. 유의진의 수하 왕수는 심전자를 사로잡아 처형했다. 그리고 모수지를 왕진악을 대신하여 군사 참모로 등용했다. 부홍지는 혁련귀 군사를 크게 격파했다. 일단  하나라 군사는 물러났다.

 

장안을 통치하는 어린 유의진은 이번 승전에서 매우 불공평하고 또 과도하게 논공행상을 처리하면서 정치가 크게 어지러워 졌다. 보다 못한 왕수가 나서서 잘못된 논공행상을 취소하고 혼란한 정치를 바로 잡으려 했다. 그러자 상을 취소당한 사람들이 왕수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 심전자가 왕진악을 죽인 것이 모반 때문이라면

   왕수가 심전자를 죽인 것도 모반이나 다를 바가 없다.“

 

가득이나 정치에 간섭하면서 잔소리 해대는 왕진악이 눈엣가시였던 유의진은 사람을 시켜 왕수를 처형해 버렸다. 그리고 혁련발발의 침입으로 불안해지자 장안 안팎의 모든 군사를 장안 안으로 불러들이고 말았다. 장안을 총력 방어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혁련발발에게 항복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동진 군대가 다 장안으로 들어가자 방어력을 잃은 장안 주변의 모든 군현은 혁련발발에 항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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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8월16일 17시47분
  • 최종수정 2018년08월16일 17시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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