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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11:바람처럼 사라진 혁련발발 하나라(D)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8월02일 16시55분
  • 최종수정 2018년08월02일 11시49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22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8) 유연부족 욱구려씨와 유위진 피살(AD391)

 

부견이 대를 멸망시킬 때(AD376) 유연부락의 욱구려씨는 유위진에게 복속하고 있었다. 15년 지난 AD391년 탁발규가 일어나자 대부분의 유목민족들은 북위를 섬겼으나 유연부락 욱구려씨만은 북위를 섬기지 않았다. 욱구려씨는 종족으로 볼 때 흉노족이어서 오히려 유위진에 더 가까웠다. 탁발규가 그런 유연부락을 공격했다. 유연부락의 욱구려씨족 두목 욱구려필후발과 욱구려온흘제 형제는 탁발규에게 항복했다. 탁발규는 그들을 운중(내몽고 탁극탁)으로 모두 이주시켰다. 탁발규가 쳐들어와 자신의 수하세력 욱구려씨를 빼앗아가자 유위진은 아들 유직력제 보내 8-9만 병력으로 북위의 남부지역을 침범했다.(AD391년 11월) 탁발규가 8천 기병으로 반격에 나서서 유직력제를 대파시켰다. 여세를 몰아 탁발규는 황하를 건너 유위진의 나라 중심부 오르도스를 공격했다. 유위진 부자는 서쪽으로 도주했다. 탁발규의 장수 이위가 끝까지 쫓아가 악극탁전기에서 유직력제를 사로잡았고 유위진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AD391년 11월)


(19) 열살짜리 유발발의 도주(AD391)

탁발규는 유위진 종족 5천명을 참수하고 그 시체를 황하에 버렸다. 탁발규로써는 간사하게 붙었다 배반하기를 밥 먹듯 해온 유위진을 절대로 살려 둘 수 없었다. 그리고 유위진이 가지고 있던 말 30만 필과 소양 4백여만 마리를 획득했다. 이번 토벌로 탁발규 북위는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매우 강성한 국가가 되는 기초를 닦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때 유위진의 열 살짜리 막내아들 유발발은 가까스로 선비족의 일족인 설간부락으로 도주할 수 있었다. 탁발규는 후환을 아예 뽑아버리기 위해 사람을 설간부락에 보내 유발발을 색출했다. 설간부락 두목 태실장은 유발발을 세워놓고 이렇게 말했다.
  
  “ 나라가 망하고 집안이 무너져 
    내게 귀의한 유발발을 
    같이 망하면 망했지
    어찌 그를 붙잡아 북위에게 넘기겠는가?“  

태실장은 유발발을 영하성 고원에 주둔하고 있던 후진의 선비족 족장 몰혁간으로 보냈다. 유발발의 생김새와 언사가 범상치 않음을 본 몰혁간은 딸을 줘 처로 삼게 하였다.(AD391)


(20) 북위와 후연의 대결 : 참합피 대전(AD395) 

AD391년 유위진을 멸망시키면서 국력이 강해진 북위 탁발규는 그 여세를 몰아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해갔다. 당시 최강국 후연은 영역을 확장해오는 북위를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AD393년-AD394년에 걸쳐 후연의 모용수는 7만 보기병을 붙여서 북위와 우호관계에 있는 모용영의 서연을 멸망시키는 한편 장안의 후진과 연대를 모색했다. 서쪽이 든든해진 후연은 오로지 북쪽의 북위만 해결하면 되게 되었다. 팽창하는 북위와 후연의 대결은 불가피해졌다. 선제공격은 북위가 일으켰다. AD395년 5월 탁발규가 후연의 국경을 침범한 것이다. 모용수는 즉각 태자 모용보와 아들 모용농, 모용린에게 8만 기병을 주어 반격하도록 했다. 그리고 모용덕에게 1만 8천 군사를 주어 그 뒤를 이어 받쳐 주도록 했다. 이것이 북위-후연의 참합피 대전(AD395년) 발단이다. 이 전쟁에서 후연은 크게 패했다. 이미 70세가 넘어 노쇠한 주군 모용수의 판단력과 리더십이 흔들린 것이 패인이기도 하겠지만 북위 탁발규의 능력이 더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북위 탁발규는 참합피 승전의 기세를 몰아 맹렬한 속도로 동쪽 후연의 영토를 침범해 나갔다.    

북위가 북중국 전역에서 영토를 확장해 가는 동안 후진의 보호 아래에 있는 유위진 아들 유문진은 북위 탁발규에게 투항했다. 탁발규는 종실의 여자를 그에게 주고 숙씨라는 성을 내려 주었다.(AD399)


(21) 북위의 서쪽 정벌과 유발발의 부상(AD407)

AD395년 참합피에서 대승하고 또 AD397년 호타하(하북성 석가장 부근 하천)전투에서도 후연군사를 크게 깨뜨린 북위는 후연을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은 다음 서쪽 방면으로 눈을 돌렸다. AD401년 12월 탁발규는 탁발준과 화발을 5만 군사와 함께 보내 고평(영하성 고원)의 몰혁간을 습격하도록 했다.

원래 북위 탁발규와 후진의 요흥은 나쁜 사이가 아니었다. 탁발규가 말 1천 필을 후진에게 보내면서 딸을 달라고 했는데 이미 탁발규에게는 후연 모용수의 손녀딸 아내가 있었다. 요흥은 자신을 속인 탁발규에 대해 내심 불쾌했는데 게다가 군대를 보내 자신의 속국인 몰혁간 영토를 공격하게 되자 양국관계가 급속하게 냉각되었다.   

북위 대군이 들이닥치자 몰혁간과 유발발은 일단 진주(감숙성경천)로 몸을 피했다.(AD401) 이 때 나이가 갓 스무 살을 넘게 된 유발발은 체격이 장대하고 몸가짐이 수려했으며 총명하고 언변이 매우 뛰어났다고 기록되었다. 그런 유발발을 후진 군주 요흥은 매우 아끼고 중용했다. 유발발은 요흥의 지원에 힘입어 강력한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 요흥의 아우 요옹이 믿을 수 없는 간교한 유발발을 경계하라고 귀띔했지만 요홍은 듣지 않았다.

       “ 세상을 구제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내가 그와 더불어 천하를 평정하려고 하는데
         어찌 그를 꺼리는가?“

오히려 유발발을 안원장군으로 삼아 몰혁간을 도와 고평(영하 고원)에 진수시켰다. 그리고 유발발의 아버지 유위진에게 속했던 부락민 3만을 배속시켜 북위의 침입에 대비하도록 했다. 요옹이 형님 요흥에게 한사코 유발발 등용을 반대했다.
요흥이 반문했다.

 “ 네가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를 어떻게 아느냐?”

요옹이 대답했다.

  “ 윗사람 받드는 것이 게으르고 
    사람을 잔혹하게 다루며
    욕심이 많고 교활하여 어질지 않습니다. 
    거취를 가볍게 여겨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을 보면
    믿을 사람이 못됩니다.
    그런 인간을 너무 총애하시니 장차 변경에서 
    걱정거리를 만들까 심히 걱정됩니다.“

동생이 극렬하게 반대하자 요흥은 마침내 유발발을 등용시키는 것을 멈추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유발발을 끝내 안북장군 오원공에 임명하고 여러 선비족을 통솔시켜 삭방(내몽고 항금기)에 진수시켰다.(AD407)


(22) 후진과 북위의 화해와 유발발의 대하 건국(AD407)  

북위 탁발규는 6년 전인 AD401년 겨울 고평을 공격할 때 사로잡힌 후진 장수 당소방을 돌려주었다. 적대관계를 풀자는 신호였다. 후진 요흥 또한 북위와 적대관계를 풀고 싶었기 때문에 좋은 말 1천 필 탁발규에게 보내면서 포로가 된 후진 장수 적백지도 돌려 줄 것을 요청했다. 탁발규가 허락했다. 요흥의 후진과 탁발규의 북위가 우호관계를 맺는 것을 절대로 용납 못할 사람이 유발발이었다. 왜냐하면 북위는 AD391년 아버지 유위진을 죽인 원수였기 때문이다. 

때마침 유연부락의 욱구려사륜이 종주국 북위에게 보내는 말 8천 필을 보냈는데 유발발은 가운데에서 말들을 약탈하고 욱구려사륜의 무리 3만명 마저 탈취하여 무리를 몰고 고평(고원)으로 갔다. 장인 몰혁간에게는 사냥한다고 거짓말 한 뒤 몰혁간을 죽이고 그의 무리마저도 병합해버렸다. 유발발은 마침내 후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대하(大夏)라는 나라를 건국했다. 스스로 대하천왕 및 대선우라고 하면서 도읍을 대성, 즉 통만(지금의 산서성 유림)으로 정했다. 

 
(23) 대하 유발발의 남침(AD407)

통만에서 대하를 건국한 유발발은 근방의 선비족 설천 등 3개 부락 함락하여 포로 약 만여명을 흡수한 뒤 곧바로 후진의 북쪽 북경인 삼성을 침범해 들어갔다. 그 전투에서 후진 장군 양비와 요석생을 사로잡고 참수했다. 유발발의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 폐하께서 관중을 장악하시려면 의당 먼저 근본을 단단하게 한 다음
    사람들의 신임을 얻으셔야 합니다.
    고평(영하성 고원)은 땅이 넓고 산천이 함하며 견고하고 또 비옥하므로
    도읍으로 정할 만합니다. “

[그림] 하나라의 남침(AD407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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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발이 말했다.

   “ 경등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소.
     나의 대업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어서 병사가 많지 않고
     또 요흥이 한 시대 영웅으로 굳게 버티고 있으니
     아직은 관중을 예기할 때가 아니오.
     내가 지금 한 성만을 지킨다면
     그는 반드시 대군을 몰아서 공략해 올 것인데
     그것은 수적으로 불리한 우리가 앉아서 멸망하는 길일뿐이요.
     용맹스런 기병을 날려서 그들이 예기치 않은 곳으로 나아가서
     앞으로 오면 뒤를 공격하고
     뒤로 오면 앞을 공격하여 
     그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한다면 
     적이 몇 백만 대군이라도 감당할 수가 있소.      
     10년이 되지 않아 영북(섬서성 예천 이북)과 하동(산서성 서남부)은
     모두 우리 소유가 될 것이요.
     요흥이 죽기를 기다리면
     못 난 그 아들(요홍)은 어리석고 나약하니  
     장안은 힘들이지 않고 내가 차지할 수가 있는 것이요.“
 
 유발발은 영북지역을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요흥이 탄식하며 말했다.

“ 내가 황아(요옹)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이 되었구나!”

유발발은 남량의 독발녹단에게 혼인을 요청했다. 독발녹단이 거절하자 유발발은 기병 2만 군사를 이끌고 지양(감숙성 난주시 북서쪽 영등)을 공격하여 1만여 명을 사상하고 3만여 가축을 약탈하고 돌아왔다. 독발녹단은 유발발을 반격할 계획을 세웠다. 부하 장수 초랑이 반대하고 나섰다.

  “ 유발발의 군대가 엄격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읍니다.
    결코 아직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장수 하련이 반발했다.

  “ 유발발 잔당은 유위진 패잔병의 무리일 뿐입니다.    
    어찌 그들을 피하여 약함을 드러냅니까?“

독발녹단은 하련의 말을 좇아 공격에 나섰다. 유발발은 독발녹단 군사의 움직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양무(감숙성 정원현) 골짜기에 병사 매복시켜 놓고 얼음 깨고 수레를 묻어 독발녹단 군사의길을 막았다. 추격해 오는 독발녹단의 군사가 막힌 강 앞에서 허둥대는 틈을 타고 습격하여 크게 대패시켰다. 독발녹단의 장수 10 중  6-7명이 전사했고 독발녹단 홀로 도주했을 뿐 근위병은 거의 모두 체포되거나 잡혀 죽었다. 유발발은 죽은 시체를 쌓아 올려 촉루대라고 이름 붙였다. 유발발은 또 독발녹단을 지원해 온 후진 장군 장불생도 격파하고 군사 5천을 참수해버렸다. 독발녹단은 남은 주민을 몰아서 고장(감숙성 무위)으로 도망가 버렸다.(AD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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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8월02일 16시55분
  • 최종수정 2018년08월02일 11시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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