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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6B): 최초의 5호16국 성한의 성쇠(2)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7월06일 17시13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6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⑹ 이웅의 세력 확장 (AD314)

 

양난적은 이민족인 저족(氐族)의 두목 양무수의 아들이다. 양자가 북쪽 양주(梁州:지금의 섬서성 남부와 사천성 북부지역)에서 장사를 하다가 몰래 양민 한 사람을 팔았다가 죄에 걸려 양주자사 장관에게 채찍으로 맞아죽었다. 양난적은 장광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 때 양주자사 장광은 양호(楊虎)와 서로 싸우고 있었는데 서로 양무수 도움을 끌어들이려고 사신을 파견했다. 양무수는 양난적을 보내 장광을 구원하라고 했으나 양난적은 장광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양호를 지원하였다. 원한도 원한이지만 뇌물을 양난적의 뇌물요구를 장광은 거부했고 양호는 뇌물을 줄 뿐만 아니라 양난적에게 이렇게 말했다.

 

“ 이 동네 모든 진귀한 보물은 모두 장광이 가지고 있소.”

 

양난적과 양호는 협공하여 장광의 군사를 격파했다. 부하들이 장광에게 퇴각하여 뒷 날을 도모하는 것이 옳다고 하자 장광은 소리쳤다.

 

“ 내가 나라의 중책을 맡아 도적을 토벌하지 못하는 것도 분한데

  이 자리에서 죽어서 이름이라도 신선처럼 남길 지언정

  어찌 도망가라는 말을 내게 할 수가 있느냐?“

 

분에 넘친 장광은 말을 마치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양주 사람들은 장광의 어린 아들 장매를 익주자사로 옹립했으나 저족들의 공격을 받고 절멸되었다.

 

승세를 탄 양호는 양주의 치소 한중에서 사람과 물자를 약탈하자 양주주민 장함은 군사를 일으켜 양난적과 양호무리를 몰아내었다. 양난적 무리들이 떠나자 장함은 그 지역의땅을 통째로 들어서 평판이 높은 이웅의 대성에 귀부했다. 이로써 이웅의 대성은 양주지역, 영주지역(사천성 남부 및 운남성) 및 형주지역(호북성과 호남성) 일대를 지배하는 초강대국으로 발돋움 하였다.(AD314)   

 

이웅은 매우 겸손하여 자신을 비우고 똑똑한 인재를 특별히 우대하여 재능에 다라 적재적소에 인물을 배치하였다. 숙부이자 태부 이양 또한 안으로 정치를 잘 하여서 백성들을 잘 길렀으며 세금을 감면하는데 앞장섰다. 또한 형벌과 정치를 신속하고 간략하게 처리하였으므로 죄수가 별로 없었고 감옥에는 적체된 죄수가 없었다. 이웅은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고 사관을 두어 역사를 기록하게 하였다.

 

남자는 1년에 곡식은 3곡 세금으로 내었고 여자와 병이 있는 사람은 그 절반으로 낮추었다.지역 특산물 세금도 견은 몇 장(장), 포는 몇 량(량)에 불과하였으므로 비록 다른 지역은 전쟁이나 가뭄으로 궁핍하고 가난했으나 촉지역은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문을 닫아 걸지 않았고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는 사람이 없었다. 주변 거의 모든 이민족들이 다투어 대성의 이웅에게 귀부하였으므로 국력은 날로 강성해졌다.

 

서진 군사가 부릉지역에 나타났다고 보고하자 이웅은 놀라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대꾸했다.

 

 “ 나는 낭야(동진의 사마예가 황제되기 전 낭야왕임)가 미약해서 

   석륵에게 잡혀 먹을 것을 걱정했는데

   생각지도 않게 군대를 동원할 수 있을 정도라니 

   사람을 기쁘게 하는구나! “

 

사마광은 그러나 이웅의 대성 정부는 절도와 위엄이 없어서 무분별하게 작록을 내렸고 국고가 넉넉지 않았으며 군대 또한 규율이 엄격하지 못한 것이 그들의 흠이었다고 자치통감에 썼다.(AD314년 1월)   

 

 

⑺ 혼란 속에 속속 건국하는 지방 군웅(AD315-AD320)

  

AD311년 3월 팔왕자 난의 마지막 주인공 사마월이 병사했지만 이미 서진 조정은 국정 장악능력을 상실했다. 유총이 수도 낙양을 함락시켰고 사로잡힌 회제(懷帝) 사마치는 평아공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전조를 세운 유연이 죽자 발생한 유예의 쿠테타 틈을 타서 유총이 등극했고 유총이 죽자(AD318) 근준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유요가 황제가 되었다. 탁발의로는 지금의 대동지역에서 대(대)나라를 건국했고(AD315) 남쪽 건강으로 도망간 낭야왕 사마예는 동진을 건국했으며(AD317) 석륵도 지금의 하북 업지역을 중심으로 후조를 건국하였고(AD319) 장식이 피살되자 동생 장무는 음원의 지지를 얻고 전량을 건국하였다.(AD320) 비록 건국을 한 것은 아니지만 지방 세력으로 웅거하고 있는 형주의 도간, 천수지역의 사마보, 태원지역의 유곤, 청주지역의 조억, 유주지역의 단필제, 요동 금주 지역의 모용외를 포함하면 AD320년 중엽에 이미 중국은 십 수 갈래 조각으로 쪼개져 있은 셈이었다.

 

이웅의 대성은 태부 이양과 임회를 보내 남쪽과 남동쪽의 동진 영토를 침략해 나갔다. 전조의 주군 유요는 동쪽의 석륵을 피해 서쪽으로 영토를 넓혀 나가면서 남안지역(감숙성 농서)을 치고 들어왔다. 그 지역을 지키고 있던 동진의 진안은 농성(감숙성 장가천 회족자치구)으로 도망갔다가 결국 잡혀 죽었다. 유요가 진안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그 지역 강족과 저족(강씨 및 양씨)들은 다투어 유요에게 귀부하고 항복하였다. 유요는 감숙성 동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양난적은 진안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 양난두와 함께 구지(감숙성 농남 및 서화)를 버리고 남쪽 한중으로 도망갔다. 양난적은 대성의 이웅에게 인질을 보내고 항복을 요청했다. 양난적의 뇌물을 받은 대성의 안북장군 이치는 양난적으로 성도로 호송하지 않고 자신이 억류하였다가 유요의 군대가 물러가자 즉시 풀어 주었다. 양난적은 바로 무리를 이끌고 무도(감숙성 성현)를 장악한 뒤 웅거하였다.

 

이치는 자신의 판단 실수를 깨닫고 곧바로 이웅에게 양난적으로 공격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웅은 이치의 형 이함(李琀), 이함의 동생 이오를 파견했다. 여러 신하들이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반대했으나 이웅은 듣지 않았다. 이함과 이치는 너무 깊이 들어 간데다 뒤를 이어주는 후원군도 없었다. 양난적이 후미를 끊어버리자 갇힌 이함과 이치는 수천 군사와 함께 전멸하였다. 이웅은 후계자로 생각했던 장조카 이함(李琀)이 죽자 슬픔에 잠겨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    

 

   

⑻ 이웅의 후계자 선택 이반(AD324)

 

이웅은 본처 임씨에게 아들을 얻지 못했다. 첩에게서만 10명의 아들을 얻었다. 이웅은 어리기도 하고 정실 소생도 아닌 아들보다는 영특하고 효성이 깊은 형 이탕의 아들 이반을 후계자로 정했다.

 

“ 형이 아버지 이특의 적통이기도 하고  

  이반 또한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며 

  학문을 좋아한다.“

 

삼촌이자 태부인 이양과 사도 양달이 반대하고 나섰다.

 

“ 반드시 아들을 세워야 하는 것은

  분수를 분명하게 밝히고

  찬탈을 막기 위함입니다.

  춘추시대 송나라 선공(宣公)과 오나라 여채(餘蔡)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웅은 듣지 않았다. 이양이 이렇게 한탄했다.

 

“ 나라의 혼란은 이 일로부터 일어날 것이다.” 

 

 

 

⑼ 동진 조정의 역적 왕돈과 충신 왕도(AD324)

 

AD318년 낭야왕 사마예가 건강(남경)으로 가서 세운 동진의 병권은 왕돈이 장악하고 있었다. 왕돈은 교만하고 방자했으며 그런 그를 황제도 싫어하면서 은근히 멀리했다. 결국 왕돈은 근거지 무창에서 반란을 일으켰고(AD322년 정월) 황제 사마예는 왕돈의 목에 5천호의 식읍을 걸었다. 왕돈의 군사는 허약한 동진 방어군을 격파하면서 장강을 따라 건강까지 함락시켰다. 황제 사마예는 원래 본거지(낭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신료들의 반대로 건강에 눌러 앉았다. 동진 정권은 완전히 왕돈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사마예가 죽고 똑똑하고 효성바른 아들 사마소가 제위(동진 제2대 황제 명제)에 올랐으나(AD322년 윤11월) 왕돈의 생각은 제위찬탈에 있었다. 왕돈이 측근 전봉과 황위찬탈 계획의 밀담을 나누었는데 그것을 왕돈이 아끼는 조카 왕윤지가 우연치 않게 엿듣게 되었다. 왕윤지는 일부러 과음을 하고 체한 척 음식을 토하면서 자리에 드러누웠다. 왕돈과 전봉은 왕윤지의 못들은 척 하는 행위를 알아채지 못했다. 왕윤지는 아버지 왕서에게 왕돈의 음모를 알렸고 왕서는 사도 왕도와 함께 반역자 왕돈을 제거하는 계획을 준비했다.(AD323)

 

왕돈은 왕돈대로 황실을 엎으려는 계획을 세웠고 조정은 조정대로 몰래 왕돈을 제거할 계획을 은밀히 꾸몄다. 이대로라면 양측의 피비린내 나는 대결은 불가피했고 그렇게 되면 동진 조정은 쪼개질 것이 분명했다. 이런 와중에 왕돈이 큰 병에 걸리게 되었다.(AD324) 이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한 왕돈은 측근 전봉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내 죽은 다음에는

  군사를 모두 해체하고 조정에 귀부하여 가문을 살리는 것이 상책이고, 

  무창 본거지로 돌아가서 조정에 순종하는 것이 중책이며,

  무리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조정에 대항하는 것이 하책이다.“

그러나 전봉은 이렇게 대꾸했다.

 

“ 공이 말씀하신 하책이 상책입니다.”

 

전봉은 심충과 함께 왕돈 사후에 반란을 일으키기로 작정했다. 당시 왕돈의 측근에는 온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왕돈에게 충성을 하는 듯 했으나 사실은 조정의 왕도의 심복이었다. 왕돈과 전봉과 심충의 계획을 다 알게 된 온교는 몰래 빠져나와 왕도에게 무창 왕돈의 군영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보고했다. 조정의 사도 왕도는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왕돈 토벌군대를 발동하고서 왕돈이 병으로 죽었다고 가짜 뉴스를 흘렸다. 화가 난 왕돈 또한 군사를 일으키면서 점쟁이 곽박에게 자신의 운세를 점치게 하였다. 

곽박이 말했다.

 

“ 이번 거병은 성공하지 못하겠습니다.”

    

불쾌해진 왕돈이 곽박에게 그렇다면 자신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곽박이 대답했다.

 

“ 오늘로 다합니다.”

격노한 왕돈은 그 즉시 곽박의 목을 참수시켰다. 그리고 왕돈의 형님 왕함을 대원수로 임명하여 5만 군사에게 장강을 따라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왕함은 왕도, 단수 및 조혼의동진 군대에게 크게 패해 강을 따라 전진하지 못했다. 왕돈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고 싶었으나 병으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후사가 없었던 왕돈은 형 왕함의 아들 왕응에게 자신의지위를 물려주게 하고 죽었다. 왕돈에 대항하고 왕도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왕함이 군사를 버리고 도망갔고 전봉의 부하가 전봉의 목을 잘라 왕도 군영으로 항복해왔다. 심충은 친구 오유의 집에 숨어 있다가 그 친구가 배신하는 바람에 잡혀 죽었다. 왕돈 일당은 이렇게 해서 완전히 토멸되었다. 동진은 건국 직후 최대의 위기를 이렇게 넘기고 향후 100여 년 동안 강남지역의 가장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장강 이남의 동진이 건국 초 위기를 수습하면서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는 동안 강북이역에서는 석륵의 후조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하북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당연히 강북의 또 다른 강국 전조의 유요와 석륵은 각축전을 벌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강 이북의 약소국 전량과 성한은 전조와 동진의 압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연대를 모색했다. (AD326)  

 

 

⑽ 이웅의 사망과 조카 이반 계승(AD334)

 

전조의 유요가 석륵에게 패사하고 이어 멸망(AD329)하는 동안 강북은 서서히 석륵에게 장악되는 동안 강남의 동진은 왕돈의 토벌에도 불구하고 지역 토호들의 불안이 지속되었다. 특히 남창지역의 곽묵이 반란을 일으켰고(AD330) 석륵은 그 틈을 타고 강남지역을 공격했다. 석륵의 강성한 힘이 강북지역을 통일하고 뻗어나가자 양난적은 대성의 이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AD331) 따라서 AD331년 경 중국은 강북의 석륵의 후조, 강남 동진, 그리고 성도를 중심으로 촉 지역 이웅의 대성 등 삼국분열 형태로 자리매김했다.  

 

AD334년 대성의 주군 이웅의 머리에 큰 종기가 났다. 평소에도 몸에 있는 많은 칼 상처로 고생을 겪었던 이웅이었다. 온 몸으로 종기가 번지면서 옛 상처들이 썩고 진 무르면서 심한 냄새가 났다. 여러 어린 아들들은 아버지 이웅을 기피했다. 다만 태자인 조카 이반만이 곁에서 밤낮으로 고름을 빨고 상처를 치료했다. 이웅이 사촌동생 대장군 이수를 불러 유언으로 정치를 보살피라고 유서를 남기고 61세로 죽었다.(AD334년 4월 25일) 태자 이반이 황위를 계승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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