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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3A 통합으로 건국한 북위 탁발규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3월16일 17시04분
  • 최종수정 2017년07월11일 10시1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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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 대(代)의 멸망(AD376)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활약(AD391-AD413)하던 바로 그 시절인 AD385년에 건국하여 북중국을 통일하고(AD439) 약 100여 년 동안 지배한 북위(北魏)의 뿌리는 대(代)나라다. 고대 몽골족의 한 지류인 선비족 탁발의로가 AD310년 세운 대나라는 66년 뒤인 AD376년 왕실 내분으로 전진 부견에 의해 멸망하였다. 당시 대왕이던 탁발십익건에게는 세자 탁발식이 있었는데 일찍 죽었고 본부인 모용씨가 낳은 여러 아들이 있었지만 후사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탁발십익건의 조카 탁발근은 평소 자신에게 왕위계승 기회가 주어지지 않음을 원망하고 있었는데 같은 처지에 있는 탁발십익건의 서자 탁발식군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왕세자가 세워지면 너부터 먼저 죽일 텐데 손을 미리 써야 하지 않겠는가”     

 

탁발식군이 그렇다고 믿고서 아버지 탁발십익건과 그 아들들을 모두 살해했다.(AD376)

 

탁발십익건의 손자 탁발규는 다행히 하란으로 몸을 피했고 부족지도자들은 난을 피해 같은 선비족인 전진의 부견에게로 도망갔다. 부견이 대의 장사 연군으로부터 탁발식군 반란의 자초지종을 듣자 군대를 보내 탁발식군과 탁발근을 붙잡아 천하의 큰 죄악을 저질렀다고 하여 거열형에 처했다. 그리고 대나라를 쪼개어 동쪽은 유고인이, 서쪽은 유위진이 통치하되 여섯 살 탁발규가 장성하면 다시 대 왕위를 계승시키도록 명했다. 이렇게 해서 대나라는 건국한지 66년만인 AD376년 전진의 부견에게 망했다.     

 

<2> 비수대전 패배와 부견의 침몰(AD383)과 전진 멸망(AD394)

 

부견으로부터 분할통치를 위임받은 유고인은 어린 탁발규를 모시고 선정을 베풀었다. 부견도 그런 유고인의 공로를 높이 샀다. 서쪽을 신탁통치한 유위진은 자신보다 대우가 높은 유고인에 대하여 질투를 하며 동쪽 지역을 여러 번 공격하였으나 번번이 유고인에게 격파당하여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북중국 최강국 전진의 부견은 장강 남쪽의 동진을 정복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했다.  AD383년 전진의 부견은 대군을 앞세워 동진 정벌에 나섰다. 군사를 일으키는 것에 대한 내부 반발이 심했다. 상서좌복야 권익은 동진의 어진 정치와 충신 사안과 환충 때문에 어렵다고 했고 부융은 천도가 따르지 아니함과 동진의 틈새가 없음과 그동안 아군에게 싸움이 너무 많아 피로하다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전쟁에 반대했다. 태자 부굉도 반대 반열에 섰고 부인 장부인과 가장 사랑하는 아들 부선까지 반대했다. 전쟁에 찬성한 사람은 비서감 주융과 전연을 멸망시킬 때 망명해 온 모용수 뿐 이었다. 8월 8일 보병 60만과 기병 27만 명의 대군이 장안을 출발하였다. 석 달 뒤 부견은 안휘성 회남시 서남쪽 지금의 수현 부근 비수강변에서 동진의 사현 군대와 맞붙었다. 사현의 계략에 빠져 부견은 대패했고 거의 전군이 몰살당했다.(AD383년 비수대전) 전쟁을 찬성했던 모용수와 3만 군대는 북쪽 업(지금의 한단)으로 도망가 다음 해에 후연이라는 나라를 건국한다.(AD 384년) 부견은 옛날 자신의 부하였던 후진의 요장에게 살해되었고(AD385) 아들 부굉이 잔당을 거느리고 버티었지만 결국 요장의 후진에게 멸망당했다.(AD394)  

 

<3> 도무제 탁발규(AD371-AD409,재위 AD386-AD409)의 도망(AD385)과 북위 건국

 

충실한 유고인에게 의탁되었던 어린 탁발규에게 어둠이 드리웠다. 유고인의 동생 유두권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탁발규에 대한 분위기가 나빠진 것이다. 유두권의 아들 유나진이 아버지에게 다가가 뱃속의 병통을 제거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유두권이 그게 누구냐고 하자 그것은 유고인의 아들 유현이라고 했다. 유두권은 조카 유현을 경계시하지 않았지만 유현이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유두권을 죽이고 자립했다. 그리고 탁발규도 제거할 생각이었다. 탁발규를 제거해야만 자신의 권력이 공고해 진다고 믿었다. 

 

유현의 동생 유항니가 탁발규 살해 계획을 몰래 아내에게 알렸고 아내 탁발씨, 즉 탁발규의 고모는 곧바로 탁발규 어머니 하씨에게 알렸다. 하씨는 유현에게 술을 취하게 한 다음 심복 장손건과 원타에게 함께 탁발규를 도망가도록 하였다. 탁발규는 지금의 영하자치구지역인 하란의 외삼촌 하눌에게로 도망갔다. (AD385) 탁발씨 성을 가진 하란 지역 부락지도자들은 탁발규를 세워 지도자로 삼고 그 다음해 정월에 탁발규가 대왕에 올랐다가 석 달 뒤 나라 이름을 위로 고쳤다. 그 해에 모용수는 중산(지금의 定州)에서 후연을 세우고 황제라 하였으며 요장도 북지(섬서 요현)에서 후진을 건국하고 황제라 칭하였다.(AD384) 모용충(冲)은 장안에서 서연을 건국했다.(AD385)

 

<4> 탁발규의 영토확장

 

전진의 부견을 추격 끝에 죽인 후진의 요장은 서연이 지배하고 있던 장안이 내란에 빠지자 장안에 입성하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다(AD386). 관중 지역을 장악한 후진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부굉과 그를 이은 부등, 부숭의 전진마저 멸망시킨다.(AD394) 

 

(1) 탁발규의 유위진 격파(AD391)와 서쪽 국경 확장

 

유위진이 아들 유직력제와 9만 명의 군사를 보내 북위 국경을 침범했다. 탁발규는 5천 군사로 직접 출병하여 유직력제 군사를 격퇴하고 나아가 내몽골 포두지역가지 진출했다. 유직력제는 체포되었고 유위진은 도망 중에 부하에게 참수되었다. 탁발규의 북위 영토가 서쪽으로 크게 넓혀졌다. 탁발규는 유위진의 막내아들 유발발을 추격했으나 설간부락의 추장 태실장이 유발발을 보호해 줌과 동시에 고평태수 몰혁간의 딸에게 장가가도록 해 주었다. 유발발은 나중에 혁련발발로 개명하였으며 AD407년 하나라를 건국하였다. 

  

 

(2) 탁발규의 참합피 대전(AD395년 10월)

 

부견의 전진이 멸망할 무렵(AD394-395) 북중국의 최강자는 모용수가 주도하는 정주의 후연과 요장이 이끄는 장안의 후진이었다. 서연은 끝내 후연에게 멸망당하고(AD394) 전진이 후진에게 흡수되었으니 장강 이북지역은 서쪽의 후진과 동쪽의 후연, 그리고 북쪽의 북위가 삼국처럼 대치하는 형국이었다. 물론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북위는 후연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조공을 바치는 형편이었으나 속으로는 서로 한 판 결전이 불가피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선제공격은 후연에서 먼저 일으켰다. 산기상시가 탁발규의 능력을 지적하면서 전쟁에 반대했지만 후연 황제 모용수는 황태자 모용보와 모용린 등에게 8만 군사를 붙이고 이어서 모용덕에게 2만 군사를 주어 북위가 장악하고 있는 포두지역을 공략하였다. 북위에서는 장곤의 제안에 따라 위장전술을 전개했다. 즉, 먼저 도망가면서 주변지역에 군사원조를 요청함으로써 후연군사들이 북위의 능력을 얕보게 한 다음 일거에 급습한다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후연의 배후에 군사를 매복시켜 후연군사와 조정과의 연락사절을 중간에서 모조리 사로잡도록 시켰다. 연락이 두절되자 조정에서는 전장에서의 정보가 끊겨 불안해졌고 전장에서는 병들고 늙은 황제 모용수의 건강상태를 몰라 전전긍긍하였다. 모용수 황제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자 태자 모용보는 모용린이 반란을 일으킬까 의심했다. 모용보는 즉각 군사를 포두 동쪽의 참합피(양고, 대동 북동쪽)로 물렸다. 탁발규의 2만 기병이 추격했다. 탁발규의 기병대는 세 갈래로 나누어 참합피의 모용보 군사를 포위하였다. 후연의 군사는 대패했으며 태자 모용보만 겨우 빠져나갔다. 참합피 대전이다.(AD395년 10월) 전쟁에 패한 모용수는 격노했고 그 다음해 토벌군을 이끌고 직접 참합피까지 다시 출병했다가 산처럼 쌓인 아군의 해골을 보고 충격을 받아 결국 피를 토하고 병사했다.(AD396) 이 때 모용수 나이가 71세 였다. 태자 모용보가 42세 나이로 황제가 되었으나 그는 아둔하였고 또 무능하였다. 그의 아들 모용책 또한 무능하였으므로 죽기 전의 모용수는 모용책 대신 모용회를 황태제로 봉택하기를 원했으나 모용보는 자신의 아들 모용책을 태자로 결정했다.(AD396) 태자책봉에서 밀린 모용회는 나중에 모반을 꾀하게 된다. 

 

 

(3) 후연의 분열과 침몰 (AD397)

 

모용수의 죽음으로 후연 조정이 흔들리자 탁발규는 40만 대군으로 신속하게 남진하여 후연

을 압박하였다. 탁발규의 군대는 태원과 삭주 등 산서성 일대를 남침하여 내려왔다. 군사를 

동쪽으로 돌려 후연의 도읍인 중산을 포위하고 군사를 나누어 북으로 계(북경), 남으로 석가

장과 기현 및 업현 등지로 밀고 내려왔다. 모용보는 모용린을 시켜 탁발규의 배후인 양성

(순평)을 습격하였다. 급작스런 공격을 받은데다가 내부적으로 갈등이 발생하자 탁발규는 후

연에게 화친을 제의했지만 승세를 탄 후연이 수용할 리가 없었다. 호타하를 사이에 두고 대

치하던 탁발규가 깊은 밤중에 1만 군사를 이끌고 야습을 감행했다. AD396년 11월 중산(정

주) 포위가 5개월로 접어들면서 물자가 궁핍해지자 후연 조정은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모용융은 황제와 함께 강력한 항전을 주장했으나 그때마다 대장군 모용린은 군사를 저지시

키면서 적당히 땅을 떼어 주고 화친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모용보는 모용린의 말대로 탁발

규에게 화친을 제안했고 탁발규도 수용했다. 그러나 황제 모용보가 다시 마음을 바꾸었다. 

탁발규는 풀려했던 중산포위를 다시 에워 쌓았다. 모용융이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전투

하려 나가려는 것을 모용린이 여러 번 막고 나섰다. 모용린은 황제 모용보를 시해하려다가 

실패하고 서산으로 도망했다. (AD397) 모용보도 몰래 성을 빠져나가 도망갔고 다음 날 탁발

규는 중산을 약탈했다. 이후 후연 세력들은 뿔뿔이 흩어져 남연 혹은 북연과 같은 나라를

세우기는 했으나 잔당에 불과했으며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북중국에서의 강국역할은 하지 못

했다. 모용보는 용성의 반란세력 난한에게 피살되고 그 아들 모용성이 난한무리를 제거하고 

황제 자리 를 이었다.(AD398) 

 

 

(4) 탁발규의 시벽전투 : 후진 요흥과의 전투(AD402)

 

요흥의 후진은 장안을 중심으로 사방팔방 영토를 확장하여 낙양까지 이르렀고(AD399) 북위또한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고원을 침공하고 있었다.(AD401) 동진하는 후진과 북위의 한 판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요흥은 직접 4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을 출발하였다. 탁발규 또한 기병 6만의 군사로 태원으로 부터 곽구까지 내려왔다. 미리 보낸 200여명의 척후병이 모두 사로잡히면서 요흥군의 장군 요평은 군사를 물려 시벽(산서성 임분 서남)에 웅거하였다. 탁발규는 시벽을 완전히 포위하였고 요흥은 4만 7천의 군사로 시벽을 구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강력한 북위군이 요흥의 지원군을 몽갱에서 격파하고 군사를 네 갈래로 나누어 협공하자 요흥의 군사는 산산히 부서졌다. 시벽의 포위망을 뚫으려는 요평의 시도도 실패하여 저항하던 전군은 물에 익사하였고 성내 2만 주민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시벽이 함락된 것이다. (시벽전투,AD401) 북쪽 유연의 욱구려가한이 비어있는 북위를 틈타 남침하려는 정보를 입수하고서야 탁발규는 서둘러 철군했다. 

  

<5> 탁발규의 대오각성과 북위 건국의 기초 : 통합

 

분무장군 장곤은 재능이 있고 모략의 능력이 뛰어나 탁발규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탁발규가 중원(하남지역)의 명사를 추천하라고 하자 장곤은 주저 없이 노부와 최령을 추천하여 그들이 모두 중용되었다. 최령은 최근에 자식을 남겨두고 후연에서 망명 온 사람이었다. 탁발규가 중산을 포위하고도 오랫동안 함락을 시키지 못하여 군량이 크게 궁핍해지자 탁발규가 대책을 물었는데 최량이 이렇게 대답했다.

 

“ 뽕나무 열매가 좋습니다.

  또 올빼미가 뽕나무 열매를 먹고서 새소리를 바꾸었다는 시경의 말씀도 있습니다.“

 

탁발규는 백성들에게 뽕나무 열매를 바치도록 명령했으나 속으로는 매우 수치스럽다고 생각했고 그런 제안을 한 최령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마침 후진이 동진의 영역인 양양을 침공하자 다급해진 동진의 옹주자사(치소가 양양) 치회가 탁발규의 동생 탁발준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이렇게 올렸다.

 

“ 현명한 형님(즉 탁발규)께서 중원을 호랑이같이 활보하십니다.”

 

탁발규는 이 편지가 매우 무례하다고 생각하여 장곤과 최령에게 동진의 황제를 깎아내리는 답서를 보내도록 하였다. 최령은 동진황제를 귀주(貴主)라고 호칭한 답신을 써보여 주었다. 탁발규는 자신을 ‘형’ 비유한 모욕에 대해 동진황제를 ‘귀주’라고 한 것에 대해 화를 내며 말했다.

 

“ 그를 깎아 내리라고 했는데

  그더러 귀주라고 하면 

  나를 형에 비유한 것에 비하면

  당치 않은 것 아닌가? “ 

 

탁발규는 망명한 최령이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여겨 죽음을 내렸다. 또 그를 추천한 장곤에게도 책임을 물려 축출해버렸다.(AD399)

 

그로부터 2년 뒤 동진에서는 환현이 사실상 군권을 장악하면서 반대세력을 무참히 처형하고 있었으므로 조정이 크게 불안하였다. 황실과 조정대신들은 환현에 대한 항전을 펼치기도 했으나 대부분 실패하여 여러 나라로 망명을 시도하고 있었다. 탁발규는 그런 인사들이 북위로 오기를 은근히 기다렸으나 동진의 망명인사들은 후진이나 남연으로 갈 뿐 북위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의아하게 생각한 탁발규가 연주자사를 보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연주자사가 이렇게 보고했다.

 

“ 망명인사들은 하나같이 군사력의 강성함과 조정의 공평함을 믿고 

  북위로 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연의 망명인사 최령이 무참히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모두 후진이나 남연으로 가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

 

탁발규는 이 말을 듣고 깊이 뉘우쳤다. 이후로는 대신이나 사인의 허물을 자못 관용으로 용서하였으며 특히 망명한 인사들에 대해 관용과 후대를 아끼지 않았다.(AD402)

 

 

<6> 탁발규와 북위건국의 기초

 

몽골민족의 한 지류에 불과한 선비족으로써 같은 종족인 전진의 부견에게 망한 대나라 후손탁발규는 도망다니며 쫓기는 신세였지만 장차 북중국을 통일하여 시황제의 진나라에 버금가는 거대한 북위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다. 그가 재위했던 기간(AD386-AD409)년은 광개토대왕 재위(AD390-AD413)과 거의 일치하였으므로 중국의 북쪽 국경에서 그 두 사람간의 대결 또한 치열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적으로부터 북위라는 작은 나라를 지켜나가는 일이 급선무였다. 북서쪽에는 유연의 욱구려가한, 북동쪽에는 광개토대왕의 고구려, 동남쪽에는 모용수의 후연, 서남쪽에는 후진의 요흥, 그리고 장강 아래에는 동진이 북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외에도 북량, 서량, 남연, 서연, 서진, 후량 등 그야말로 5호 십육국이 구름처럼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척박한 내몽고 하림각이와 대동지역에서 일어난 북위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조건이 열악하고 생존이 위태로운 나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한과 사마염의 서진 이후 수십 개 국가로 쪼개지고 분열된 북중국을 손자 탁발도가 완전히 통일(AD439)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한 것은 도무제 탁발규의 통합능력이 아니랄 수가 없다.  

 

그는 적국의 망명인사를 적극적으로 우대하였다. 같은 선비족인 서연, 후연, 남연의 망명 인사들을 융숭히 대접하는 것은 물론 강족인 후진이나 한족인 동진의 망명인사들을 환대했다. 최령을 잘못 죽인 것에 대한 실책을 통감한 이후로는 더욱 반대하는 세력을 포용하고 관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최굉과 이선이라는 훌륭한 신하를 중심으로 문치의 바탕을 세웠다. 중앙 및 지방 정부 360개 부서를 이부상서 최굉이 총괄하게 하였다. 또 국자태학생 정원을 3천 명으로 늘였고 오경박사를 두어 가르치도록 하였다. 탁발규가 박사 이선에게 물었다.

 

“세상에 가장 좋은 물건이 무엇인가?”

 

이선이 대답했다.

 

“ 책만 한 것이 없습니다.” 

 

탁발규가 다시 물었다.

 

“ 세상의 책은 얼마나 되며 어떻게 모을 수가 있겠는가?“

 

이선이 대답했다.

 

“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군주께서 진실로 얻고자 하신다면 

  어찌 다 모을 수가 없겠습니까? “

 

탁발규의 명에 의하여 전국의 서책은 평성(대동)으로 집결시켰다. 탁발규의 적국인사에 대한 관용과 교육문화 융성 정책이 결부됨으로써 야만족이라 일컫던 선비족 북위가 손자 탁발도 때 북중국을 통일하는 기초를 쌓은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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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전성기 북위 강역도(circa AD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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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03월16일 17시04분
  • 최종수정 2017년07월11일 10시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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